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2022 연말 여행기 #2
다음 날에는 웰링턴 호텔 근처에 드디어 문을 여는 카페가 있어 들렀다 마틴보로에 넘어가기로 했다.
처음 부산 “Naive Brewers”를 갔을 때가 떠오르는 "Pour and Twist"라는 이름의 카페. 에스프레소가 위주인 뉴질랜드에서 에스프레소 머신 없이 Pour over와 콜드브루만 사용한 커피를 파는 곳이다. 오랜만에 깔끔한 워시드 브루잉 커피를 마시고 각자 원하는 커피 한 잔씩 더 마신 후 카페인에 얼큰하게 취해 출발했다.
웰링턴에서 마틴보로까지는 한 시간 반 정도 걸리는 거리. 다행히 우리가 예약한 와이너리 숙소 정리가 일찍 되어 체크인을 바로 할 수 있었다. 와인에 취하는 동네라서 인지 벌겋고 행복한 얼굴로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많다. 가끔 육인용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들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가까운 거리인데도 우중충하던 웰링턴과 달리 파란 하늘이라 초록 포도밭이 더 도드라졌다.
짐을 두고 와이너리에서 운영하는 음식점에서 점심을 먹었다. 와인 동네에 왔으니 와인 한 잔 곁들여서. 음식은 맛 자체가 안나는 그런 맛이었지만 그래도 포도밭 한가운데서 언제 음식과 와인을 즐기겠나 싶어서 만족하기로 했다.
마틴보로 두 번째 날은 남편이 가장 기대하던 날이었다.
오전에 “Ata Rangi (아타랑이)” 와인 테이스팅 예약이 잡은 날이라 전날부터 아타랑이 근처까지 산책하며 다음 날을 고대했다. 그동안 코로나로 우리 일정이 늦어지는 동안 남편은 구글맵 로드뷰로 이미 여러 차례 다녀왔다고 했다. 한국의 와인매장에서 아타랑이 와인을 사서 맛본 후, 남편은 뉴질랜드에 가면 꼭 와이너리에 가봐야겠다고 버킷리스트에 담아두었었다. 드디어 D-day.
와인 맛을 제대로 즐기기 위해 숙소 방에 있는 아침을 열심히 챙겨 먹고 아타랑이로 갔다. 새로 지어졌다는 테이스팅 룸은 포도밭이 잘 보이는 통창으로 되어있다. 호주, 프랑스에서 온 부부와 종종 테이스팅 하러 온다는 모녀와 함께 테이스팅을 했다.
테이스팅은 보통 화이트로 시작해서 레드 순서로 맛을 본다. 이번 여행은 뉴질랜드 화이트 와인을 많이 알게 되는 여정이었다. 뉴질랜드 화이트 와인은 쇼비뇽블랑이 많이 알려져 있는데 직접 맛을 보다 보니 리슬링과 샤도네이의 매력은 또 다르다.
쇼비뇽블랑으로 시작해서 한국에서 코로나로 막힌 우리를 달래주던 레드와인 피노누아까지 테이스팅을 마치고 와인 여섯 병을 사들고 나왔다. 원래 목표는 오전에 아타랑이 말고 다른 와이너리 한 군데를 더 가는 거였는데, 테이스팅을 마치니 술기운이 올라와 일단 휴식이다.
마틴보로 중심가에 있는 카페에서 커피로 해장하고 웰링턴 호텔 듀티 매니저가 추천해 주었던 “Poppies (퍼피스)”에 가보았다. 유통은 로제 와인만 하고 나머지는 와이너리에서 직접 판매를 하는 곳이라며 설명해 주는데, 예약을 따로 받는 곳이 아니라 빈자리로 안내하고 동시에 여러 테이블에서 와인을 소개해준다. 캐주얼하게 테이스팅을 하는 곳이라 상대적으로 집중도는 떨어지지만 와인 맛은 떨어지지 않는다.
각 와이너리마다 일정 수량 이상 와인을 구매하면 테이스팅 비용을 빼주는 방법을 쓰는지라 어쩔 수 없이 행복하게 와인을 사들고 나왔다. Poppies는 와인 맛도 좋지만 와인병 모양이 특별해서 꽃병으로 쓰기에도 좋을 것 같다.
숙소로 돌아와 잠깐 쉬었다가 마틴보로 중심가에 있는 태국음식점에서 포장을 해와 저녁을 먹기로 했다. 우리가 사는 오클랜드에는 어딜 가나 중국음식점이 많이 있는데 마틴보로는 외곽으로 가야 두 군데 정도 중국음식점이 있다. 다행히 중심가에 평이 괜찮은 태국음식점이 있어 밀가루와 와인에 절여진 우리 위장을 풀어줄 밥과 국물을 구할 수 있었다.
숙소 앞 포도밭에 앉아 태국음식에 웰링턴에서 가져온 맥주를 곁들었다. 해가 천천히 지는 계절이라 소화시킬 겸 다시 오기 쉽지 않은 동네를 거닐었다. 남편이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아타랑이도 한 번 더 밖에서 구경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마지막 날은 마틴보로를 떠나 이번 여행의 마지막 목적지인 Hawke’s Bay(혹스베이)로 가는 날이다. 원래 계획은 마틴보로를 마지막까지 천천히 느끼고 출발하는 거였는데, 혹스베이에서 꼭 가고 싶던 레스토랑 점심 예약을 성공해 두 시까지 혹스베이에 도착을 해야 했다. 숙소 키를 반납하고, 마지막으로 포도밭에서 기념사진을 남겼다. 이박 삼일 내내 맑은 날씨와 파릇파릇한 포도밭, 향긋한 와인에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