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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nry Hong Mar 29. 2023

갑자기 선입견?

그랜드 케이먼 여행

아내가 회사에서 여행 보너스를 받았다.

여행 보너스라는 게 회사가 정해준 곳에 가서 편히 쉬다가 오란다.

아니 공산 국가도 아니고 아무리 회사라도 그렇지 자기 멋대로 여행지를 선택하는 거야?

아내의 대답은..

집을 나서면서부터, 여행 경비 일체를 회사가 부담한단다. 그렇다면 닥치고 출발..


여행지는 그랜드 케이먼이었다. 잘 알려지지도 않은

영국령의 조그만 섬이다. 쿠바 바로 밑에 위치해 있다. 다행히 뉴욕은 근래에 논스톱 항공이 생겼다. 3시간 30분 정도의 비행시간이 소요된다.



한국과 비슷한 날씨의 뉴욕에서 겨울옷을 입고 출발해, 야자수가 반기는 공항에 내렸다. 활주로에서 공항으로 걸어 들어 가 간단한 입국 수속을 마쳤다. 별 다른 질문도 없었다. 여권 사진과 내 얼굴을 비교한 게 입국 수속의 전부였다. 짐을 찾아 게이트를 빠져나오니 우리 이름이 써진 팻말을 든 기사분을 만날 수 있었다. 간단한 인사를 마치고 10여분 거리의 호텔로 갔다.



휴양지 특유의 여유로움이 도시 탈주자들을 맞았다. 호텔 곳곳에서 흐르는 스파 음악.

제발 휴식을 취하세요라고 귀를 간지럽힌다.


탈주자들 답게 가방을 풀자마자 해변으로 달려갔다. 마음 급한 건 우리뿐인 듯..

고요 속에 파도 소리만 들렸다. 냉정해지자며 뛰는 가슴을 가라앉혔다.

그제야 주변을 둘러본다. 띄엄띄엄 앉아있는 백인들만이 눈에 띄었다. 그러고 보니 호텔 로비를 거쳐

방에 들렸다가 해변으로 나오는 동안 동양인 손님을 한 명도 못 봤다.

최소한 중국인이라도 마주쳤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해변에 마련해 준 개인용 벤치에 앉아 아내가 선택한 피나 콜라다를 기다렸다.

생크림까지 얹어진 커다란 잔을 받아 든, 다음에야.. 아.. 모히토를 시켰어야 하는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한 발 늦는 순발력. 같은 럼주로 만든 칵테일이라고 위안 삼는다.

1시간 정도를 해변에 앉아있다가 늦은 점심을 먹으러 호텔의 한 식당으로 갔다. 어차피 처음 오는 곳.

가장 가까운 식당으로 들어갔다.

저녁 예약이 돼있어 점심은 간단한 치킨 스낵류와 이곳의 로컬 맥주를 주문했다.

맥주를 길게 들이마시고 난 후에야 주변을 살폈다. 사방에 백인밖에 없었다. 유럽을 가서도 이런 적이 없었고, 이곳에서 멀지 않은 세인트 토마스 섬이나 아루바에서도 이런 일은 없었다. 왜 동양인이 없지? 관광객은 모두 백인이었다. 모두들 영어를 쓰니 불안할 건 없는데 신기한 생각이 들었다.


낮술을 즐기고 방에서 쉬다가 저녁 먹을 때가 되어 예약한 식당으로 갔다. 이곳에서도 동양인을 볼 수 없을까?라는 호기심이 생겼다. 결과는 이곳에도 동양인은 없었다. 동양인뿐만이 아니라 유색 인종이 아예 없었다. 유색 인종은 모두 호텔 종사자들 뿐이었다. 물가는 또 왜 이리 비싸?

점점 더 이 섬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인터넷을 뒤진다.

그랜드 케이먼은 카리브해에 위치한 섬으로, 아름다운 해변과 환상적인 스쿠버 다이빙 지역으로 유명하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금융 중심지이기도 하다.

한국의 성남시 정도의 크기에 1시간 이면 다 둘러볼 수 있는 섬인데.. 금융 중심지?

섬에는 수백 개 이상의 은행과 금융기관이 상주하고 있었다.


인터넷을 좀 더 들여다본다.

케이먼 아일랜드가 왜 금융 중심지인가?

첫째, 그랜드 케이먼은 전 세계 세금 체납자들에게 세금 우회를 가능하게 하는 세제 혜택을 제공합니다. 세금 체납자들이 자산을 숨기기 위해 그랜드 케이먼의 은행 계좌를 이용하게 되면서, 이 지역은 금융거래의 중심지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둘째, 그랜드 케이먼은 안정적인 정치, 경제, 법률 체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환경이 금융기관들에게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환경을 제공하게 되어 금융 기업들이 이곳에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셋째, 그랜드 케이먼은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습니다. 이 지역은 세계적으로 중요한 항로에 위치하고 있으며, 미국과 중남미, 유럽, 아시아와의 무역 거래에 유리한 위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페이퍼 컴퍼니, 탈세 뭐 이런 걸로 우뚝 선 섬?

지상 낙원으로 보이던 곳이 한낱 가면처럼 느껴졌다. 그 가면을 벗기면 어떤 모습일까? 상상하기 싫다.

미국 생활 30년 차인데 선입견이 갑자기 생긴다.

아니 선입견이 공고해진다.

예부터 영화 속 상상하기 힘든 악당은 모두 백인이었다. 좋은 머리를 나쁜 곳에 쓰는 사람들. 사람 좋은 미소뒤에 감춰진 악마의 모습들.

유색 인종을 피해 온 백인들 사이에 주책없이 우리 부부가 끼어 있는 건 아닐까?

놀러 와서는 괜한 비약을 하고 있다. 내가 삐뚤어지긴 했나 보다.

설마 모든 사람이 불법에 연루되어 있기야 하겠어!


갑작스러운 색안경에 나부터 의아했지만 여행자체는 즐거웠다. 아내덕에 호사를 누렸다.

먹을 것이 넘치고 마실 것이 넘치는 여행이었다. 자연스럽게 아내에게 친절해졌다.

3박 4일 일정에 두 번의 뷔페 저녁이 있었다.

랍스터가 고무신을 씹는 것처럼 느껴질 때쯤 여행은 막을 내렸다.


뉴욕행 비행기를 기다리는 게이트 앞에서 동양인 관광객들을 볼 수 있었다.

중국계 미국인들이었다. 미국 여권은 이상하게 눈에 잘 띈다. 여행지에서 한국 사람을 볼 수 없었던 첫 여행이었다.

인절미 콩고물처럼 부드러웠던 모래 해변은 금방 잊어질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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