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년째 장수
아들이 태어 난 2005년.
누굴 닮았는지 잠귀가 무척 밝았던 갓난아기.
가까스로 잠을 재우고도
집안의 공기는 살얼음이 언 듯 불안 불안했다.
조그만 소리에도,
눈을 번쩍 뜨고, 언제 울어 될지 모를 날들이었다.
울음소리도 크다. 이건 또 누굴 닮은 건가?
아빠는 밤 시간이 아쉽기만 했다.
도대체 보고 싶은 영화는 언제 보란 말인가?
볼륨을 최대한 낮춰 듣는데도 한계가 있다.
소곤거리는 액션 영화라니..
이때 생각난 게 무선 헤드폰이었다.
유선으로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었다.
무선 헤드폰은 텔레비전에 아답터를 꽂기만 하면 바로 연결이 됐다.
소곤거리 듯 들리던 영화 속, 욕지거리와 뼈 부러지는 소리를 제대로 만끽하게 됐다.
20년 전의 일이다.
20년이 된 헤드폰이 아직도 제 기능을 발휘하고 있다.
욕도 총소리도 잘 들린다.
몇 년 전 위기가 있었다. 영화 한 편도 볼 수 없을 만큼 충전 시간이 짧아지더니
아예 충전이 안 되는 것이었다.
다른 헤드폰을 알아보게 됐다.
그동안 시장이 바뀌었는지 심플하게 아답터만 연결하는 제품은 몇 개 없었고
그나마 내가 원하는 제품은 가격만 비쌌다.
당연했다. 텔레비전에 블루투스 기능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제는 영화를 보며 조용히 내 시간을 가질 수 없게 된다는 것인가.
헤드폰 때문에 텔레비전을 바꿀 수도 없고,
헤드폰 때문에 큰 집으로 이사 가야겠다고 하니 돈부터 벌어 오라는
와이프가 옆에 있고.. 위기였다.
쓸 만큼 썼다는 자포자기의 마음으로 헤드폰과 작별을 하려 했다.
아답터의 전선을 정리하며,
그동안 잘도 버티었다는 생각을 하는데..
20 년을 사용하며 한 번도 궁금하지 않았던
헤드폰의 구조가 궁금해졌다.
이리저리 헤드폰을 살피다가 귀의 커버 부분을 오픈하게 됐다.
놀랍게도 그 안에는 충전용 건전지가 들어 있었다.
그것도 흔히 볼 수 있는 AA 사이즈였다.
당장 집에 있던 건전지를 넣고 테스트를 해보니
어이없게도 완벽히 작동을 했다.
그다음은 충전용 건전지를 구입해 교체만 하면 될 일이었다.
텔레비전을 살 필요도,
이사를 가려고 돈을 벌 필요도 없는 상황이 돼버렸다.
건전지 2개로 온갖 고민이 사라졌다.
어메이징 헤드폰이다.
헤드폰은 혼자를 위한 물품 아니었나?
헤드폰 줄이 엉키듯 타인과의 일화들이 있다.
헤드폰은 유난히 필요할 때 고장이 났다.
수학여행을 위해 삼고초려만에
사촌에게서 워크맨을 빌려 왔건 만 정작 헤드폰이 고장 나 사용을 못했다.
인생 참 쉽지 않다.
유선 헤드폰만 있을 때니 꼬인 선은 쉽게 고장이 나서 동생 탓을 하고
부주의했던 내 탓을 하고.. 결국 만든 이를 탓하고..
그러다가도 어느 날은 감상에 젖어,
소피 마르소에게 헤드폰 끼어주는 걸 상상하며 혼자 히죽 거리 곤 했다.
(영화 라붐이라고 아시나요?)
사이좋게 친구와 이어폰을 한쪽씩 나눠 듣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돌려받을 때의 찝찝했던 기억.
영화에서 본 건 이런 게 아니었는데.. 소독을 해야 할까?
빌려주지 않은 것까지 따라오네.
어메이징 헤드폰은 20년째 장수하고 있다.
귀 부분이 다 해져 볼품없는 모습으로 오늘 밤도 나와 함께 할 것이다.
이제는 고장이 난다 해도,
절대 버리지 못할 물건이 하나 더 생겼다.
아내는 쓰레기가 하나 더 늘었단다. 이 아줌마는 왜 이럴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