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뉴질랜드 첫 챕터 끝
학교 과정을 마치고 석 달 후 졸업식이 열렸다. 그 사이 혼자 한국 그리고 남편과 국내여행을 다녀왔고, 면접을 보고 회사생활을 시작했다.
낯선 뉴질랜드 생활에서 학교 울타리가 든든하게 느껴졌는데 왠지 졸업을 하라니 아쉬움이 몰려왔다. 수업을 같이 듣던 친구들을 오랜만에 만나는 건 기다려지기도 했다.
뉴질랜드의 졸업식은 한국과 조금 달랐다. 한국 졸업식은 과사무실에서 배부하는 졸업 가운을 입고 전체 강당에서 졸업식 행사를 한 후 단과대학별 졸업식에서 학위를 받았었다. (한국에서 석사를 끝낸 것도 이미 몇 년 전이니 코로나를 지나면서 어떻게 바뀌었는지는 모르지만..)
뉴질랜드에서는 학교에서 졸업할 자격을 갖추었다는 메일과 함께 1) 졸업식을 참석할 것인지 2) 우편으로 졸업장을 수여할지 3) 졸업을 유예하고 다음 졸업식에 참여할지 선택하라는 안내가 왔다. 그동안 비싼 학비를 내고 나름 열심히 다녔느니 당연히 참가해야지 싶었다. 졸업식을 앞두고 졸업식 가운 대여업체 정보와 함께 학위별 휘장(regalia) 색상 안내가 왔다. 학위수여자는 적절한 복장을 갖추지 못하면 참석이 불가하다고 했다.
가운 빌리는 데만 100불이니 비싸다고 투덜거리면서도 내 마지막 졸업식일지 모르니 돈을 쓰자 싶었다. 온라인으로 가운과 석사모, 휘장 대여를 신청해 졸업식 일주일 전 택배로 받았다. 가운 안에 드레스를 많이 입는 것 같아 뭘 입을까 망설이다 개량한복을 입기로 했다. 한국인이 별로 없는 시기에 학교를 다녔으니 이 정도 개성이면 되겠지.
졸업식은 꽤 큰 행사인지라 가족들이 많이 참석한다. 인당 입장권 네 장씩 배부가 되어 남는 표를 찾아다니는 친구들과 가족들이 외국에 있어 표가 남는 친구들이 표를 나눴다. 졸업식이 유튜브로 생중계되어 한국에 있는 부모님도 멀리서 지켜볼 수 있으니 괜히 든든했다. 남편만 오게 될 줄 알았는데 고맙게도 연말에 졸업할 예정인 친구들 여럿이 와주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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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졸업식 날, 한껏 차려입고 시내 한복판 컨벤션 센터로 향했다. 학위수여자들은 옷을 입고 입장준비를 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이랑 안부를 묻고, 그동안 서로 수고했다며 격려를 했다.
식장에 입장을 하고, 뉴질랜드 마오리 전통의 하카공연을 시작으로 졸업식이 시작됐다. 축사와 졸업자 대표 연설 후 졸업장 수여. 학사와 준석사, 석사, 박사 순서로 한 명씩 호명을 하고 학위를 받았다. 마오리나 퍼시픽 계 졸업자 중 일부는 가족들에게서 축하 의식을 받기도 했다.
행사장 밖으로 나가 사진을 찍고 교수들한테도 감사 인사를 했다. 졸업식을 찾아준 친구들과는 한국식으로 기념하자며 시내에 있는 한국식 중국음식점으로 갔다. 한국식 중국음식을 처음 접해본 친구들에게 짜장면에 탕수육이 졸업식 음식이라 소개했다.
그날 밤 남편이랑 마주 앉아 와인을 마시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그동안 가장의 책임이 무거웠다며, 내 졸업에 본인이 더 울컥한다 했다. 한국에서 가져온 초기자금 말고는 남편이 혼자 버는 돈으로 빠듯하게 생활했다. 비싼 뉴질랜드 물가에 늘 불안했는데 졸업하고 맞벌이를 하게 되니, 재빨리 가장 타이틀을 넘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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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하던 1년 8개월이었다. 회사생활을 하며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던 시작과 달리 대단한 친구들 사이에서 뒤처지는 느낌에 늘 불안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영어가 나오질 않아 말문이 막히기도 했고, 이상한 사람과 엮여 마음고생도 심하게 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학교 생활에도 익숙해져 점수가 조금씩 올랐고, 다른 나라에서 다른 삶을 살다왔지만 의지할 수 있는 친구들이 하나둘씩 생겼다. 후보였지만 학교 대표로 참석한 대회에서 좋은 성과도 얻었다. 졸업하고 회사생활을 다시 시작하며 일을 대하는 방법이 바뀐 걸 느낀다.
30대에 회사를 그만두고 뉴질랜드에서 시작한 첫 챕터가 끝났다. 여전히 불안정하고 서툰 것 투성이지만 두 번째 챕터에서는 그래도 해볼 만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