애도는 '슬플 애(哀)' 자에 '슬퍼할 도(悼)' 자를 쓴다. 소중한 이를 잃는 일은 슬프고 또 슬퍼서 못내 마음이 미어지게 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 마음은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이라 당사자가 아닌 이상 그 정도와 깊이를 결코 헤아릴 수 없다. 애도의 과정을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참담한 마음을 절규로 표출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어찌할 수 없는 상황으로 깊게 억눌러야 하는 이도 있다. <햄넷>은 애도의 면면을 찬찬히 들여다보게 한 뒤, 예술이 애도를 감싸안는 과정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그럼으로써 애도의 시기를 겪었거나 겪고 있는 이들을 위로한다.
영화는 매기 오페럴이 지난 2020년 발간한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햄릿을 세상에 공개하기 7년 전에 아들 햄넷이 11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이 사건이 햄릿의 창작에 영향을 줬을 것이라는 역사적 상상력에 뿌리를 둔다. 영화는 울창한 숲 속, 큰 나무의 뿌리 안에서 잠든 아녜스의 모습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관점으로 시작된다. 이내 시선을 거둬, 윌리엄과 아녜스가 불같이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속도를 내어 보여준다.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건, 이들의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그 이후의 비극이기 때문이다.
영화에는 비극을 맞이하기 위한 암시가 가득하다. 윌리엄이 폭력적인 아버지에게 벗어나 집필을 위해 런던으로 떠나는 순간부터 윌리엄과 아녜스 사이의 비극은 예견됐다. 윌리엄 없이 둘째 아들 햄넷을 출산한 아녜스는 예상하지 못했던 두 번째 진통에 '네 장례식에는 두 명이 함께할 것'이라는 예언을 떠올린다. 그리고 자신 앞의 산파와 시어머니를 보며 죽음을 직감한다. 하지만 아녜스는 죽지 않고 주디스를 무사히 출산한다. 결국, 이 예언은 세 자식 가운데 햄넷이 먼저 죽고, 남은 두 자식이 아녜스의 임종을 지키게 될 운명이라는 복선으로 작용한다.
쌍둥이 남매인 햄넷과 주디스는 옷을 바꿔 입고 주변 사람들이 헷갈리게 하는 장난을 즐긴다. 햄넷의 죽음에는 이 같은 전사(前事)와 주술적인 연출이 개입한다. 주디스가 흑사병으로 죽어갈 위기에 처하자, 햄넷은 죽음의 사신이 자신을 동생으로 착각해 데려가도록 밤새 주디스의 곁을 지킨다. 다음 날, 주디스는 기적처럼 회복하고 주디스의 증세를 그대로 앓게 된 햄넷은 극심한 고통에 몸부림치다 아녜스의 품에서 세상을 떠난다. 햄넷은 윌리엄이 런던으로 떠나기 전, '네가 가족을 지켜야 한다'라는 당부를 그렇게 지킨다.
출산 과정을 비롯해 햄넷이 죽은 장면에서 보여주는 아녜스(제시 버클리)의 연기는 보는 이의 마음을 숙연하게 할 정도로 뛰어나다. <밀양>과 <생일>에서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감정을 처절하게 표현했던 전도연 배우의 연기를 생각나게 한다. 이토록 절절하게 표현된 아녜스의 참담한 마음은 큰 상실감으로 이어졌다가 윌리엄에 대한 분노로 전이된다. 런던에서 집필 활동을 하느라 햄넷의 출산과 임종을 함께 하지 못했고, 햄넷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에서 런던으로 가야 한다는 윌리엄에게 마음의 문을 닫는다.
윌리엄의 진심은 영화의 막바지에 극적으로 드러난다. 아녜스는 윌리엄이 햄넷의 이름을 딴 연극 '햄릿(당시에는 햄릿과 햄넷이 혼용돼 쓰인 것으로 알려진다)'을 연다는 소식에 분개해 극장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선왕의 유령으로 분한 윌리엄과 햄넷을 똑 닮은 햄릿을 보고 적잖이 놀란다. 살아 있는 아버지는 창백한 유령으로, 죽은 아들은 피와 살을 가진 사람으로 재현된다. 윌리엄은 햄넷에 대한 죄책감을 이 같은 연출로 표현한다.
무대 위에 선 햄릿의 수려한 외모와 뛰어난 연기는 빛이 난다. 관객의 손에 땀을 쥐게 했던 칼싸움 장면은 햄넷이 윌리엄과 집 마당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던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 햄넷이 죽지 않았다면 무대 위 햄릿 같은 모습이었을 것이다(실제로 감독은 햄넷 배우의 친형을 햄릿 배우로 캐스팅했다). 아녜스는 꿈에만 그려왔던 장성한 아들의 모습을 그렇게 눈과 마음에 가득 담는다. 그런 햄릿은 관객을 보며 말한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어느 쪽이 더 사나이다울까? 가혹한 운명의 화살을 받아도 참고 견딜 것인가? 아니면 밀려드는 재앙을 힘으로 막아 싸워 없앨 것인가? 죽는다는 것은 잠드는 것, 그것뿐이다. 잠들어 만사가 끝나 가슴 쓰린 온갖 심뇌와 육체가 받는 모든 고통이 사라진다면, 그것은 바라마지 않는 생의 극치이다. 죽는다는 것은 잠드는 것이다. 잠을 자면 꿈을 꿀 테지, 그게 걸리는 군. 이승의 번뇌를 벗어나 영원의 잠이 들었을 때 그때 어떤 꿈을 꿀 것이지. 그게 망설임을 주는구나."
햄릿은 죽음 이후의 세상이 고통과 번뇌가 없는 긴 꿈일 수도 있다는 독백을 통해 자신의 죽음을 마냥 슬퍼하지만은 말아달라고 위로한다. 살아 있는 자에게는 가혹한 운명과 재앙에 굴복할 것인지, 맞서 싸울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 끝없이 뒤따른다고 설명한다. 독백을 마친 햄릿은 용감히 재앙과 맞서 싸워 이기지만, 적의 공격에 당해 '나는 죽는다'라고 외치며 죽어간다. 그 모습은 햄넷이 죽어갈 때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아녜스가 그런 햄릿을 향해 손을 뻗자 다른 관객도 함께 손을 뻗기 시작한다.
당시에는 열악한 위생 환경 등으로 많은 사람이 햄넷처럼 죽어갔을 것이다. 윌리엄의 연극은 아녜스를 비롯한 이들이 저마다의 햄넷을 집단으로 애도하고 떠나보낼 수 있도록 '대규모 씻김굿'의 역할을 한다. 많은 이들의 배웅을 받으며 햄릿은 영화가 시작할 때 아녜스가 웅크리고 있던 울창한 숲 같은 무대 벽으로 걸어가며 세상과 작별한다. 마치, 이 모든 것은 결국 자연으로 회귀한다는 듯이. 윌리엄은 이렇게 아녜스만큼이나 처절한 마음으로 예술로서 햄넷을 애도한다.
영화 초반, 윌리엄은 아녜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오르페우스 일화를 들려준다.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오르페우스는 하데스를 설득해 저승을 벗어날 때까지 뒤따라오는 아내를 돌아보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이승을 향한다. 하지만 이승을 코앞에 두고 궁금함을 이기지 못해 뒤를 돌아봐 아내를 잃는다. 햄넷을 잃고 윌리엄은 오르페우스처럼 아녜스와 멀어지지만, 연극을 통해 같은 마음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됨으로써 화해한다.
"나를 봐". 연극에서 유령으로 등장한 윌리엄을 보며 아녜스는 자신을 봐달라고 간절하게 읇조린다. 당신이 나의 아픔을 바라봐주었듯, 늦었지만 나 역시 당신의 아픔을 바라봐주겠다. 밀려드는 슬픔을 함께 감당해 나가자. 당신의 애도와 나의 애도는 같은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