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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ynthia Jun 06. 2019

고향집 그리고 피아노

피아노가 불러 일으켜준 농도짙은 기억

고향집을 방문했다 떠나기 불과 몇시간 전. 오랜만에 피아노 뚜껑을 열어보았다.


7살때부터 13살까지, 지겹도록 쳤던 피아노였다.


학원갔다가 혼나는게 싫어서 가끔은 울면서 피아노 학원 가기를 거부할 정도로 정을 못붙였었다.


난 노래부르는게 더 좋은데 대체 나에게 피아노며 바이올린이며 왜 자꾸 다른 악기들을 시키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세월의 절반 이상은 꾸역꾸역했던 기억밖에 없다. 싫어도 시키면 해야했던 시절이니까.


중학생이 되고 공부에 전념하기 위해 피아노 학원을 더이상 다니지 못하고서야 집에서 혼자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토요일에 학교를 다녀오고 나서 해가 질때까지 혼자 찬송가나 명곡집을 펴놓고 50곡을 넘게 치기도 했다. 사춘기 시절 으레 겪는, 공부와 교우관계같은데서 오는 스트레스를 피아노로 굉장히 많이 풀었던듯 하다.


고등학교 때는 거의 밤늦게 귀가해서 피아노는 언감생심. 대학을 가서는 피아노를 치기 쉬운 환경이 아니었기에 자연히 건반을 터치해볼 일이 많지 않았다.


그러다가 정말정말 오랜만에, 집에 있던 피아노 커버를 열고 그때 그시절 연주해보았던 곡들을 몇곡 연주해 보았다.


은파/소녀의 기도/꽃노래 등 트릴과 화음이 많고 기교가 복잡한 곡들도 무난히 쳤었는데, 손가락이 굳어서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자, 뭔가 울컥하기 시작했다. 한때는 지겹게도 치던 곡들이었다.


우습게도 또 어떤 부분에서는 손이 기억하는 듯 뚝딱뚝딱 칠 수 있었다. 아마 한창 피아노를 치던 그 시절 가장 좋아했던 부분으로 기억한다.


얼마 되지 않는 시간 같은데, 어느새 순식간에 이 먼지처럼 시간이 켜켜이 쌓여버렸구나. 어릴 때의 내가 꿈꾸던 어른의 삶을 살고 있긴 한건가. 어른이 되면 뭐든 척척 될줄 알았는데, 아직도 나의 앞날은 불투명하고 불안하고 거대한 벽을 마주한듯 막막하기만 한데 말이다.


이제 더이상 엄마아빠에게 기댈 수 없는, 오롯이 한명의 어른분만큼을 해내야한다는 중압감도 이 날따라 이상하리만치 실감이 났다.


심장을 쥐어짜는듯한 저릿저릿함이 오랫동안 가시지 않았다. 나는 내 고향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는데, 수십년간을 쌓아온 기억이 쌓인 이 공간에서의 추억같은 것들이 하나둘 풀어질 때마다 감당하기 어려운 감정들이 밀려온다.


어쨌든 이 곳이 내 고향이라는 사실, 그리고 내가 이 곳에서 쌓아온 기억들이 많고 많다는 것을 마주하니, 길을 지나며 보는 장면 하나하나가 특별하게 느껴졌다. 아마 수백번은 넘게 지나다녔을 이 길. 그러나 어릴 때와 지금의 느낌은 분명히 다르다. 그리고 누군가 이 길을 수없이 지나다닌다 해도 내가 느끼는 이 감정과 절대 같지 않겠지.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에서도 십여년의 세월을 보냈기에 아련한 기억으로 남은 곳들이 분명히 있다. 하지만 어린 시절을 보낸 이 공간만큼의 감정을 불러일으키지는 않는다. 기억을 쌓아온 시간의 밀도가 그만큼 다르기 때문이다.


그 어느 곳보다 기억의 농도가 깊게 담겨있는 내 고향. 언젠가는 이 곳으로 돌아와 살게될 것이다. 그때까지 또 많고 많은 기억들을 이곳에 담겠지. 나에게 있어서 가장 특별한 곳 내 고향.


다시 돌아올 때까지 잠시만 안녕.


약 이십여년을 함께 해온 피아노, 페달이 고장나 소리조차 제대로 안나지만 이 피아노를 연주하는 경험은 그 무엇보다 특별한 감정을 안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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