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
거절받는 것만큼 기분 나쁜 경험도 없다.
더구나 그 거절을 이성에게서 받았다면?
지금 나이에 그럴 일 없지만
왕년에 거절 많이 받아 봤다.
그중 트라우마로 남은 건 없다.
거절을 많이 받은 까닭은 그만큼 열심히 들이댔기 때문이고,
나름 거절하는 사람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나를 거절하는 건 그 사람 문제지.. 내 문제가 아니지 않나?!
어릴 적 친구와 근황 얘기를 나누다가.. 이유는 모르겠고
이야기가 어느 친구의 결혼 생활까지 흘렀다.
"아니 걔는 왜 그런 사람하고 결혼을 해가지고 그 고생 이래?, 연애 기간도 길었다며?.. 그렇게 사람 파악이 안 됐대?"
내가 주제넘은 푸념을 늘어놓는다.
한숨을 내 쉰 친구가 천천히 이야기를 꺼낸다.
"나도 몰랐는데.. 본인 능력을 한정 짓고.. 열등감 때문에 그랬나 봐.. 지금 내가 이 사람을 놓치면 더 나은 사람을 만날 수 없다는 생각."
"거절당한 후에 자기 탓을 너무 했어."
"내 주제에.. 이 보다 나은 사람은 절대 만날 수 없을 거야 같은.. 결론을 내리고 결혼 상대를 구했다는 거야?"
수다에 맛 들인 남자 둘이 이야기를 이어간다.
"아무래도 그 녀석은 실패한 짝사랑의 경험 때문에 그렇게 된 거 같아."
"저 좋다는 여자와 바로 결혼했잖아."
결혼 생활이 힘들다는 친구는 20대 때 결혼을 했다.
연애 경험이 많지 않았지만 내 기억에도 남아있는 거절을 몇 번 당했다.
백 번을 찍어도 나무는 안 넘어갔고 해도 해도 안 됐다.
이 나무가 안 넘어 가 저 나무를 찍었는데 저 나무는 나무꾼에게 총을 쏴 버렸다.
자존감은 너덜너덜 해졌고 열등감을 더하고,
이성과의 만남은 절망에 빠졌다. 그리고 거절에 대한 두려움이 트라우마로 남았다.
다시없을 청춘 이거늘 그림자만 짙은 날들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에게 다가오는 여자가 있었다.
친구는 자신이 좋다는 여자에게 빠져 들었다.
그녀와 결혼을 했고 지금은 결혼 생활이 힘들단다.
갈 곳 없는 친구가 집에 들어가기 싫단다.
지금 와서 누구 탓을 하랴마는 거절당했던 경험 때문에
결혼 상대를 정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은 꼬리를 이었다.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나도 이성에게서 받은 거절 경험이 꽤 있다.
가장 흔한 거절의 이유는..
"우린 친구가 어울려.. 였다."
왜 연인이 안 어울리는지는 아직도 모른다.
꺼지라고 안 했으니 다행이라 여기며 스스로를 위로하는 시간이었다.
며칠 맘 고생하다 다른 상대를 찾아 훌훌 털고 일어나면 될 일이었다.
절망감으로 시간을 낭비하기에 세상은 아름다웠고,
나는 쉽게 사랑에 빠졌다.
또 다른 거절을 당해도 별 일 아니었다.
내가 싫다는 타인의 마음, 어차피 컨트롤할 수 없는 일이라 여겼다. 내 잘못이 아니라 여겼다.
트라우마에 빠질 틈이 없었다.
거절당한 마음의 상처에 자기 탓을 한 것 같은 친구가 불쌍하다. 제 집이 제 집 같지 않을 친구가 그저 안쓰럽다.
늙은 내 친구야 어쩔 수 없다 쳐도
청춘을 살고 있는 젊은이들은 이성에게 거절당하더라도
본인 탓을 안 했으면 하고 바란다.
당신이 싫다는데.. 어차피 달리 할 일도 대책도 없지 않은가!
트라우마는 경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경험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라고 생각한다.
경험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가 지금의 자신을 결정하는 것이다.
다 좋으니 자기 탓은 하지 말라는 말이다.
살면서 거절당할 일 무지 많다. 같이 힘냅시다!
*추신: 나이를 먹어도 소심한 뒤끝 정도는 있을 수 있다.
"그래서 경란이 너 잘 먹고 잘 살고 있냐!!"
위 이름은 실명임을 굳이 밝힙니다.
거절당한 경험이 추억으로 남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