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요커의 뉴욕 적응기

당신을 증명해 보세요!

by Henry Hong

내 인생의 절반 이상을 뉴욕에서 살았지만 적응기가 필요하다.

한국에 다녀오고 나면 적응이 쉽지 않다.

오랜만에 만난 친지, 친구들과의 시간으로 인해

(술은 마시고 보자는 사람들) 건강을 좀 해친 건 둘째 치고,

뉴욕 공항에 내리자마자 내 팽개쳐진 느낌이 드는 건 어쩌란 말인가?


나를 예전부터 알고 있던 사람들과의 시간들.

그들 앞에서는 무장해제가 된다.

조금씩 다른 그들 기억 속의 나.

새롭게 나를 인식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나의 과거를 아는 사람들.

나를 증명할 필요가 없었던 시간들.

생각의 다름을 인정하니 즐겁기만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옛 기억은 선명해지고

얼마 전 기억은 긴가민가 흐릿하다.

여기가 저기 같고 저기가 여기 같고.

서울이 뉴욕 같고 뉴욕이 서울 같고.

얘가 걔 같고 걔가 얘 같고.

내가 나비였던가? 내가 나였던 적은 있었나?

꿈을 깨서 또 다른 꿈을 꾸고 있는 이 느낌.

비행기에서 떨구어지면 드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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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시간 정도의 비행시간을 마치고 비행기에서 내리면

출입국 심사를 마주한다.

'어서 오십시오, 환영합니다.' 같은 건 바라지도 않는다.

입국 심사관의 의심스러운 눈초리.

미국에서 산 지가 30여 년이 넘었지만 미국 시민권 취득을

안 해서 듣는 질문들

"한국에는 얼마나 있었어?"

"뭐 사 왔어?"

그중 가장 기분 나쁜 질문

"돈은 얼마나 갖고 있어?"

남의 주머니 사정 같은 건 왜 물어!

어차피 큰돈이 있었다면 벌써 걸렸을 텐데.

입국 심사를 받으며 뉴욕에 돌아온 걸 실감하게 된다.

나를 증명해야 하는 시간들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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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매번 증명해야 하는 곳

이민자들이 마주해야 하는 삶

삶에 애착이 없다면 버티기 힘든 곳

대충대충이 통하지 않는 삶

나 여기 있어요! 를 쉴 새 없이 외쳐야 하는 곳

쉽게 지쳐 버리는 삶

미국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당신은 영어로 입을 떼는 순간부터 검증을 받게 됩니다.


글쎄 뭐랄까?

순간순간을 살다 보니 얼떨결에 이뤄진 일이 너무 많다.

IMF 때 나를 채용해 준 회사가 하필 뉴욕에 있네.

사랑한 여자 친구가 뉴욕에 사네.

그 여자가 아내가 됐네.

아들이 태어난 곳이 뉴욕이네.

내가 선택한 인생 맞나? 아리송한데,

그 순간순간이 모여 내 인생이 됐으니 할 말도 없다.

그래서? 뉴욕이 싫으면 서울로 돌아가면 되잖아!

문제가 있다면 서울에서 더욱더 긴 적응기가 필요하다는 것.

적응만 하려다 인생 마칠 것 같은 불안감에 몸은 움츠려 든다.


뉴욕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는 만석이었다.

여행을 가는 가족, 연수를 떠나는 어린 학생들, 주재원.

비행기에서의 흥분된 얼굴들, 톤 높은 목소리.

비행기에서 내리며 그들의 흥분은 긴장이 된다.

급격히 사라져 버린 사람들의 웃음기.

입술을 움직여가며 외워뒀던 영어 문장을 점검한다.

막상 입국 심사관을 마주하면 입이 아닌 온몸으로 말한다.

'나는 미국에 살고 싶은 생각 같은 게 아예 없어요!'

'내가 왜 미국에 살고 싶겠어요!'

'아니, 당신 나라에 돈 쓰러 왔다니까!'

굳은 미소에,

들릴 리 없는 마음의 소리는 공허하기만 하다.

무표정의 입국 심사관이 표정으로 묻는다.

'알았으니까 그걸 증명해 보세요!'


늙어 가는 이민자 아빠가 아들에게 얘기한다.

앞으로 너 자신을 증명해야 할 상황을 매 번 마주하게 될 거다.

증명은 한 장의 이력서가 될 수 있고, 체력이 될 수 있고,

사랑이 될 수도 있고, 인종차별에 맞서야 할 때가 될 수도 있다.

이제 시작이니 당연한 이야기지만,

아빠가 부탁하고 싶은 건 가족 앞에서는 너를 증명하려 하지 말아라.

그런 수고는 필요가 없으니까.

너는 존재 자체로 이미 모두에게 증명했으니까.

나의 친구들과 친지들에게서 느낀 마음을 아들에게 전했다.


서울에서 과분한 사랑을 받아서일까?

뉴요커가 뉴욕에서의 적응이 벅차다.

나를 증명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는데도 말이다.

그러게 뉴욕은 왜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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