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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ynthia Dec 30. 2018

<헌터걸>

너무 늦게 나온 소녀영웅스토리

내가 어린 시절(약 25~20년전) 보았던 <웨딩피치>, <천사소녀네티>,<세일러문>,<카드캡터체리>류의 '소녀' 전사만화를 만약 지금 다시 봐야 한다면 아마 몇분 지나지않아 화면을 외면해 버릴 것이다. 어린 시절에는 당연히 '보여지는 것' 외에 사회적 함의와 메세지를 읽을 수 없었으니, 예쁜 옷을 입고 악당을 물리치는 내 또래 소녀들의 활약기가 마냥 멋있게만 느껴졌다. 그러나 지금 와서 돌아보니, 세일러문을 필두한 이런 소녀전사만화 류가 여성들에게 미치는 해악이 얼마나 큰지를, 어른이 되어서야 깨달았다.

그들이 싸우는 악은 판타지적 세계관에 의해 지구를 정복하고자 하는 못된 무리, 혹은 '진정한 사랑'(이걸 왜 굳이 아동만화에서 다루는지 아직도 모르겠음;;사랑 외에도 어린이들에게 가르칠만한 더 좋은 가치가 훨씬 많다고 생각한다.)을 방해하는 못생긴 마녀를 무찌르는 것이 주된 전투의 테마이다.

돌아보면 로켓단이나 마녀가 악역으로 설정되어 무작정 못됐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돌아보니 악당 캐릭터가 더욱 옷도 잘입고 말도 잘하고 실현하고자 하는 가치관도 뚜렷했던 기억이 있다. 악역이 더 멋있음-,-;;


쨌든 이런 소녀전사만화 류를 보고 자란 나의 유년시절은 당연히 여자란 '진정한 사랑을 위해 예쁜 옷을 입고 긴머리를 높게 묶고 요술봉을 휘두르며 도덕을 지키'는 존재로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만화에서는 '변신'장면이 절대 빠지지 않았다. (카드캡터체리의 경우, 친구 지수가 의상을 직접 해 입히기 때문에 조금 다르지만 본질은 결국 다르지 않다. ) 키도 작고 못생겨서 남자애들한테 놀림받던 어떤 소녀가 분홍분홍 핑크빔에 휩싸여 변신의 과정을 거치면 쭉쭉빵빵 8등신에 화장한 얼굴이 되어 있고, 눈은 3배로 커지고, 치마는 엉덩이나 겨우 가릴만한 초초초미니스커트 착장으로 변한다. 특히 이 변신 과정은 개인적으로는 정말 유해한 장면 중 하나라 생각한다. 변신 과정 자체가 성인 여성들에게 강요되는 화장과 의복 착장을 그대로 묘사하며, 거의 전라의 실루엣을 비추인다. 무의식 중에 '나도 저런 변신 과정을 거치면/어른이 되면 다리가 젓가락처럼 길어지고 속눈썹이 샘솟고 입에서 붉은 빛을 띄게 되는 걸까?'하는 말도 안되는 의문을 가졌던 것 같다.

반면 소년만화는 어땠을까?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네 꿈을 키워봐, 너는 뭐든지 할 수 있어, 다른 세상으로 나아가자, 세상은 너의 것' 이런 메세지를 전달하고 있었다. 같은 나이대 타겟 성별만 달라졌는데 이렇게까지 전하는 메세지가 달라질 일인가.


그런 의미에서 <헌터걸>은 이 땅의 모든 어린이들이 읽었으면 하는 책이다. 성별에 따라 전사들의 역할이 달라지지도 않고, 주인공의 화살촉이 향하는 악당 또한 자신과 또래에게 실제적인 피해를 입히는 '나쁜 어른들'이다. 이 나쁜 어른들은 자신과 자신의 친구들의 어리숙함을 이용해 '아름다움'이라는 허상을 팔아 장삿속을 챙기려는, 허상의 가치를 대유하는 존재가 아닌, 현대사회의 상업성과 외모지상주의를 대표하는 심볼처럼 그려진다.


헌터걸이 되는 과정은 예의 영웅서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중학교때부터 학교에서 배운 거,,,)

1. 출생의 비밀-까지는 아니지만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시고 정체를 숨긴 아버지와 작은 마을에서 살다가, 존재조차 모르던 외할머니와 만남

2. 헌터걸이 되기 위해 잠재력을 검증받음

3. 헌터걸 신분을 얻은 뒤 끝없는 훈련

4. 악당을 처단하는 과정


이런 소년전사 스토리에서는 어느정도 짜여진 클리셰가 있기 마련. 그 클리셰를 반복하면서도 이 소설이 신선하고 재밌다고 느껴진 것은, '어린','여성','전사'에게 주어진 역할이 '예쁜옷을 입고 요술봉을 통해 허상의 악당과 싸운다'는 진부한 틀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헌터걸이 된 강지는 예쁜 옷을 입지도, 요술봉을 들지고, 허상과 싸우지도 않는다. 헌터걸의 전투력은 변신을 통해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꾸준한 강도높은 훈련을 통해 길러지는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일전의 소녀변신전투만화류에서 크게 놓친 부분을 짚고 넘어간다. 악당을 물리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예쁜 화장도, 긴 머리도, 사랑의 힘도 아닌 바로 탁월한 실력이었다. 물론 난 이제 30대 어른이지만, 어린 시절 봤던 그런 만화들에서 충족하지 못한 일종의 쾌감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만화영화를 봤던 소녀들에게 드레스나 요술봉이 아니라, <헌터걸>을 쥐어주었다면, 우리 사회는 얼마나 많이 바뀌어 있었을까?


자세한 스토리를 쓰지는 않겠다. 다만 이 동화가 우리 사회에 전하는 메세지만큼은 분명하다는 것을 전하고 싶다. 당신이 어른이든 어린이이든 이 책을 꼭 한번쯤은 읽어봤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어린이라면 매스미디어가 전하는 메세지에서 벗어나 더욱 능동적이고 진취적인 여성상을 세울 수 있을 것이고, 어른이라고 하더라도 어린 시절 갖지 못했던 메시지를 되새김으로서 여성으로서, 어른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좀 더 명확하게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아이를 키우지 않는 어른이라도, 어른으로서 어린이들에게 메세지를 전할 수 있는 방법은 수없이 많다고 생각한다. 이런 책을 쓰는 것처럼 어린이 독자들에게 좋은 책을 쥐어줄 수 있다면 더할 나위없이 보람찬 일일 것이나, 책을 쓸만큼 명성이 있거나 글쓰기 능력이 탁월하지는 않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올해 중간부터는 동네를 돌아다닐 때 '화장을 하지 않은' 맨 얼굴을 갖는 것을 시작하였다. 동네 청소년들에게 어른 여성이라고 무조건 쭉쭉빵빵 8등신에 비싼 옷과 높은 구두, 화장을 한 얼굴을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 행동들은 어느 정도까지는 나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사회를 향해 던지는 메시지이기도 했다. 어떠한 방식으로든 우리는 사회를 통해 메시지를 던지는 행위를 할 수 있다. 그 행동을 통해 누군가 나의 생각을 알아차리고 한명이라도 변화한다면 작지만 엄청난 일을 하고 있는 것 아닐까.


어린이들의 손에서 립스틱을 놓게 하고, 헌터걸을 읽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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