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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르디우스의 매듭 Mar 12. 2020

국회의원, 아무나 되면 어때

추첨 민주주의

 아빠가 지금 이 글을 쓰는 시간은 2020년 국회의원 선거를 한 달 조금 넘게 앞두고 있다. 2019년에 선거제도 개혁(?)을 통해서 소수정당에 비례대표 선출 기회를 더 주고자 했는데, 과거 자유한국당(이름이 자주 바뀌었는데, 아빠가 기억하는 이름들은 민정당, 민자당, 신한국당, 새누리당 등등. 다 같은 사람들이다.) 사람들이 보수연합을 만들어 미래통합당이라 명하고 비례대표만을 노리는 소수 위성정당인 비례한국당을 만들었다. 이런 꼼수(자기들 입장에서는 묘수겠지)를 내자 갑자기 선거판이 이상해졌어. 여당은 위성정당이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가짜 정당이라면서 만들지 않겠다고 했었지만, 돌아가는 판을 보니 아무리 생각해도 미래통합당이라는 거대 보수당이 제1당으로 올라설 판국이니, 이에 대응하기 위해 진보진영을 대표하는 위성정당을 만드네 마네 하고 있다. 웃긴 건, 언론들은, 특히 SBS는(아빠가 이 채널을 알람으로 맞춰 놓고 있다 보니) 먼저 꼼수를 부려 민주주의를 유린하는 미래통합당을 비난하기보다, 위성정당을 만들지 않겠다고 했다가 말을 바꿨다는 이유로 진보진영을 비판하기에 여념이 없다. 그래서 미래통합당은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고, 민주당 내부에선 명분을 내세워 부끄러워한다. 아빠는 뭐가 더 나쁜 건지 잘 모르겠다. 제도의 취지를 망친 게 누굴까? 사실, 사람들은 코로나 19 때문에 관심도 없기는 해.  


 아빠처럼 중도진보와 중도보수를 오가는 사람은 늘 선거가 너무 마음에 안 들어. 국회의원들이 우리 일반 시민을 대표하기는 하는 걸까? (우선, 뽑을 만한 사람을 후보로 잘 내지도 않아.) 날치기, 몸싸움, 엘리트주의, 기득권, 예산낭비의 국회에 시민의 아바타를 보내자고 주장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어니스트 칼렌바크와 마이클 필립스가 <추첨 민주주의 (원제: A Citizen Legislature (시민 입법부))>라는 책에서 추첨을 통해서 국회를 구성하자고 한 것이지. 낮은 투표율, 만연한 부정부패, 민의의 왜곡 등 대의 민주주의와 선거의 위기를 무작위 추출이라는 통계 기법을 활용해 전체 국민의 축소판인 의회를 구성하자는 것이다. 너도 통계를 배웠으니 '대수의 법칙'을 기억하지? 대수의 법칙은 경험적 확률과 수학적 확률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인데, 표본의 관측대상의 수가 많으면 통계적 추정의 정밀도가 향상된다는 것을 수학적으로 증명한 것이다. 표본(국회의원 추첨)의 크기가 커짐에 따라 표본에서 계산한 평균값과 모집단(국민)의 실제 평균과의 차이가 매우 작아지는 것을 나타내지. 관행적으로 표본의 크기가 30을 넘어가면 모집단을 대표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300명 정도를 추출하면 평균적인 국민의 표본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혹시 '무작위 추출'이 마음에 걸리니?  


"‘무작위 추출’을 통해 배심원이나 대표를 선택하는 방법이 무작위라는 단어가 연상시키는 것처럼 될 대로 되라는 식은 아니라. 오히려 절묘하게 체계적인 방법이다. 무작위 추출의 정확성은 정교하며 보편적으로 수용되고 있는 수학 이론으로 입증됐다. …… 만일 우리가 수프 맛이 어떤지 알고 싶다면, 먼저 바닥에 달라붙어 있는 것까지 완전히 섞이도록 휘저어야 한다. …… 미국 성인들의 명부를 얻어서 각각 번호를 부여하고, 그 번호를 완전히 섞어버리는 것은 수프를 휘젓는 행동과 유사하다. …… 수프 맛을 얼마나 정확히 아느냐는 솥단지의 크기가 아니라, 얼마나 수프가 완전하게 섞여 있느냐에 달려 있다." 


 여기에는 사실 '모든 국민은 자신들의 수준에 맞는 정치를 정부를 가진다'라는 선거철만 나오는 문구(출처가 토크빌이라는 말이 있지만 아니라는 말도 있다)와도 관련이 있지 않을까? 추첨을 통하면 정말 국민의 수준에 맞는 국회를 우리는 가지게 된다. 대의민주주의의 기본은 말 그대로 국회가 국민을 대의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국민을 모집단으로 하는 무작위 표본집단이 국회의원이 된다면 가장 좋은 방법이지 않을까? 지금의 국회가 대의민주주의를 표방하지만, 선거가 가지는 불평등성을 국민들이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 선거로는 아빠 같은 무당파나 반대표를 던진 국민의 대의는 반영이 될 수 없다. 만약 국회의원 300명을 무작위로 추첨을 통해(물론, 추첨 대상에 강력범죄나 뇌물죄, 사기범들은 제외하고) 국민 집단 구성을 대표한다면 부자, 남성, 그것도 55세 이상의 법률가나 전직 관료들이 아니라, 일단 절반가량은 여성이 될 테고, 지금도 국회의 입법과정에서 무시당하는 20대~30대들의 구성비도 인구 구성비만큼 되겠지. 그렇다면 그들의 목소리가 더 많이 반영되지 않을까? 해병대 전우회도 들어올 테고, 학생, 가정주부, 보험사 직원이나 은행원도 뽑히겠지? 무작위성만 보장한다면 국회의원의 출신 직업도 다양해지고, 현실적인 의견이 더욱 잘 반영되겠지. 선거를 통해 100명가량의 정당 비례대표만 뽑는 것을 병행하면 더 좋다. 각 정당들의 비례대표는 일종의 하원처럼 법 행정 전문가가 되고, 각 정당이 추진하고 싶은 정책이 있다면 국민들의 진짜 대표들을 설득하여 추진하도록 하면 되겠지. 


 많은 사람들이 국민들을 대표해서 일하는 국회의원은 나보다 잘난 사람, 또는 더 배운 사람이 해야 된다는 착각을 한단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정치를 해야 나라가 잘 된다고 생각하겠지. 무지렁이들이 무슨 정치를 하냐 하겠지만 변호사, 검사, 전문 정치인들로 구성된 국회를 우리가 이때까지 가져 봤지 않나. 잘했냐고? 잘하기는 개뿔, 결국은 정권창출만을 앞세우고 정치생명 유지에 더 목숨을 걸더라고. <채근담>에는 "덕은 도량에 따라 커지고, 도량은 식견에 따라 커진다(德隨量進, 量由識長 덕수량진, 량유식장)"라고 실려 있다. 즉, 많이 배워 식견이 넓다는 것은 덕을 쌓았다는 의미다. 그러나 오늘날 불행하게도 많이 배웠다는 것과 선하다는 것은 별개다. 과거 유학의 핵심 경전들이 인격 수양에 있었기에 그것을 많이 배웠다면 도량이 커지고 덕을 쌓았다고 하겠지만, 현대의 지식을 많이 배웠다고 착하고 어진 사람이 되지는 않는다. 한 때 '법꾸라지'라는 단어도 유행했다. 법을 너무 잘 알아서 죄를 짓고도 이리저리 빠져나갔던 어떤 검사 출신 국회의원이자 정치인을 두고 한 말이다. 사실은 많이 배운 놈들이 더하다. 또 일반 국민들이 검사, 변호사, 판사 출신들보다 법은 잘 모를지라도 세상이 어떠해야 한다는 것은 더 잘 알지 않을까? 그들처럼 국민과 동떨어져 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바로 국민이니까. 우리는 통치자는 피통치자보다 뛰어나야 한다는 유교적 관념을 좀 내려놔야 한다. 시대가 바뀌었다.  


 어니스트 칼렌바크와 마이클 필립스는 평범한 시민들로 구성된 시민의회가 정치를 한다면 재선의 압박에서 벗어나게 되고, 공천에 목매 줄 서기를 마다하지 않는 의원들의 추태는 더 이상 볼 수 없고, 기업의 로비와 구린내 나는 정치 자금 스캔들이 사라지고, 허술한 의정 보고서를 대체하는 진지한 정책 논쟁이 자리 잡는 국회를 볼 수도 있을 것이라고 한다. 


"재선의 동기가 없는 의원들은 선거로 선출되는 지금의 의원들처럼 국회 업무를 팽개치고 지역구에서 재선 활동에 전념하지도 않을 것이고, 서민들이 하루빨리 처리되기를 바라는 민생 법안을 계속 미루지도 않을 것이다. 보통 사람들이 볼 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법률 조항이나 지나치게 복잡한 세제 관련 법안들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내용으로 개정될 것이며, 연말에 도매금으로 수백 건씩 처리되는 법안들은 진지한 심의를 위해 처리 건수가 크게 줄어들 것이다. 의회는 전문가 집단의 특권적 공간이 아니라, 전체 국민의 목소리를 반영하는 진정한 민주적 권력체가 되는 것이다."    


 추첨으로 뽑힌 국회의원은 재선에 대한 부담 - 어차피 추첨이고, 다시 추첨에서 당선될 가능성 - 이 없으므로, 의정활동의 절반을 지역구 들락거리느라 소비하지는 않을 것이다. 재선을 염두에 두게 되면 국회의원을 하는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빚을 질 수밖에 없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유사한 고뇌를 토로한 적이 있었지. 지금 문재인 대통령도 - 추측이지만 - 그것 때문에 경제 관련 인재 등용에서 힘들어하는 것 같다. 재선 가능성이 차단되면 지역구 관리하느라 발생하는 경비도 줄고, 말도 안 되는 지역공약을 위한 쪽지 예산(국회 예산 심의에서 자기 지역구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청탁 쪽지를 밀어 넣는 것이지)도 없어지겠지. 아빠는 국회의원들이 지역개발 공약을 내는 것이 제일 불만이었다. 국회의원은 지역의 대표로서 전체 국민을 위한 법을 만들고 정부를 감시하는 일을 하는 것인데, 오직 선거를 목적으로 말도 안 되고, 가능성도 낮은 헛공약을 지역에 남발하며 주민들의 돈에 대한 욕망을 부치기는 것을 볼 때마다 화가 났다(또 거기에 부화뇌동하여 덩달아 춤추는 유권자들도 한심하고). 그리고 지방자치의회에서나 추진할 사업에 대한 예산을 따 내서 지역구를 관리하느라 중요한 정치적 결정을 당 수뇌부가 시키는 대로 결정해버리는 꼴을 볼 때마다 나라의 미래가 걱정되었다. 


 사실 비례대표를 늘리자는 것도 대의를 좀 더 정확하게 전달하자는 취지였고, 오픈프라이머리도 마찬가지다. 2019년 국회가 합의한(우익 보수 빼고) 연동형비례제도 민의를 더 반영하자는 취지다. 그런 취지라면 추첨을 따라올 수 없을 것 같지 않니? 대신 일반인들이 임기를 마치면 원래 자리로 돌아갈 수 있는 제도적 장치도 같이 갖춰야겠지. 개중에 뜻이 있는 사람은 정당으로 진출해도 되고. 추첨 민주주의는 오래된 역사적 사례가 있다. 추첨을 통해 대의체를 운영한 아테네를 비롯해 고대 로마 같은 곳이 그 예다. 비록 민주주의가 노예노동을 바탕으로 유지되는 사회의 선택된 시민들로만 이루어졌다는 한계도 있었지만 말이다.(미래에는 노예 대신에 로봇이 그 자리를 차지할지도 모른다.) 그 외에도 역사상 다양한 형태의 추첨 민주주의가 운용됐으며, 시민 배심이나 공론 조사 등 영미권의 배심제도 그 흔적이라고 한다. 책에서는 특히 2006년 캐나다의 온타리오 주는 추첨으로 만든 시민 총회를 운용해 오늘날 추첨제가 상상이 아니라 현실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줬다고 한다. 


 선거가 민주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대의제도는 민주주의와 상관이 없다. 버나드 마넹은 <선거는 민주적인가>라는 책에서 이렇게 얘기했다. 


"민주정의 기본적인 원칙은 민중이 통치자이자 피통치자라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민이 이 두 위치를 번갈아 가며 차지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민주정의 기본 원칙'인 자유가 취해야 할 두 가지 형태 가운데 하나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자유의 한 형태는 다스리고 또 다스림을 받는 것을 번갈아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민주적 자유는 자신에게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내일이면 자신이 차지할 그 자리에 오늘 앉아 있는 누군가에게 복종하는 것이다." 


 마넹은 대의제의 근간인 선거보다는 시민 스스로 원한다면 동등한 확률로 권력을 지닐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추첨제도가 더 민주적이라고 생각했단다. 선거는 귀족주의적이다. 선거라는 대의제는 형식적인 공직선거 입회의 평등성을 보장하고 있는 척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눈에 띄는 사람, 거액을 들여 선거전을 펼칠 수 있는 사람, 타인에게 탁월함을 인정받아 우월적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공직이 돌아가는 구조다. 선거는 그저 형식적 기회 평등만 표방하지만 실제 입후보하고 선출되는 과정에서 추첨처럼 수학적 동등확률을 제공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선거는 희한하게도 선출된 사람이 선출해준 사람보다 우월한 사람이게끔 한다. 너도 투표권이 생기면 보게 되겠지만 선거 전까지만 선출하는 사람이 우월하다. 끝나면 바로 뒤바뀐다. 그 짜증나는 날이 한 달 정도 밖에 남지 않았네. 젠장. 주위에 아무도 기대하지 않는다. 그들만의 잔치만 남았다. 


 변호사, 기업인, 전직 관료가 아니라 옆집 아줌마, 채식주의자, 유기농 농부, 반려 동물 주인, 성적 소수자, 비정규직, 결혼 이주자, 실업자 등이 진짜 시민을 대표하는 국회를 갖는 것이 잘못된 것일까? 아빠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300명 중에 일부는 어리석은 사람도 있고, 개인적 욕망으로 똘똘 뭉친 사람도 있겠지만, 그런 사람은 소수고 전체 국민 수준에 따른 판단을 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지금처럼 선거를 통해 뽑은들, 피해야 될 사람이 끼어드는 게 더 심하면 심하지 덜하지는 않았단다.


 그러나 불행히도 추첨 민주주의가 도입될 가능성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네가 생각해도 너무 이상적이지? 시민 의회가 시민의 이해를 직접 대변하는 세상은 오기 힘들어. 지금 법을 만드는 사람들이 자기 밥그릇을 내려놓아야 가능한 일인데, 그렇게 하겠니? 그게 직업인데. 그렇다고 그 가능성마저 닫을 필요는 없다. 모든 국민이 원한다면 언제가 올지도 모르지. 그러려면 이런 방법이 있고, 또 실제로 가능함을 많이 알려야 할 거야. 현재로서는 선거를 통한 민의의 반영이 최선이다. 가끔은 썩은 사과들 사이에서 골라야 한다고 하더라도 조금 덜 썩고 앞으로 더 썩지 않을 사과를 골라봐야지. 그것마저 하지 않고 정치를 비판할 수는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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