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2022 연말 여행기 #3
혹스베이는 북섬 중부의 동쪽에 위치한 해안가 지역이다. 마틴보로와 마찬가지로 뉴질랜드에서 유명한 와인 산지 중에 한 곳으로, 특히 화이트와인이 많이 생산되는 동네로 알려져 있다. 우리는 이 동네에서 2022년의 마지막을 보내고 2023년 시작하기로 했다.
마틴보로에서 세 시간을 조금 넘게 달려가 도착한 혹스베이 헤이스팅스의 "Craggy Range". 뉴질랜드에 와서 처음 알게 된 와인 브랜드로, 샤도네이 와인의 맛을 알게 해 준 곳이다. 와이너리에서 운영하는 레스토랑도 유명해서 주말이나 여행 성수기에는 예약이 쉽지 않은데, 예약 취소된 Chef's Bar 자리를 운이 좋게 잡았다. 호기심 많은 남편은 Chef's Bar 자리에 앉은 다는 데 더 신나 있었다.
조금 미리 도착해서 잠시 기다렸다가 주방이 바로 보이는 바 테이블로 안내를 받았다. 마틴보로에서 오는 길에 구글맵으로 미리 살펴보고 계절 메뉴와 와인 페어링을 할 결정은 이미 하고 왔지만 혹시 몰라 메뉴를 다시 살펴보았다.
Chef's Bar의 장점은 디쉬를 셰프가 가져와 직접 설명을 곁들여준다는 점이다. 보통은 담당 웨이터/웨이트리스가 음식을 가져다주고 간단한 설명을 덧붙이지만, 음식을 총괄하는 셰프가 직접 어디서 온 재료를 어떤 방식으로 만들었다며 자신 있게 설명을 해준다. 궁금한 점이 있으면 바로바로 물어볼 수도 있지만 우리는 그저 공연을 보는 관객의 입장에서 빠른 템포로 움직이는 주방과 나오는 음식들에 집중하기 바빴다.
바이트, 앙트레의 산뜻한 디쉬에 화이트와인으로 시작한 코스는, 양고기 요리와 어울리는 프레스티지 레드와인으로 이어졌다. 디저트는 야외 자리로 안내받아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즐겼다. 배도 부르고 음식과 잘 어우러지는 와인에 한껏 취했다.
한참을 앉아 얘기하며 술을 깨고는 네이피어 숙소로 향했다. 혹스베이에서 가장 큰 도시로 네이피어와 헤이스팅스는 쌍둥이 도시라고 불린다고 한다. 네이피어에서는 새해전야 행사를 한다기에 새로운 곳에서 새해를 맞는 우리를 위한 정한 숙소였다. 체크인을 하고 도심을 지나 바닷가를 걷다 보니 오클랜드를 축소해 놓은 듯한 도시 분위기이다. 해넘이와 해맞이를 할 수 있을까 내심 기대했는데 아쉽게 날씨가 잔뜩 흐렸다.
다음 날 아침 숙소에서 간단히 아침을 먹고 다시 헤이스팅스의 Craggy Range로 향했다. 여행 출발 전 레스토랑 예약은 이미 꽉 차있어, 아쉬운 대로 12월 31일로 와인 테이스팅을 잡아두었었다. 전날 레스토랑에 간 김에 와인 테이스팅도 함께할까 고민하다가 와인 테이스팅은 다음날 와서 제대로 하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에 예약을 바꾸지 않았다.
시간에 맞춰 들어가니, 전날 레스토랑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하던 직원이 와인 테이스팅을 담당하고 있다. 전날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며 본 것 같다며, 다양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가벼운 대화로 테이스팅을 시작했다. 마틴보로에서 몇 군데 와이너리를 다녀왔다고 맛보는 게 조금은 익숙해졌다. 화이트 와인으로 시작해서 점차 바디감이 있는 레드와인의 순서이다.
전날 레스토랑에서 맛보았던 와인도 여럿이 포함되어 있는데 레드와인은 마틴보로, 화이트와인은 혹스베이에서 생산되었다. 우리보다 앞서 테이스팅을 하고 간 지인의 추천을 받아 프레스티지 테이스팅을 선택했는데, 프레스티지 와인에서 좋은 포도가 잘 숙성됐을 때 나는 묵직한 맛이 인상적이었다.
이번 여행을 끝내고 한국에 다녀올 예정인 나는 처음 Craggy Range의 샤도네이를 맛보고 받았던 충격을 가족, 친구들과 나누고 싶어 한국에 가져갈 와인을 골랐다. 남편도 평소라면 주저했을 고급 와인을 본인을 위한 선물로 몇 병 골라 총 열두 병을 담아 추가 할인까지 받아 무겁게 나왔다.
네이피어로 돌아가기 전 헤이스팅스에서 추천받은 카페 "First Hand"에 들렀다. 늘 그렇듯 남편은 플랫화이트, 나는 롱블랙을 마시던 중 남편이 바리스타 분 얼굴이 낯이 익는다고 했다. 알고 보니 인스타그램으로 소통하던 바리스타여서 커피를 다 마시고 일어나는 길에 인사를 건넸다. 우연한 기회지만 만나서 반가웠고 커피도 맛있었다고. 직원분은 반가워하며 다음날 헤이스팅스에서 선데이마켓이 열리니 시간이 되면 들러 보라고 추천을 해줬다. 오클랜드에서 열리는 마켓은 남편이 일 하는 시간이라 같이 구경할 기회가 없었는데, 조금 돌아가더라도 구경을 하고 싶어 다음 날 보자는 인사를 하고 떠났다.
숙소에 잠깐 들렀다가 그래도 12월 31일은 건강하게 보내자 싶어 헬스장으로 갔다. 숙소에는 딸려 있지 않지만 우리가 평소 다니는 헬스장 지점이 있어 지난 며칠간 술로 촉촉이 적셔 두었던 몸을 헬스로 달랬다. 노곤해진 몸에 잠깐 낮잠을 자고 아홉 시 반에 열리는 불꽃놀이를 보러 나갔다. 어린이들이 있는 집을 배려한 행사 측의 계획인지 불꽃놀이가 아홉 시 반, 열두 시 두 번에 나뉘어 열린다고 했다. 오클랜드도 시골이라며 농담을 자주 하는 우리는, 네이피어 시골에 불꽃놀이를 얼마나 크게 하겠냐며 기대 없이 나갔는데 웬걸, 주변 동네 사람들이 다 모여 있는 것 같았다. 길은 진작부터 통제하고 푸드트럭 여러 대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전날 설치 중이던 무대에서는 락 공연이 펼쳐지고 있고, 아홉 시가 넘어서야 어둑어둑 해졌다.
불꽃놀이는 기대 이상! 코로나 이전에는 크지 않더라도 일 년에 한 번 정도 보러 갔던 것 같은데, 오랜만이었다. 숙소로 돌아가 브라우니와 체리에 사 온 와인을 곁들여 지난해보다 짧아진 우리의 2022년을 마무리 짓고 불꽃놀이 2차전에 맞춰 나왔다.
Count down! 5, 4, 3, 2, 1, Happy New Year!
연애시절부터 새해맞이 카운트 다운은 TV를 켜고 방구석에서 하던 우린데 사람들과 함께 카운트 다운으로 맞이하는 2023년도 새롭다. 새로운 한 해에도 즐거운 일들이 많기를 기원하고 숙소로 돌아와 푹 쉬었다.
우리 여행의 마지막 날, 전날 추천받았던 선데이 마켓에서 커피와 바로 옆에서 파는 바게트 샌드위치로 아침식사로 시작했다. 전날 마신 와인 숙취로 베트남 쌀국수 국물이 간절했지만 다른 선택이 없었다. 집으로 가는 길에 먹을 블루베리를 사고 치즈와 꿀 구경을 하고 출발했다. 나오는 길에 바이올린을 들고 있는 어린이를 응원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괜히 따뜻해졌다.
올라오는 길에는 악명 높은 5번 고속도로를 지나왔다. 산길이라 험하고 사고가 많기로 유명한 길이라 남편이 운전하고 조수석에서도 바짝 긴장을 했다. 타우포에서 운전대를 바꾸고 해밀턴에 있는 카페에서 커피 한 잔 하고 오클랜드 집까지 무사히 도착했다. 한국에서 경차로 부산과 제주도를 오갔던 우리지만 막상 뉴질랜드에서 지내다 보니 장거리 여행은 쉽지 않다. 남편과 내 휴일을 맞추고 좋은 날씨를 만날 확률은 얼마나 될까.
뉴질랜드에서 정신없는 몇 달을 보내느라 외국에 살고 있는 걸 실감할 틈이 없었다. 맘먹고 먼 길을 다녀오니 우리가 왜 뉴질랜드에 돌아오고 싶어 했는지, 우리가 왜 여기를 좋아하는지 확인하고 온 기분이다. 운전하면서 파란 하늘 원 없이 보고, 끝없이 펼쳐진 포도밭을 보면서 새삼 우리가 뉴질랜드에 있는 걸 실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