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의 시작
인연이라는 게 뜻대로 될 리 없다.
갑자기 찾아온다.
나에게는 희한하게 시작된 인연으로,
30여 년 간 우정이 이어지는 두 친구가 있다.
그 두 친구 덕분에 더 많은 국적 다른 친구들이 생겼고,
이제는 자식들도 함께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유학을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학교 서점에서 책을 고르고 있었다.
어느 학생이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는 거였다.
여학생도 아니고 남학생이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머리를 하나로 땋은 모양새의 남학생.
잊으려 해도 쉽게 잊지 못할 몰골이었다.
곁눈질을 한참 하더니 나에게 다가왔다.
"Yo man! Can I photo copy your text book?"
방금 산 교과서를 복사하고 싶단다.
이걸 믿어야 하나? 설마 같은 학교인데
책과 함께 사라지지는 않겠지?!
다른 교과서들과 비교해 비싼 책도 아니었다.
23불 정도 하는 책이었다.
왜 책을 안 사냐고 물으니
"I don't have money man!"
말끝마다 man을 붙이는 게 마음에 안 들었지만 돈 없는 유학생끼리,
서로 돕자는 마음으로 책을 빌려 주었다.
알고 보니 같은 클래스를 듣고 있었다.
다음 클래스에 책을 꼭 가져오라는 말을 덧붙이고 헤어졌다.
이 인간이 그다음 시간에 내 책을 안 가지고 왔다.
'아 열 받아!'
정말 미안해하는 표정을 짓고 있어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사실 영어로 어떻게 화를 내야 할지 몰랐다.
책의 복사를 맡겼는데 복사가 안 끝나 못 가져왔단다.
학교 앞 복사점이니 수업이 끝나고 같이 가잔다.
어차피 다른 선택은 없었다.
수업이 끝나고 같이 복사점으로 갔다.
다행히 그때는 책의 복사가 끝나 있었다.
복사본은 바인딩까지 돼 있었다. 책처럼 제법 그럴듯해 보였다.
'책 복사 비용은 얼마나 할까? 나도 앞으로는 복사를 할까?'
복사비를 지불하는 그 아이를 쳐다봤다.
"What 25 dollars?"
책 값이 23불이었는데 복사비가 25불? 이 놈 이거 바보 아니야!
복사점 밖으로 같이 나왔다. 이 녀석도 어처구니없는 표정이다.
아무튼 나에게 미안하니 밥을 사겠단다.
너 돈 없다며?
책 살 돈은 없는데 밥 먹을 돈은 있단다.
이 녀석은 그냥 책이 사기 싫은 애였다.
알고 보니 가정형편이 그리 나쁘지도 않았다.
내가 알던 유학생 중 가장 먼저 차를 산 것도 이 애였다.
나의 홍콩 친구 앤디 렁과 시작된 인연이었다.
일본 친구와의 인연은 화장실에서 시작됐다.
조금 지저분한 이야기가 될 텐데..
새 학기 시작 무렵이었다.
주말에 과음을 하고 월요일 아침 수업에 가는 길이었다.
지하철에서부터 뱃속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팔에서는 닭살이 돋고 얼굴은 마비되고 있었다.
신께 의지하며 겨우 버티다가 내려서는 학교로 냅따 뛰었다.
아무리 급해도 내가 선호하는 화장실로 방향을 잡았다.
2층 복도 끝의 화장실. 규모가 가장 크고 조용하다..
기다란 화장실의 맨 끝쪽 칸은 언제나 불모지 같고 사람의 흔적이 없는 곳이다.
맘 편히 볼 일 보기에 가장 적합한 곳. 장트러블이 잦아 숫한 경험 끝에 찾은 오아시스 같은 곳.
변기에 앉자마자 안도감, 편안함 그리고 아늑함이 밀려왔다.
만족하며 일어날 채비를 하는데
쾅! 화장실 문이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뛰어 들어오는 발자국 소리.
호이 호이 휴 같은 비명인지 추임새인지 뭔지 모를 소리도 들렸다.
난 나갈 타이밍을 못 잡아 엉거주춤 있는데, 역시나 좋지 못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그 많은 칸 중에 그 자가 잡은 자리는 바로 내 옆칸.
다급하게 벨트를 여는 소리가 들리고,
나는 그 자의 원초적 소음을 모두 듣고야 말았다.
필사적으로 숨을 멈췄다.
칸 옆으로는 그 자의 운동화가 내 칸으로 침범까지 했다.
절대로 잊지 못할, 색 바랜 블루 컨버스 운동화.
나는 혹시 신발이 닿기라도 할까?
다리를 오므려가며 뒷수습을 하고 화장실을 뛰쳐나갔다.
교실로 들어 가 차분한 척하며 칠판을 주시하고 있는데 교수가 들어왔다.
그 뒤를 바로 쫓아 들어오는 한 남자. 나는 그자의 신발을 보고야 말았다.
블루 컨버스 운동화.
그리고 그 자는 그 많은 자리 중에 내 옆에 앉았다.
야스오 오노다와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새 책 보다 복사비를 더 지불한 앤디와
아침부터 화장실을 초토화시킨 야스오를
나는 30여 년째 놀려 먹고 있다.
이제는 자식들까지도 아는 유명한 이야기가 됐다.
멍청하고 더럽게 시작된 우정으로
우리는 함께 웃고 울며 젊음을 보냈다.
되지도 않는 영어로 술꼬장을 부리던 때가 그리워져..
마음이 쓸쓸하다.
4년 전쯤 홍콩과 도쿄에서 가족동반 모임을 갖었다.
오랜만에 만나니 없던 식구도 생긴 상황이었다.
서로 말이 안 통하는 아이들이 게임으로 소통하는 모습을 보며
흐뭇해하던 우리의 얼굴이 기억에 남는다.
야스오의 아이들과 내 아이는 손편지를 주고받고 있다.
기념엽서를 보낸 것으로 시작된 글쓰기가 편지로 이어졌다.
길지 않은 글이지만 직접 우체국으로 가 편지를 부친다.
모두 사내아이들인데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아 맞다.. 아빠들의 인연부터가 심상치 않았지..
뉴욕, 홍콩, 도쿄.. 사는 곳이 다르고
국적이 다른 친구들
몰라서 이해 못 하던 시절이 지나고,
서로를 마주하니 우정이 시작됐다.
그 우정은 다음 세대로 이어지리라 믿는다.
그러고 보니 우정은 友情
3개국의 공통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