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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뉴욕댁 Oct 14. 2024

나는 뉴욕이 싫다


"뉴욕에 살면 너무 좋겠다, 부러워."

"하하하, 잘 살아야죠.”


모두가 선망하는 꿈의 도시 뉴욕. 그런데 나는 이 뉴욕이 싫다. 지하철 역 코를 찌르는 암모니아 냄새. 지하철 선로를 헤집고 다니는 쥐새끼들. 그렇게 원투펀치를 맞고 겨우 비틀거리며 역을 헤집고 나오면 나를 기다렸다는 듯 역 앞에서 수금을 하는 수많은 홈리스. 그들을 피해 황급히 건너편 빌딩으로 피신하는 내게 인정사정없이 돌진해오는 공허한 눈동자를 한 직장인들. 그들의 어깨빵을 피해 카페로 들어서면 선글라스를 끼고 너 나 할 것 없이 인증샷을 찍어대는 관광객들. 그렇게 뉴욕에선 집을 나선지 30분도 되지 않아 모든 에너지를 다 빼앗겨버리기 일쑤다. 


그래, 다 참을 수 있다 있다 이거야.

그런데 가장 참을 수 없는 게 뭔지 알아?


이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이 화려한 도시 속에서

나는 그저 노바디라는 사실.




"뉴욕에 가면 뭐 할 거야?"

"잘... 모르겠어요 하하하. 그냥 되는대로 열심히 살아야죠."


"방송 일 계속 할꺼야?"

"모르겠어요 하하하하"


결혼할 상대가 없던 사촌 언니가

취업 못한 사촌 동생이 

명절날 밥상머리 앞에서 이런 기분이었을까.


나름대로 한국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있었는데 진짜 미국에 가면 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니, 꼭 뭐를 해야 합니까? 반문하고 싶기도 하고.


생각보다 뉴욕에서의 삶은 무료했다. 모마미술관도 여러 번 가다보니 그 그림이 그 그림이고, 베이글도 먹다 보니 이 베이글이 저 베이글이다. 혹자는 배가 불렀다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제 이곳에서 살아갈 사람의 입장으로서는 결국 사람 사는 곳 다 똑같더이다-라는 말씀.


한 달여간의 관광객 모드가 끝난 이후 주어진 시간 속에서 나는 '나'라는 존재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내가 진짜 하고 싶었던 게 무엇이었을까? 내가 미국에서 잘 살 수 있을까? 생각을 안 해본 게 없다. 음악을 다시는 안 한다고 선언했던 내가 다시 음악대학원을 갈 고민까지 했다면 진짜 말 다한 거다. 반년 간의 시간 동안에는 미국에서 일할 수 있는 신분이 아닌 그저 관광객이었기에 뭘 할 처지도 아니었는데, 그렇게 나는 나를 붙들고 씨름했다.


노바디가 되기 싫었다.


한국에서의 나는 썸바디였는데.

엄마 아빠의 딸로

내 친구의 친구로

나름대로 실력을 인정받는 피디로


나의 아이덴티티가 있었는데.

뉴욕에서는, 제로다.


엄마 아빠도 없고.

친구도 없고.

그저 백수.




하루는 너무 서러웠다. 남편을 따라 이 먼 타국에 오는 건데. 쟤는 하루에도 몇 번씩 싱숭생숭한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너는 어렸을 때부터 이 땅에서 자라와서 나의 감정을 모르겠지. 넌 친구도 있고. 직장도 있고. 갑자기 심술이 났다. 왜 내가 이런 희생을 해야 해.


"넌 나한테 진짜 잘해."

"그게 무슨 말이야 수미야. 우리 서로에게 잘해야지."


맞는 말이다. 근데 이미 뒤틀려버린 나의 심보에 그의 말은 오히려 불쏘시개처럼 내 화를 지폈다. 나의 마음은 불에 올려놓은 곰장어 마냥 더욱 강하고 세차게 뒤틀리기 시작했다.


"아니, 나는 여기에 가족도 없고. 친구도 없고. 너만 보고 여기 왔는데 네가 잘해야지!"


갑자기 날벼락을 맞은 남편. 그런데 그가 누구일쏘냐. 말로는 지지 않는 변호사다. 

당황하지 않고 내게 쐐기를 박는다.


"나도 부모님 한국에 계시고, 친구도 여기 없어. 맨날 하는 거라고는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 컴퓨터 앞에서 일하는 건데. 나도 너랑 똑같은 입장이야. 우리 서로 잘해야지."


딩딩딩-

심판이 올라오고

남편의 손을 들어준다.

나의 1패다.


울그락불그락. 화가 났다. 

뭔가 맞는 말인데. 그저 서러웠다.

나, 어쩌면 위로받고 싶어서 꺼낸 이야기에 맞는 말로 받아치는 남편이 얄미웠다.

그리고 저 말에 맞받아칠 마땅한 말이 없었고.


그래서 왕- 울어버렸다. 한국에 갈 거라 엄포를 놓으면서.

그러자 또 눈 하나 꿈쩍 않고 하는 말,


"이제 여기가 네 집이야. 한국이 너 집이 아니고."


딩딩딩-

K.O. 패다.




그렇게 받아들였다. 나는 이제 그곳에서 평생을 살게 될 것이라는 걸. 그리고 나는 남편과 운명 공동체라는 사실을. 한국에 돌아와 비자를 기다리는 지금도 때때로 미국에 가서 어떻게 살지 고민이 될 때면 시어머님이 내게 해준 말을 곱씹었다. 


나의 타향살이 선배님. 머나먼 타국에서 이십 년이라는 세월을 보낸 후에 이제야 한국에서 자유를 만끽하고 계시는 어머니는 내게 말씀하셨다. 미국에 가면 다 할 수 있다고. 수미가 원하는 어떤 것이든 다 하고 꿈을 펼치라고. 


청바지 두 벌만을 캐리어에 챙긴 채 아버님을 따라 미국에 가신 어머님. 말도 통하지 않는 그곳에서 초등학생인 남편과 형님을 키워내셨다. 어머님은 가끔 직장에서 잘 나가는 친구들을 볼 때면 본인의 삶도 그랬을까 싶지만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가도 본인은 주저 없이 미국으로 향하실 거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그곳은 정말 기회의 땅이라고, 한국에서 이룬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다고 용기를 심어주는 아버님. 게다가 언제나 나를 응원해 주는 남편까지.


그래, 그렇게 좋은 곳이겠지.

그러니까 다들 가고 싶어 하는 거겠지.

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누구에게는 배알 꼴리는 푸념일 뿐일 수도 있다.


나 꽤 용기가 많은 아이였는데,

쪼그라들어있었네.

그래, 그만큼 뉴욕이 대단한 곳이긴 한가보다.

쫄지 말자.


감사합니다, 하나님.

저에게 이런 선물 같은 남편과 시댁을 주셔서.


한국에 돌아와 결혼 준비를 하는 지금 이 시간이 한국에서 보내는 마지막 시간임을 안다. 

나의 모국. 나의 부모. 나의 친구. 내 인생 스토리. 나를 이뤄왔던 모든 걸 뒤로 한 채 시작하는 나의 인생 2막.


나는 뉴욕에서 노바디가 아니다.

땡땡씨의 부인. 이걸로 새롭게 출발하는 거야.

그렇게 한걸음 내디뎌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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