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마음놓고 애도할 권리
"
친구들은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축 처진 어깨를 하고
교실에 있을까
따뜻한 집으로
나 대신 돌아가줘
돌아가는 길에
하늘만 한 번 봐줘
손 흔드는 내가 보이니
웃고 있는 내가 보이니
나는 영원의 날개를 달고
노란 나비가 되었어
다시 봄이 오기 전
약속 하나만 해주겠니
친구야,
무너지지 말고
살아내 주렴
꽃들이 피던 날
난 지고 있었지만
꽃은 지고 사라져도
나는 아직 있어
손 흔드는 내가 보이니
웃고 있는 내가 보이니
나는 영원의 날개를 달고
노란 나비가 되었어
다시 봄이 오기 전
약속 하나만 해주겠니
친구야,
무너지지 말고
살아내 주렴
"
루시드폴의 앨범은 나올 때마다 무조건 사고 듣는 편이었다. 이 노래도 처음에는 잔잔한 멜로디가 좋아서 가사를 제대로 인지하지 않은 채 들었었다. 세월호 관련 뉴스를 전하던 JTBC 클로징에서 배경음악으로 나오기 전까진.
세월호 참사로 유명을 달리한 단원고 학생들이 살아남은 친구들에게 전하는 말. (혹은 전할 거라고 상상한 말들) 518민주화운동을 다룬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의 플롯과 유사하다. 그렇게 가사를 인지하며 듣고 보니 어깨가 들썩거리게 슬펐다. 몇번이고 들을 때마다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공원에서, 울었던 기억이 난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이야기냐는 직접적인 질문에 루시드폴은 듣는 사람의 몫이라며 확답을 피했다. 듣는 사람의 몫을 남겨두는, 배려 깊은 태도였다고 생각한다. 애도는 강요될 수도 금지될 수도 없는 각자의 몫이라는 듯이.
남은 학생들은 일 순간에 수십명의 친구를 잃었다. 같은 배에 탔다가 구조된 사람들은 살아남았다는 안도를 느낄 새도 없이 '내가 죽을 수도 있었는데'라는 가정, '친구를 구하지는 못하고 이기적으로 나만 살아남았다'는 생각과 함께 죄책감에 시달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 친구들에게 망자가 '따뜻한 집으로 나 대신 돌아가' 달라고 하고 '가는 길에 하늘 한 번 봐 달라'고 한다. 이제는 집에 돌아갈 수 없고 하늘을 쳐다볼 수 없는 이들이. 죄책감과 심한 경우 무기력감, 자살사고를 경험하고 있을 남은 이들을 위해 '무너지지 말고 부디 살아내달라'고 한다.
아직, 있다. 제목을 왜 이렇게 붙였을까. 대상이 사라진다고 해서 그 사람과의 관계가 일 순간에 끝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사람과의 관계가 다른 국면으로 접어드는 거라고 볼 수 있다. 내가 그 사람에 대해 갖고 있는 기억, 감정 등이 복합된 상(像)이 있기 때문에 사람은 일순간에 알던 사람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무 자르듯 끝낼 수가 없다. 고인은 어떤 의미에서 내 안에서 여전히 살아있고 '다른' 관계를 이어갈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제목을 지은 것은 아닐까.
애도라는 과정은 떠난 자들을 위함도 있겠지만 남은 자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고인이 된 사람과 관계를 재정립해 나가는 자연스럽고 또 필요한 과정인 것이다. 그런데 때때로 그 애도할 권리가 박탈되는 장면을 목도할 때마다 안타깝다.
얼마 전 대구지하철 참사 20주년 추모회에 유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근처 상인들이 확성기로 트로트를 틀어놓고 이를 방해했다는 기사를 봤다. 20년이 지나도 애도를 마음 편히 할 수 없구나 싶어 참 씁쓸하고 그 상인들이 참 미웠다.
실은 나도 20년 전인 2003년 2월 18일 바로 그 지하철에 타고 있었다. 갓 스무살이 되어 타지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대구에 도착해 학과 오리엔테이션을 가는 길이었고, 사고가 있었던 중앙로 역을 지나 바로 다음 역인 대구역에서 내릴 계획이었다. 중앙로 역에서 멈춘 열차가 출발하기 위해 자동문이 닫히려다 열리는 현상이 3-4번 반복되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옆 칸에서 '불이야'하는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은 우르르 빠른 걸음으로 내렸고 나도 불이 난 것을 보지는 못했지만 인파에 휩쓸려 덩달아 지상으로 걸어올라왔다. '아이 재수없네'라고 생각하며 택시를 잡아 타고 가는데 지하철 환풍구에서 어마한 검은 연기가 기둥이 되어 솟구치는 걸 봤다. 하지만 그 때까지도 그 참사의 규모나 심각성을 알지 못했다.
오리엔테이션 장소에 도착했을 때, 해당 일정은 그 전날인 2월 17일이었고 2월 18일은 학생회 관련 행사가 예정되어 있었다. 내가 공지를 허투루 봐 날짜를 착각하고 다른 날에 온 것이었다. 허탈한 마음을 안고 그날 발매되는 CD를 사러 다시 중앙로 부근으로 갔는데, 곳곳에 어두운 연기가 자욱하고 하늘에서 재가 눈처럼 천천히 내리던 기억이 난다. 햄버거 가게에서 CD를 들으며 매장 TV에서 나오는 뉴스를 보는데 지하철 역의 구조 현장이 생방송으로 보도되고 있었다. 그제서야 나는 '아, 이게 생각보다 큰 불이구나'라고 알게 되었다.
집에 돌아갔을 때 가족들이 눈물을 글썽이며 나를 와락 껴안았던 기억이 난다. 어안이 벙벙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그런 고민들을 했던 것 같다. "이렇듯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우연들에 의해 삶과 죽음이 갈리는 거라면, 사는 것과 죽는 게 종이 한장 차이라면, 나는 그럼 내게 허락된 시간 동안 어떻게 살아야 할까" 17일과 18일 간의 1일 차이. 중앙로역과 대구역의 1정거장 차이. 자동문이 열리고 닫히는 1초라는 차이. 불이 난 지하철과 반대쪽에서 온 지하철(고인이 되신 분들 대부분이 여기에 있었다)이라는 한끝 차이.
이후로 지하철에 탈 때마다 불쑥 불쑥 그 날의 기억이 떠오르며 불안이 올라왔지만, 그냥 무시하며 참고 지내왔던 것 같다. 그러다 25살에 처음으로 비행기를 탈 때, 불현듯 공황 발작이 찾아왔다. 그 전까지는 아무렇지 않았는데, 비행기 문이 닫히고 지상에서 동체가 움직이기 시작할 때 머리속이 하얘지고 과호흡, 심계항진이 일어났다. 그 밀폐된 공간이 미칠 것처럼 답답하게 느껴졌다. "제발 세워주세요, 저 내리게 해주세요."라고 말하고 싶은 강한 충동이 올라왔다. 옆에서 이미 곤히 잠들어 있는 동행의 모습을 보고서야 차츰 진정이 되었지만, 그 후로도 간헐적으로 공황 발작과 유사한 경험이 나타났다. 대구의 지하철에서 3-4번 닫히다 열렸던 그 문이 순간적으로 내 뇌리를 스쳤을 것이다. 그 때 그 문이 닫히고 열리지 않았더라면.
심리학으로 내 진로를 바꾸고 트라우마에 대해 본격적으로 공부하면서 그제야 내가 그 때 보인 반응들을 이해하게 되었다. 외상 반응은 시간차를 두고 나타나기도 한다는 것을. 나는 직접적으로 외상을 경험한 생존자는 아니었지만, 그 현장에 있었던 것만으로도 다양한 외상 반응을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최근 <저는 삼풍 생존자입니다>라는 책을 읽으며 참 고마웠다. 외상 생존자가 지난 30여년간 경험한 것들을 이토록 솔직하게 써서 책으로 펴낼 용기를 내주신 점에 대해. 이 책이 부디 널리 읽히길 바란다.
이후로도 참사가 벌어지고 관련 보도를 볼 때마다 가장 먼저 드는 기본가정은 '내가 저기에 있었을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남의 죽음은 그저 '남 일'이라기보단, 운이 좋아서 아직까지는 나에게 닥치지 않은 '나의 일'이기도 했다. 주변에서 남일에 왜 그렇게 감정이입을 하냐고 물을 때도 나는 속으로 조용히 읊조렸다. '사람마다 다르게 느낄 수 있는 거고, 그걸 느낄 권리가 각자에게 있다'고.
유족들의 애도를 방해하는 요소들은 지천에 널려 있다. 지지부진한 진상규명, 꼬리자르기식 관련자 처벌, 악플과 같은 제3자들의 조롱과 '이제 그만 할 때가 되지 않았느냐'와 같이 애도에 정해진 기간과 정도가 있다고 믿고 내뱉는 말들. 마음껏 슬퍼할 수 없을 때 애도는 멈추고 유족들의 삶도 그 시간에 멈춘다. 일상의 기능은 무너지고 건강도 악화되어 간다.
그럼에도 나는 다른 한편에서는 애도의 목소리가 연대하는 힘이 강하다는 것을 매번 느꼈다. 용기내어 슬픔을 전하고 연대하며 온기를 전하는 사람들이 애도를 가로막는 사람들 못지 않게 많다는 것을 목도한다. 각자의 속도로 슬퍼하고 애도할 수 있는 권리가 부디 지켜지기를. 상실된 대상들이 그 사람들의 마음 속에 영원히 '아직, 있다'는 것을 기억해주는 사람들이 많아지길. 마음놓고 애도할 수 있는 나라에서 살 수 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