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의 외출
아들과 한국을 다녀왔다.
곧 대학에 들어갈 아들과 작정을 하고 떠난 여행이었다.
5주 하고도 며칠을 더 한 아빠와 아들의 긴 여행.
솔직히 여행이라고 부르는 것보다 한국에서 한 달 살기가
더 어울릴 법한 한 달여의 시간이었다.
한국의 장마와 무더위를 정통으로 맞긴 했어도 좋은 추억을 만든
기회였다.
비가 오면 실외에서 더우면 실내에 있으면 그만 이었다.
비를 맞아도 좋았고, 숨쉬기조차 힘들었던 더위는 아들과 싸울
기력조차 남기지 않았다.
아들에게는 너그럽기만 했다.
서로의 태도를 탓하며 딱 한번 언쟁을 벌인 것 말고는 별 다른 트러블이 없었다.
나는 아들과 나름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문제는 나와 아빠의 관계였다.
나는 잔소리꾼 아들이 돼 있었다.
오죽하면 아빠가 손주에게 네 아빠는 잔소리가 너무 많다고 하소연을 하셨을까?
뉴욕에서 30여 년을 살았다.
이번처럼 긴 시간 늙어버린 아빠를 살펴볼 기회는 그동안 없었다.
갑자기 늙어 버린 아빠는 당혹감을 주었다.
삐걱거리는 틀니, 엉덩이를 좌우로 흔들어야 걷는 걸음,
필요 이상으로 오래 걸리는 외출 준비.
들고 다니시는 커다란 배낭이 궁금해 안을 들여 다 보니 달랑 우산 하나.
기왕 피난민처럼 보이시려면 모래주머니라도 넣고 다니시지..
목소리는 또 왜 그리 작아지셨는지.. 되물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저에게 보청기가 필요한 게 아니라니까요.
편협한 정치 성향은 둘째 치고,
그중, 최악은 아들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결정 장애였다.
먹을 것, 탈 것, 갈 곳, 살 것..
모든 선택에 애를 먹었다. 잔소리가 이어진 이유였다.
젊었던 아빠에게서는 절대 없는 일이었다.
우리 집 분위기 아빠가 까라면 까는 분위기였다.
아빠와의 시간은 매 번이 고비였다.
하지만 아들은 아빠와 뭔가를 해야 했다.
나날이 늙어가는 아빠를 보고 있자면 조바심이 났다.
훗날에 후회하고 싶지 않은 이기심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해 낸 게 억지 추억 만들기 같은 것들.
다행히 나에게는 치트키 아들이 있었다.
아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니 결정에 문제가 없었다.
아들은 성격도 나보다 훨씬 좋다. 버터 냄새나는 발음이지만 할아버지 비위도 맞춘다.
그렇게 아빠, 나 그리고 아들이 같이 외출을 한다.
성묘를 갔고, 낚시를 갔고,
동묘를 갔고 (그때 알았다. 아빠의 외출복은 그곳 유니폼이었다.)
전쟁기념관, 경복궁, 몇 군데의 쇼핑몰
잔소리가 터질까 봐.. 매번 인내심을 발휘했다.
꾸물꾸물 올라오는 잔소리를 억누르느라 조금 뒤떨어져
그들을 지켜봤다.
아들과 아빠의 뒷모습을 보자니 목이 콱하고 막혀왔다.
옆에 있는 손주를 확인하듯 쳐다보는 아빠의 눈이..
손주를 곁눈질할 때마다 꿀이 떨어진다.
예전에 나를 바라보던 눈이었다.
고개 돌려 제발 건강하시라고 기도한다.
태평양 건너 살다 보니 부모님을 비롯해 가족친지 어른들을 볼 때마다
이번이 마지막이 아닐까?라는 노파심이 든다.
그런데도 나는 할 말 다한다.
뭐 이 딴 게 다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