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치기 청년

블루 뉴욕 1화

by Henry Hong


양치기 소년은, 양치기 청년이 될 수 있었을까?

아무도 그 모르는 곳에서 새로운 인생.. 시작할 수 있었을까?

거짓말을 하며 살기로 했다.

거짓말로 새 인생을 얻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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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JFK 공항에 내렸다. 길게 늘어 선 줄, 긴장 탓에 여행의 피로는 느껴지지 않았다. 무심한 듯 보이는 입국 심사관의 얼굴을 무심히 쳐다보며 입국심사는 끝났다. 입국심사 바깥의 공항은 어수선했다. 가방을 기다리며 불규칙하게 모여있는 사람들. 흘러가는 컨테이너 위 가방을 찾으려고 삐죽거리는 머리들. 알아보기 쉽게 노란색 테이프를 붙인 내 이민가방이 보였다. 빠르게 흐르는 컨테이너에서 가방을 낚아채듯 들어 올렸다. 이십팔 년의 삶을 정리한 무게 치고는 너무 가볍고 보잘것없다. 가방을 끌며 사람들이 향하는 쪽을 쫓아 밖으로 나왔다. 뜻 모를 영어 사이에 간간히 들리는 한국말. 어둠 속 촛불처럼 선명하다. 무엇보다 아들을 마중 나온 어머니의 과장된 의사표현이 또렷이 들린다. 아들은 조용히 한쪽 어깨에 백팩을 둘러메고 두 손으로 두 바퀴 달린 가방을 끌뿐이다. 언제나 아들들은 어머니 앞에서 말이 없다. 말 많은 어미 밑의 자식은 더 말이 없다. 순서를 기다려 택시를 탔다. 말없이 목적지의 주소를 중동인 처럼 보이는 운전사에게 보였다.

아스토리아로 향한다. 늦가을 창밖은 회색빛이었다. 꽉 막혀 있던 도로가 어느 곳인가를 지나니 차에 속도를 더 해준다. 낯 설은 도로의 낯 설은 차들.. 그리고 저 건너 보이는 공동묘지. 마치 예전부터 이곳에 사람이 살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려는 듯 서 있다. 길게 늘어선 묘비들 회색빛의 묘비들.. 도시가 더욱더 회색으로 보인다. 저 멀리 신기루처럼 보이는 맨해튼 전경이 뉴욕임을 알려준다. 내가 뉴욕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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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폰을 끼고 있는 운전사, 알아듣지 못할 언어로 떠들어 댄다. 다행이라는 생각이다.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아서.. 하이웨이를 빠져나와 이 골목 저 골목을 돌아서 차는 서고 나는 내려진다.

순간, 앞으로는 어떠한 경우에도 내려지지 말아야지 하는 다짐을 해본다. 나는 나의 의지로 내려오고 올라갈 것을 다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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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 뉴욕에서 살게 될 나의 집이 보인다. 색 바랜 벽돌색의 5층짜리 아파트. 4F라고 쓰인 초인종을 누른다. 대답이 없다. 다시 누른다. 대답이 없다. 다시 눌러볼까 하다가 아파트 계단 앞에 앉았다. 뉴욕의 공기를 마시고 싶었다. 회색의 공기를 느껴보고 싶었다. 비행기 안에서 짓눌렸던 가슴이 이제야 제 기능을 한다. 그렇게 2시간 13분을 앉아 있은 후에야 아파트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2시간 13분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웃는 것도 아닌 화난 것도 아닌 얼굴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손님을 기다리는 택시 기사 같은 얼굴로.


현관문을 열면 바로 부엌을 마주하게 된다. 내 방은 오른쪽, 룸메이트의 방은

왼쪽이다. 왼쪽이 더 좋은데라는 생각. 예전부터 누군가의 왼쪽이 편했다. 내방의 왼쪽으로 화장실 겸 욕실이 있다. 욕실 문을 열어보았다. 문을 여는 순간 명화가 그려진 욕실 커튼이 보였다. 그림의 제목은 모르겠지만 노래방 어느 벽에 붙어있던 것과 같은 그림. 커튼을 재껴본다. 깨끗하다. 어느 타일에도 물때가 없다. 그러고 보니 변기, 세면대, 거울 모든 게 반짝거려 보일만큼 깔끔하다. 집주인이 깔끔하면 괜히 피곤한데라는 생각을 해본다.

룸메이트가 내 방이 될 방의 문을 손수 열어준다. 친절이 부담스럽게 다가온다.

주인 된 자들의 친절에는 항상 다른 뜻이 있었다.


"이미 사진으로 보셨지만 방 어떠세요? 사실 제 방은 거실을 개조한 거고 이방이 진짜 방 이거든요."


인터넷에 방을 올려놓았던 자. 미국 온 지 5년 정도 됐다고 한다.

미술 공부를 한다나.. 마른 몸매에 검은색 뿔테 안경, 식민지 지식인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공부하러 오신다는 말씀만 들은 거 같은데.. 어떤 공부하시나요?

그자가 묻는다.


"NYU에서 박사과정 밟으러 왔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공부요?" 전공 말입니다.


"영화요"


"아.. 아 영화요."


"예.. 영화요" 더 이상의 질문은 없었다.


나는 나의 방이라는 곳으로 들어왔다. 내가 과잉반응을 보인 걸까? 무슨 공부를 물었는데 박사과정 얘기를 했으니... 싱글 침대에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 같은 다리를 한 책상…. 그리고 비키니 옷장. 그렇게 낯설었던 공간과 사물이 비닐 비키니 옷장을 보며 현실감을 되찾았다.


지금 이 공간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 나의 긴장감을 해소시켜 주었다. 어릴 적에는 비키니 옷장으로 숨어 들어가기도 했었다. 그 작았을 몸을 가만히 웅크리고 내 숨소리에 안도감을 느꼈던 때.

나보다 두 살, 다섯 살이 많은 두 형의 시야에서 사라지기 좋았던 옷장은 나만의 요새였다.

가만히 내 숨소리를 듣고 있다가 스르르 잠에 빠지던 시절.


반쯤 열린 지퍼 사이로 옷걸이가 보인다. 한쪽 방향으로 바르게 매달려 있는 모양새가 눈에 거슬렸다. 짐가방을 책상 옆에 놓고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보일락 말락 구석에 찢긴 듯한 거미줄이 깐죽인다. 거미줄을 눈으로 좇는다. 쫓던 눈길은 금방 길을 잃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길 몇 번 반복하지 못하고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이게 얼마만인가? 수면제 없이 잠이 쏟아진다. 나의 새 삶은 벌써 시작됐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