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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르디우스의 매듭 Mar 12. 2020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의 역사

역사란 무엇인가? 어려운 정의다. 유시민 씨가 2018년 6월에 <역사의 역사>라는 책을 썼다. 그러면서 영어 제목을 'History of Writing History'라 붙였단다. 유시민 씨를 네가 기억할지는 모르겠다. 우리 시대에 유명한 진보 논객이면서 작가이며, 한 때는 정치가이기도 했다. 네가 기억한다면 아마도 알쓸신잡이라는 TV 프로그램에 나왔던 것이겠지? 


 앞에 <1984>에서 서사적 관점에서의 역사와 왜 역사를 왜곡하고 싶어 하는지와 미디어의 기록에 대해 말했다면 이번엔 역사가 어떻게 쓰여지는지에 대해 조금 생각해 보자. 이 책은 역사기록의 역사에 관한 책이다. 유시민 씨도 서문에서 '역사의 역사에 관한 르뽀'라고 칭했듯, 역사서 자체보다 Writing History에 대한 얘기다. 

 서구 역사의 창시자라 불리는 헤로도토스의 <역사>와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러나 서문에 충실하자면, 어쩌면 이 책은 역사가가 아닌 역사이론가, 에드워드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1961년)>라는 책부터 시작했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거기에 유시민 씨가 역사책을 쓰지 않고, 역사기록에 관한 책을 쓴 이유가 들어 있다. 에드워드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인용한 내용을 잠깐 보면

"정확성은 역사가의 의무일 뿐 미덕이 아니다. .... 오늘날 모든 저널리스트는 적절한 사실을 선택하고 배열함으로써 효과적으로 여론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사실이 스스로 이야기한다는 주장은 진실이 아니다. 역사가가 이야기할 때만 사실은 말을 한다. 어떤 사실에게 발언권을 주며 서열과 순서를 어떻게 할 것인지 결정하는 게 역사가다. 사실이란 자루와 같아서 안에 무엇인가를 넣어 주지 않으면 일어서지 못한다."

"역사가는 사실의 비천한 노예도 난폭한 지배자도 아니다. 역사가와 사실은 평등한 관계, 주고받는 관계다. 역사가는 끊임없이 해석에 맞추어 사실을 만들어 내며 사실에 맞추어 해석을 만들어 낸다. 어느 쪽도 우위를 가질 수 없다. 이 상호작용은 현재와 과거의 상호 관계도 포함된다. 역사가는 현재의 일부이고 사실은 과거에 속하기 때문이다. ....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나의 첫 번째 대답은,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의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것이다."

 많이 들어 본 얘기지? 특히 역사에 대해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정의는 교양시간에 많이 듣던 얘기다. (물론, 카는 과거의 사실과 현재의 역사가가 처한 환경에서 그치지 않고 진보로서의 역사도 얘기한다.) 앞 글에서 얘기했듯이 미디어는 과거에 
제한된 지면과 방송시간 안에 편집자가 무엇을 선택하여 전달하는 권력을 가졌었다고 말했다. '사실' 중에서 전하고 싶은 것을 선택할 수 있었다고 말이지. 그리고 그것이 권력자의 필요에 의해 결정된다는 무서운 현실과 정작 우리가 상호작용하고 싶은 사실은 실리지 않는 결과에 절망하곤 했다. 그래서 카는 "어떤 사실에게 발언권을 주며 서열과 순서를 어떻게 할 것인지 결정하는 게 역사가다"라고 한 것이다. 사실이 당대의 역사가에 의해 왜곡되거나 삭제되는 걸 피할 수 없는 것이며, 그래서 우리는 다양한 사료들을 비교해 가며 해석을 내린 또 다른 역사학자의 글들을 읽는 것이다. 

 한편으로, 과거에는 부족한 자료들의 간극을 (설마 헤로도토스가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일어난 모든 사실을 다 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 테지?) 신화와 상상으로 메워야 했었다면, 요즘은 지금 이 순간에도 기록되는 수많은 사실들 가운데 무엇을 버릴 것인가가 관건 인지도 모른다. 지금 아빠가 적는 이것도 이 자체가 역사가 될 수는 없지만, 많은 사람들이 SNS를 통해 다양한 의견을 나눴다는 건 먼 미래에는 - 빅브라더스가 등장해서 미디어를 통해 세상을 통제하는 시대가 온다면 - 황당한 역사로 남을 수도 있겠지. 기록이 부족했던 시대에 역사가와 기록이 넘쳐나는 현재의 역사가는 어떤 입장일지 궁금하긴 하다.

 책으로 돌아가서, 유시민 씨는 한편으로, 역사와 관련해서 '서사의 힘'을 군데군데 강조한다. 에필로그는 아예 '서사의 힘'이라 붙여서 썼다. 본인 스스로 이야기꾼이라 생각하는 것을 드러낸 것일 수도 있어. 

"나는 역사를 역사답게 하는 것이 '서사의 힘' 또는 '이야기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역사는 사람과 세상에 대한 이야기다. 사람의 꿈과 욕망, 사람의 의지와 분투, 사람의 관계와 부딪침, 사람이 개인이나 집단으로 겪은 비극과 이룩한 성취, 사람이 세운 권력의 광휘와 어둠, 사람이 만든 문명의 흥망과 충돌과 융합에 관한 이야기다. 변하지 않는 인간의 욕망과 본성, 예측할 수 없는 우연, 사회 제도와 자연환경이 뒤엉켜 빚어낸 과거의 사건들 가운데 당대의 역사가들이 주목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것을 언어로 엮어낸 서사다."

 서구 역사의 시초라 불리는 것은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의 <역사>,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다. 역사가 가지는 서사의 힘은 강력하다. 역사가 이야기와 사실 중에 어디에 무게를 두어야 하는지가 혼재되어 있던 시대였다. 유시민 씨가 인간적으로 찬사를 보내는 역사서는 사마천의 <사기>라 할 수 있다. <본기>에서 사실을 기록하고 <열전>에서 문학적 상상력을 발휘해 독창적인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어 내었을 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 도저히 상상이 안 갈 인내와 열정으로 죽간에 기록한 역사에 대해 찬사를 보낸다.  


 
이븐 할둔이 이슬람 세계에서 최초의 과학을 접목한 인류사 <성찰의 책>을 썼다. 왕조의 흥망성쇠를 얘기하면서 왕권이 백성을 사랑하고 돌보는 것에 있음을 설명하는 것은 조우한 적 없는 중국 문명에서 왕의 의무와 같다. 결국 같은 인류의 보편적 윤리라는 얘기다. 에드워드 H. 카와는 달리 사실만을 기록하는 것이 역사라고 주장한 랑케라는 역사가도 있었다. 마르크스 이야기도 있다. 칼 마르크스는 지금까지의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 명하고 새로운 사회사상을 만들어 낸 사람이다. 마르크스를 역사가라고 하기에는 어색하지만, "마르크스는 사회 변화의 원리에 대해 일찍이 누구도 입에 올리지 않았던 사상과 이론을 펼쳤기 때문에 역사학을 포함한 인문학과 사회과학 전반에 강력한 충격을 주었다. 그가 제시한 사상과 이론은 현실 사회주의 국가의 이데올로기가 되어 20세기 후반 한때 지구 표면의 절반을 지배했으며, 나머지 절반에서도 다양한 분야의 마르크스주의자 집단을 만들어 냈다."는 이유에서 유시민 씨는 한 장을 할애했다.  


 
일제하에서 민족주의 역사학을 만들어 나간 박은식, 신채호, 백남운에 대한 이야기도 잠시 언급된다. 박은식 선생은 '한국통사' 서언에서 "옛사람이 이르기를 나라는 멸할 수 있으나 역사는 멸할 수 없다고 하였다. 나라는 형체이고 역사는 정신이다. 이제 한국의 형체는 허물어졌으나 정신만을 홀로 보존하는 것이 어찌 불가능하겠는가. 이것이 '통사(痛史)'를 짓는 까닭이다. 정신이 보존되어 멸하지 아니하면 형체는 반드시 부활할 때가 있을 것이다."라며 역사철학을 말씀하시니 대한민국인으로서 피가 끓지 않을 수 없는 얘기다.  


 
역사의 단위가 확대되는 순간이 온다. 국가나 지역이 아닌 문명으로 넘어가는 것이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슈팽글러의 <서구의 몰락>을 '어마어마한 독서 이력을 가진 천재만이 쓸 수 있는 최고 수준의 횡설수설'로 평하지만, 그가 서구문명 중심의 자아도취적 역사의식의 문제점을 제기하고 문명으로 지평을 넓혔고, 이를 다시 천재적으로 이해한 토인비가 <역사의 연구>를 통해 문명권을 분류하고 '도전과 응전'의 과정을 통해 발달해 왔음을 설명한다. 지배적 소수자와 내적 프롤레타리아트, 외적 프롤레타리아트 간의 상호작용에 따라 세계 국가, 세계 종교를 만들어 내고 영웅시대를 남긴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래서 군부 독재 시대에 '도전과 응전'이라는 표현이 많이 사용되었단다. 이 과정에서 문명 간의 충돌에 따른 도전의 강도와 내적 응전과 외적 응전의 형태에 따라 문명의 성패가 갈렸던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여기서 나아가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에서는 토인비의 이론을 정치무대로 소환해서 동질적 정체성을 가지는 문명권(역시 가장 중요한 건 종교다) 간의 충돌을 기준으로 냉전시대 이후 국제질서와 분쟁들을 설명했다. 


 역사서에도 과학이 전면에 등장했다. 
칼 세이건이 <코스모스>에서 '햇빛 속에 떠도는 먼지'에 불과한 지구에서 벌어진 학살과 오만에 대해 분노한 이후 인류는 시야를 넓히게 되었다. 역사의 기록도 인간을 생물의 하나로 취급한 인류사로 넘어가게 되는 것이지. 그 선구적 업적으로 재러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를 먼저 소개했다. 다이아몬드는 역사학과 과학이 본질이 다르지 않으며, 다양한 과학적 증거들을 통해 지난 500년 동안 유럽이 전 지구를 유린할 수 있었던 것은 다른 대륙의 사람들보다 뛰어나서가 아니라 "우연히" 그에 유리한 환경에 놓였었기 때문이라 설명한다. 유시민 씨가 과감히 반장으로 정리한 내용을 보면


"각 대륙의 역사가 서로 크게 달라진 것은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타고난 차이가 아닌 환경의 차이 때문이었다. 인간 사회의 궤적에 영향을 주는 환경적 요소 가운데 제일 중요한 것은 네 가지였다. 첫째, 가축이나 작물로 삼을 수 있는 야생 동물들이 대륙마다 다르게 분포했다. 둘째, 확산과 이동의 속도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 대륙마다 달랐다. 유라시아는 주요 축이 동서방향이고 생태적, 지리적 장애물이 비교적 적어 이동이 쉽고 확산이 빨랐다. 셋째, 대륙마다 고립도의 차이가 있었다. 남북아메리카와 호주는 고립도가 높았다. 넷째, 대륙의 면적과 인구가 달랐다. 면적이 넓고 인구가 많으면 잠재적 발명가의 수, 경쟁하는 사회의 수, 도입할 수 있는 혁신의 수도 많다. 이 네 가지 환경 차이는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으며 논쟁의 여지가 없다." 


 특히 마지막 문장에 '논쟁의 여지가 없다'고 못을 박아서 서구인의 인종적 우월감을 뭉개었다는 게 유시민 씨의 설명이다. 마지막을 장식한 책은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와 <호모 데우스>다. 유발 하라리는 아예 '사피엔스'라는 종이 지구를 정복할 수 있었던 과정을 설명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갔는데, 인지혁명과 농업혁명(이게 행복의 증진을 가져온 것은 아니라는 것을 하라리는 책에서 많이 설명했었다.), 그리고 과학혁명을 업고서 이제는 신(데우스)으로 진화하려는 인간을 이야기한다. 책에서 <사피엔스> 내용 중 인용한 그의 경고를 다시 보면


"지구 온난화, 해수면 상승, 광범위한 오염은 지구를 우리 종이 살기에 부적합한 공간으로 만들 수 있다. 사람들은 이런 과정을 '자연 파괴'라고 하지만 사실은 파괴가 아니라 변형이다. 자연은 파괴되지 않는다. 6,500만 년 전 소행성이 지구와 충돌해 공룡을 쓸어버렸지만, 그럼으로써 포유류가 번성할 길이 열렸다. 인류는 많은 종을 절멸하고 있으며 자기 자신도 멸종시킬지 모른다. 하지만 들쥐와 바퀴벌레는 전성기를 누리고 있으며 핵무기로 인한 아마겟돈의 폐허에도 살아남을 공산이 크다. 6,500만 년 후에는 지능 높은 쥐들이 인류가 일으킨 대량살상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돌아볼지도 모른다."


 대학생 때 읽었던 그의 책 <거꾸로 읽는 세계사> 이후 모처럼 유시민 씨의 역사서를 읽는 기쁨이 좋았던 책이었다. 다만, 역사학자, 혹은 사람들에 따라서(학문적이든, 정치적인 이유든) 유시민 씨의 역사서 pick에 불만이 있을 수 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 기술에 대한 이해가 역사에 대한 이해를 도와준다는 점은 분명하다. 


 인류 간의 연결고리가 커지고 과학기술의 발달로 사람들의 시선이 우주까지 펼쳐지는 과정에서 역사의 인식 단위가 점점 커지는 것으로 나아갔다. 그럼에도 우리는 
역사의 단위를 여전히 국가나 민족에 뿌리를 두고 있다. 앞서 얘기했듯이, 우리가 일본인들에 일제시대를 사과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현재 살고 있는 일본인들이 그 만행을 저질러서가 아니고, 현재 우리가 그런 치욕을 당해서가 아니다. 서사적 관점에서 정체성을 생각하는 한국인으로서, 우리의 조상들이 당한 아픔을 공감하기 때문이고, 동시에 그 영향이 지금의 삶에도 미치기 때문이며, 일본인들이 누리고 있는 삶 역시 서사적 관점에서 동아시아의 수탈을 통해 누린 것이기 때문에 요구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정체성이다. 그러나 역사를 머릿속에서 지우고 사는 사람들도 있다. 또 역사의 경계를 문명으로 확장하고, 최근의 저서들처럼 그저 인간을 과학과 인류사적 관점에서 살피면서 객관화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지난 역사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는 것이 기이할 수도 있다. 아빠가 아는 일본인들 중에 실제로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어. 그렇지만 그들이 일본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버리고 코스모폴리탄으로 살겠다고 했다면 내가 인정해 주었겠지. 그리고 사실을 사실대로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 정치적인 이유라는 것을 알기에 그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네가 중학교 때부터 역사를 어려워했던 거 안다. 사실 중, 고등학교 때 시험용으로 배우는 역사는 아빠한테도 무척 어렵다. 연대기를 순서대로 외우는 것보다 역사변화의 동인과 결과를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한데 말이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실의 기록으로서의 역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역사가 우리에 주는 교훈이 무엇인가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반면에 기록되지도 못한 역사가 존재하며, 지워진 역사도 분명히 존재한다. 사실의 기록 중 입맛에 맞는 것들만 취사선택하여 그것을 역사라 주장할 수도 있다. 그 과정에서 역사가에 의해 각색되거나 혹은 삭제하고 싶은 사실은 무엇이었을까? 네가 '역사란 무엇인가'하고 물어 온다면(절대 그런 것을 물어본 적이 없지만), 아빠는 현재의 나와 우리 사회를 이해하는 방식이라 말하고 싶다. 큰 줄기로서의 역사를 이해하는 방식이 결국은 우리를 이해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아빠는 앞 글에서 '역사는 현재의 정체성을 정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개인의 미시적 관점에서 역사를 보는 것과 국가나 민족의 단위에서 역사를 이해하는 것, 인류를 한 종의 역사로 보는 것, 그리고 우주의 역사 속에 지구, 그리고 그 안의 인간을 보는 것에 따라 특정 사안에 대한 의견이 달라지고, 크게는 삶과 종교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 정답은 그때마다 다르다. 우리의 정체성도 사안에 따라 다양한 모습일 수 있다. 그게 하나일 필요는 없다. 


 더 중요한 것은 '누가 역사를 쓰는가?'지 않을까? 과거에서 미래의 비전을 캐내고 그것을 해석하는 것은 더 이상 역사학자들의 권리만은 아닐 것이다. 역사가 더 이상 승자들의 기록으로만 남기를 바라지 않는다. 사실의 선택 및 기록이 일부 미디어에 제한되었던 시대는 지나갔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세상 대부분의 말과 행동이 최근 20여 년간 철저히 기록되어 왔다. 역사의 기록은 이제 언론 미디어에만 있지 않고 블로그, 페이스북, 트위터, 유튜브 등 다양한 형태로 분산되어 기록된다. 조지 오웰이 말한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한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는 것의 의미가 여기에 숨어있지 않을까? 네가 서른이 되었을 때 우리는 각자가 말과 글로 정치적 의사를 표현하고, 투표로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것에 좀 더 자유롭고 실제적이기를 바란다. 온라인 전용 사이버 정당도 생겨나 다양한 형태의 정치참여의 길도 열리고 우리의 미래를 우리가 결정하는 역사가 만들어질 날이 오기를 바란다. 그래서 역사가 누구의 것도 아닌 너희들 것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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