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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루나 Feb 24. 2023

#4 이승윤 <달이 참 예쁘다고>

'현존'하는 삶에 대한 찬가

"

밤하늘 빛나는 수만 가지 것들이

이미 죽어버린 행성의 잔해라면

고개를 들어 경의를 표하기보단

허리를 숙여 흙을 한 움큼 집어 들래


방 안에 가득히 내가 사랑을 했던

사람들이 액자 안에서 빛나고 있어

죽어서 이름을 어딘가 남기기보단

살아서 그들의 이름을

한번 더 불러 볼래

"


저 멀리 빛나는 별을 동경하기 보단, 내 발 밑에 흙을 집어 들겠다는 화자. 이 노래는 무슨 메시지를 전하려는 걸까, 하고 궁금증을 자아낸다.


내가 느낀대로 해석해보자면, 우리가 소위 대단하다고 칭송하는 과거의 인물, 유적지, 유물, 이데올로기, 사상, 종교, 이론 등은 아무리 위대하다 해도 결국에는 이미 박제/전시되어 있어 우리가 '직접' 생생하게 상호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는 추상적이고 고정된 대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마르틴 부버의 말을 빌리자면 주체와 주체가 만나는 '나-너(Ich und Du) 관계'를 맺을 수 없는, '나-그것(Ich und Es) 관계'와 유사하다고도 할 수 있다. 이와 유사한 철학은 이승윤의 다른 노래 <영웅수집가>에서도 잘 나타나는데, 이 노래에서는 살아있는 한 인간을 지나치게 영웅시하여 고정되고 박제된 image로 만들고 이를 실컷 소비하다가 언젠가는 수가 틀려 그 영웅을 내팽개쳐버리는 대중들의 행태를 실랄하게 풍자한다. (뮤직비디오가 또 띵작이다. 2:8 가르마를 한 이승윤이 석고상들을 다 깨부셔버리는 씬이 압권이다.)


그래서 화자는 죽어버린 것들을 칭송하고 선망하는데 시간을 쓰기보다는, 살아 있을 때 자신이 사랑하는 주변 사람들을 만나 직접 이름을 불러보는 데 시간을 쓰고 싶어한다. 이름을 부른다는 행위는 그 대상의 존재를 알아봐주는 가장 적극적이고 확실한 행동이다. 김춘수는 <꽃>이란 시에서 이러한 존재의 본질을 간결하게 그려낸다.


김춘수 <꽃>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우리는 어떤 대상을 '관계 내에서만' 지각하고 인지할 수 있다. 태양이 노랗게 보이는 것은 인간의 눈이라는 특수하고 한정된 기관을 통해서만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관계나 맥락을 떠나 그 대상이 자체적으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상대성이론과 포스트모더니즘을 거치며 그 대답은 'No'임이 현재 정설이다. 각자에게 주관적이고 현상학적으로 '지각'된 것만이 '존재'할 뿐이다. 우리는 이름을 부름으로써 그 대상을 비로소 구체적으로 지각하기 시작하고 관계를 맺는다.


이름 얘기가 나왔으니, 갑자기 좀 생뚱맞지만 아이를 키우는 부모님들에게 당부드린다. 서로를 누구 엄마, 누구 아빠 라고만 부르기보다는, 가끔은 그 사람의 진짜 이름을 불러달라고. 그러면 상대방은 순간 당황하고 또 무슨 수작이냐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낼 수도 있겠지만, 무의식 깊은 곳에서는 누구 엄마, 누구 아빠가 아닌 자기 존재 자체로 인정받았다는 생각에 자존감이 높아지고 집안의 평화 지수가 조금은 올라갈지도 모른다.


"

위대한 공식이 길게 늘어서 있는

거대한 시공에

짧은 문장을 새겨 보곤 해

너와 나 또 몇몇의 이름

두어 가지 마음까지


영원히 노를 저을 순 없지만

몇 분짜리 노랠 지을 수 있어서

수만 광년의 일렁임을 거두어

지금을 네게 들려 줄거야

달이 참 예쁘다고

"


광대하고 영원한 우주의 시간 속에서 한낱 먼지같이 작고 찰나의 순간을 살아가는 개인들. 역설적으로, 그렇게 한정된 시공간을 함께 하는 이들이기에 서로에게 더욱 소중한 존재가 되어줄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인연이란 참 가볍고도 무겁다. 우연으로 맺어져 필연이라 믿고 지내다가 결국에는 각자 우주의 먼지로 으스러질 존재들. 이 노래도 찰나에 불과한 한낱 몇분짜리에 불과하겠지만, 화자에게 이것 하나만은 확실하다. 마침 보고 있는 달이 참 예쁘다는 것. 그래서 그 예쁜 걸 기꺼이 예쁘다고 말한다. 화자는 그 순간 그 공간에 '현존'한다. 화자에게는 지금 여기서 느끼는 게 가장 중요하고 전부다.


"

숨고 싶을 땐 다락이 되어 줄 거야

죽고 싶을 땐 나락이 되어 줄 거야

울고 싶은 만큼 허송세월 해 줄 거야

진심이 버거울 땐

우리 가면무도회를 열자


달 위에다 발자국을 남기고 싶진 않아

단지 너와 발맞추어 걷고 싶었어

닻이 닿지 않는 바다의 바닥이라도


영원히 노를 저을 순 없지만

몇 분짜리 노랠 지을 수 있어서

수만 광년의 일렁임을 거두어

지금을 네게 들려 줄거야

달이 참 예쁘다고

"


2절은 소위 라임(Rhyme)의 기술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데, 처음엔 좀 어색하게 들릴 수 있지만 반복해서 듣다 보면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은유하면서도 라임을 절묘하게 잘 맞춰놓은 듯하다. 1절에서 '나는 현존하며 살래'라고 했다면, 2절에서는 '내가 현존함으로써 너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이런 것들이야'라고 노랫말을 이어가는 화자.


개인적으로 가장 감명 깊었던 대목은 '진심이 버거울 땐 우리 가면무도회를 열자'였다. ('숨고 싶을 땐 다락이 되는' 것 까지는 좋았는데, '죽고 싶을 때 나락이 되어준다'고? 이건 좀 너무 radical하다 싶었다. 영화 <죽여주는 여자>가 생각나는 대사였다.) 개인적으로 이 가사를 이렇게 해석했다. '때로는 솔직해지기 어렵고 수치스러워 차마 드러내지 못하는 마음이 있어도 괜찮아, 그런 너라도 괜찮고 나는 환영해.' 이보다 따스한 위로가 있을까 싶었다. 네가 솔직해지기 어려울 때도 나는 너를 있는 그대로 환대할게. 뭐 어때, 그럴 땐 가면 쓰고서 같이 놀면 되지!


그 다음 대목에서는 라임이 절정에 달한다. '달위-단지-닻이-닿지', '바다-바닥'. 달 위에 발자국을 남기고 유명해진 닐 암스트롱 처럼 되기 보다는, 한 줄기 빛도 닿지 않는 심해 바닥이라도 속도를 맞추어 너와 나란히 걷는 걸 택하겠다는 화자. 장기하와 얼굴들의 <나란히 나란히>의 화자가 이 노래를 진즉에 들었었더라면 좋았을텐데.


글을 마치며, 나에게는 과연 오늘 하루 '현존'했던 순간이 있나 되돌아봤다. 아 그거 결국 이미 지나간 과거를 되불러 오는 거구나. 지금은 글 하나를 또 써내니까 그저 뿌듯하고 좋다. 오늘 밤 하늘엔 초승달이 참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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