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오는 쉽다. 사랑은 어렵다.
"증오는 매우 자극적인 감정일 수 있다. 모든 것과 모든 사람들을 친구와 적, 우리와 그들, 선과 악으로 나누면 세상을 훨씬 더 쉽게 이해할 수 있고 훨씬 덜 무서워할 수 있다. 한 집단을 똘똘 뭉치게 하기에 가장 쉬운 방법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어렵다. 요구사항이 많다. 증오는 간단하다."
프레드릭 배크만의 소설 <베어타운>에 나오는 글의 일부다. 가슴 아프지만 사실이다. 사랑은 희생, 배려, 관심 등 많은 것을 요구하지만(그래도 아빠는 널 사랑한다.), 증오는 간단하단다. 욕하면 된다. 그래서 편을 만들고 싶으면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제3의 적을 만들고 증오를 심으면 된다. 많이들 그렇게 해 왔다. 너도 어릴 때 친구랑 친하고 싶을 때 다른 누군가를 같이 흉보면서 편이 되었던 경험이 있을 거야(아빠도 그런 경험이 있다). 그리고 증오는 주목도가 높다.
누가 증오를 부추기는가? 첫 번째는 정치다. 정치인들은 자신의 선명성에 대해 오해받는 것을 싫어한다. 극우를 표방하든지, 선명한 좌익이 되면 인기가 있다. 정치공학에서 대부분을 차지하는 중도층의 소극적인 지지는 의미가 없다. 중도는 결국 마지막에 가서 자기와 그나마 유사한 성향의 후보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중도 보수는 결국 진보를 표방하는 후보보다 보수를 표방하는 후보를 찍고, 중도 진보 역시 보수보다 진보성향의 후보를 선택한다. 그도 아니면 사안에 따라, 혹은 최근의 이슈에 따라 투표를 하는데, 이런 사람들은 선명하든 안 하든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다. 결국 정치인은 내가 보수인지, 진보인지 선명하게 알려 주려고 한다. 그리고 적극적인 지지자들은 자신들이 지지하는 정치인을 적극적으로 따르고 호위한다. 정치인의 이름을 외쳐주고, 손뼉 치고 중간에서 머뭇거리는 유권자들을 끌어 모은다. 극우 세력들은 좌파척결을 외치고, 박근혜 탄핵무효, 문재인 탄핵을 외쳐야 한다. 광화문에서 매주 모여 떠들어야 한다. 그들은 절박하다. 자신들이 스스로에게도 부끄럽기에 더 크게 외친다. 그리고 자신들의 선명성은 결국 진보에 대한 증오를 부추겨서 완성한다. 노조는 사용자와 자본가를 향한 증오를 부추기고, 반통일 친미세력은 북한 괴뢰도당과 중국을 증오하게 만들려고 하고, 진보는 일본을 욕하고 미국에게는 제대로 욕은 못하지만 늘 의심의 눈초리로 지켜보라고 한다.
증오가 넘쳐나면 언론은 좋아한다. 증오 증폭기 역할을 제대로 한다. 그리고 이게 돈이 된다.
과거에 언론은 스스로 정치적 편향성에 따라 거기에 맞는 나쁜 뉴스를 양산했다. 미디어 비평을 업으로 삼는 '미디어 오늘'에서 기자로 일했던 조윤호 씨는 <나쁜 뉴스의 나라>라는 책에서 뉴스의 텍스트를 읽을 때 언론이 유도하는 어젠다 세팅과 그것이 사회적 의제가 되도로 유지하는 프레임에 주의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원인과 결과, 전제조건을 잘 살펴야 한다고 설명한다. 그 텍스트가 콘텍스트(맥락)와 결합하여 생겨나는 효과를 이해해야 한다. 과거 국정원의 대선개입에도 불구하고 '대선불복이냐?'는 프레임에 정서적 콘텍스트와 결합하여 뉴스를 쏟아내는 바람에 당시 더불어민주당은 수비로 대응해야 했었다. 삼성-엘리엇의 싸움에서 '투기자본에 흔들리는 한국'이라는 프레임을 만들어 '엘리엇 = 투기자본'이라는 텍스트가 언론들의 투기자본 먹튀 사례를 쏟아내며 새로운 '국익수호'라는 콘텍스트를 만들어 주는 것도 같은 유형이다.
조윤호 씨는 그 책에서 언론의 물타기 수법도 몇 가지를 소개했다.
물타기 수법 1 '문제를 제기한 놈이 나쁜 놈이다.' : 고대 대자보 '안녕들 하십니까'(지금은 진보를 비난할 때 쓰지만 과거에는 반대였다)와 관련해서 조선일보가 대자보의 필자가 진보신당의 당원이었고, 현재 노동당 당원이라며 '정치권과 연계된 운동권 학생들의 선동'으로 만들어 버리는 식이다. 그 외 경찰의 물대포로 사망한 백남기 씨를 운동권 출신 빨갱이로 만든 것도 유사한 전략이다.
물타기 수법 2 '돈 더 받아 내려고 수작 부리는 거지?' : 사적 이익을 위해 떠드는 걸로 만드는 방법이다. 과거 세월호와 관련하여 특례입학과 보상금을 부각시켜 유가족을 돈 때문에 떼쓰는 사람들로 만드는 식이다. 대한항공의 땅콩회황 사건도 피해자인 사무장이 미국에서 소송을 제기한 것과 관련하여 언론들이 '돈독이 올랐다'라고 표현한다.
물타기 수법 3 '다 똑같은 놈들!' : 정치혐오에 기대는 수법이다. 언론의 기계적 균형(진보 얘기 하나 실으면 보수 얘기 하나 싣는 식으로)을 핑계로 모든 걸 여야 공방, 진보-보수의 싸움으로 만들어 정치혐오를 부추기는 방법이다. 제일 많이 쓴다. 어제도 쓰더라.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취지를 무너뜨리는 위성정당을 가지고 말이지.
물타기 수법 4 '지들끼리 싸우는 걸 보니 뭔가 있구먼!' : 소위 '갈라치기'라고 부르는 것이다. 2014년 위안부 합의와 관련해서 위안부 할머니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연합뉴스는 "유희남 할머니, 정부 하신 대로 따르겠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내서 '의견이 갈린다'로 끌고 갔다. 실제로 '만족하지 못한다'는 할머니 말은 빼버리고 말이지.
영원한 숙제인 '빨갱이 프레임'은 여전히 지독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장인이 좌익이라는 이유로 빨갱이 딱지를 붙였는데, 문재인 대통령에게도 흥남부두에서 남으로 내려온 부친의 전력 때문에 빨갱이로 몰았다. (근데, 네가 서른이 되었을 때도 '빨갱이'라는 단어를 쓸까? 아빠의 소망은 이 단어가 '아주 매운데, 맛있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바뀌었으면 좋겠다. 6.25세대들 다 떠나시면 말이다.) 선거 당시에 보수진영은 대 놓고 거짓말을 하면 쪽팔리니까 SNS를 통해 극우 성향의 어른들에게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되면 나라를 북한에 팔아먹는다고 말하고 다녔다. 당시에 네 할머니가 아빠한테 귓속말로 그렇게 말씀하시더라. 과거 정보당국의 높은 자리 출신이라고 말하는 사람한테서 들었다면서 말씀하시는데, 당신께서도 확신을 하시면서 말씀하셨지.
언론이 증오를 증폭시키고 나쁜 뉴스를 양산하는 것은 결국은 언론산업에 대한 고민이 가장 큰 원인이다. 언론은 회사다. 돈을 벌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의 시장은 광고다. 광고는 그 뉴스를 소비해 줄 독자(시청자)를 필요로 한다. 그들에게 과거의 저널리즘에 기반한 '사회의 공기(公器, air 아니다)'가 되어 줄 것을 요구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아빠가 어릴 때 동네 아주머니들한테 '스카이콩콩'을 줄 테니(아빠 어릴 때 동네 애들 최고의 놀이기구였다. 나중에 이것이 자전거로 변했다가 지금은 없어졌다.) 신문을 받아 보라고 신문보급소 아저씨가 유혹하곤 했었다. 신문보급소는 그렇게 독자를 확보하고 구독료를 받으면서 신문 사이에 지역 상공인들의 광고를 간지(그래, 흔히 말하는 '찌라시')로 넣어 돈을 벌었고, (아빠가 중학생 때 새벽에 신문을 꽤 오랫동안 돌렸기 때문에 잘 알지.) 신문사는 신문지면의 광고로 돈을 벌었다. 미디어 시장이 독과점인 시절에는, 그리고 경제가 급격히 성장하던 시절에는 광고시장은 늘 풍요로운 시장이었다. 대부분 관제언론이나 다를 바 없었지만 일부 튀는 기자들이 정부 정책과 대기업에 대해 비판적인 기사를 싣는다고 해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름 낭만도 있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신문이나 방송사는 제한된 광고 미디어로 인해 생존의 위협을 느낄 일은 없었다. 오히려 정권의 강압에 의해 폐간되는 사건은 있어도 말이다.
사람들은 신문사별로 성향이 보수와 진보로 나뉜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오해다. 오히려 독자의 성향이, 그래서 광고의 기반이 되는 대상이 보수와 진보로 나뉠 뿐이다. 미국에서는 보수와 진보가 4 대 6의 분포로 이루어져 있어서 언론의 성향도 진보성향의 언론이 살짝 많다. 한국이나 일본의 경우 8(이 안에 다시 극우와 중도보수가 3대 5 정도 될 거야) 대 2 정도로 보수편향적이긴 했다 (순전히 아빠 생각이다.). 진보의 시장이 굉장히 열악하긴 하지만, 아빠가 고등학생 때 한겨레신문이 등장했고, 한참 뒤 종편이 생기면서 JTBC가 '삼성마저 깔 수 있는' 손석희 뉴스를 만들었다. 그것은 JTBC가 보수언론의 대명사인 중앙일보 계열사임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진보가 좋아서가 아니라, 진보 청취자 시장이 있는데 아무도 하지 않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대신에 삼성은 건드려도 이건희(이 분 아직 병상에 누워 계신가?)는 '건들이지 못하는 성역'이라는 얘기도 함께 들려왔다.)
그러나 시장이 변했다. 뉴스의 전달 구조가 달라졌다. 그래서 광고시장이 달라졌다. 특히 "유통(네이버, 카카오 같은 포털)"이 장악한 "생산(기사)"문제는 심각한 변화를 가져왔다. 지면으로 보는 뉴스는 끝났고, 모두가 모바일로 이동하면서 뉴스를 읽는 시대에 모바일 포털의 힘이 절대적으로 커졌다. 이를 벗어나기 위한 대안들도 많이 쏟아지고 정치의 힘을 빌어 어떻게 벗어나 보려 했지만 대세는 이미 기울었다. 그래서 언론사들은 클릭수를 늘리기 위해 동일한 내용을 제목만 살짝 바꿔서 기사를 지속적으로 늘리는 '어뷰징'을 해대기 시작했다. 포털에 올라가는 뉴스 타이틀은 더 자극적으로 변했다. 특히 증오를 담은 문장들로 바뀌었다. 또한 동료 기자의 저작권을 무시하고 "~에 따르면"으로 남의 기사를 훔치는 언론사들이 많아졌다. 지면의 배치를 통해서 '뉴스의 가치'를 만들어 내던 언론사들은 이제 '고양이 짤'에도 밀리는 기사들로 충격을 받았다. 자극적이지 않으면 팔리지 않는다.
외국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콘텐츠는 뉴욕타임스가 만들지만 Google에게 검색 및 링크를 허용한 것이 패착이었다. 조회 수 증가와 그에 따른 적은 광고수입에 혹해서 구글이 공짜로 쓸 수 있도록 만드는 바람에 진짜 광고 수익은 구글이 챙겨가고 뉴욕타임스는 부스러기만 남았다. 그러나 그 부스러기도 지키는 게 쉽지 않게 변해갔다. 검색시장의 신(God)인 Google이 공정하길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었다. 구글에 저항하는 이들은 아예 검색에서 배제되게(명목은 검색 알고리즘의 업데이트다.) 만들어 버림으로써 강력한 권력을 가진다. 우리는 구글의 검색 알고리즘에 대해 점검하거나 의문을 제기하지 못한다. 어느 나라든지 이제 신문사들은 좋은 콘텐츠를 생산한들 Google이나 네이버, 카카오 등을 통하지 않고서는 광고시장의 최종 목적지인 사람들에게 닿을 수 없게 되었다. 더 큰 문제는 거기에 겨우 도달했다고 해도 자극적이지 않으면 선택받지 못하게 되었다. 무한경쟁에 놓인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경쟁자로서 개인들이 만들어 내는 블로그, 저명인사의 트위터가 등장하자 이들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니고 있다. 유튜브는 언론사들에게 재앙에 가깝다. '미디어오늘'과 '리서치뷰'가 2019년 10월 27~30일에 전국 성인 남녀 1천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국민의 절반가량이 유튜브를 뉴스 채널로 인식하고 있었다. 진영과 연령대에 상관없이 모두 유튜브를 오락과 재미를 위한 콘텐츠를 넘어 시사 뉴스 채널, 다시 말해 언론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유튜브나 포털 등에서 뉴스와 정보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저널리즘 변화는 가짜 뉴스의 토대를 제공한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언론 불신(이건 언론사가 자초한 것이다)이 넘쳐나는데, 정치가 서로를 적대시하고 감정이 진실보다 앞서도록 부추긴다.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자신이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내용이 시사 유튜브 채널에 있으므로 유튜브를 언론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심지어 확증편향을 우려하는 전문가를 비웃기라도 하듯 응답자들은 유튜브를 ‘공정한’ 언론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우리는 좋은 소식은 뉴스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안다. 특히나 점진적으로 좋아지고 있다는 소식은 절대 보도되지 않는다. 아무도 관심이 없기 때문에 보도되는 법이 없다. 한편으로 나쁜 뉴스가 많이 나오는 이유는 세상이 나빠져서가 아니라, 고통을 감시하는 능력이 좋아져서 일 수도 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비난이 본능임을 알고 있다. 비난 본능은 안 좋은 일이 일어났을 때 단순하고 명확한 이유를 찾고자 하는 본능이다. 이것은 진실을 찾아내는 능력, 사실에 근거해 세상을 이해하는 능력을 방해한다. 비난 대상에 집착하느라 정말 주목해야 할 곳에 주목하지 못하게 한다. 무슨 일이든 잘못되면 '문재앙'때문이라고 하면 그만이다. 그러면서 언론은 눈이 멀었다.
언론사들이 불쌍한가? 그건 흔히 말하는 '연예인 걱정'(아빠 친구들끼리 세상 쓸데없는 걱정을 이렇게 부른다)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여전히 증오를 부추기며 광고시장의 한쪽을 차지하고 있다. 기업들을 겁박해서 광고, 협찬, 각종 명목의 시상을 가장한 삥 뜯기를 여전히 하고 있다. 기사 속에 Fact 외에 정치적 성향에 따라 국민들에게 세뇌하고 싶은 이미지를 끊임없이 실어 보낸다.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고, 그래서 사실 확인 없이 정치적 의도가 담긴 주장들을 출처가 불분명한 '따옴표'에 담아 날린다. 더 많은 클릭을 위해 선정성을 강화하고 인권 따위는 개 밥그릇에 던져 놓고 나선다.
그 와중에도 - 드물지만 - 좋은 기사, 좋은 콘텐츠를 생산하는 훌륭한 기자들도 존재한다. 주로 광고시장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콘텐츠에 대해 뉴스 소비자에게 직접 고료를 받는 언론에서 가끔 찾아볼 수 있다. 다 좋은데 (사실 좋지 않다) 결국은 우리가 언론, 뉴스를 잘 걸러서 봐야 하는 현실이 문제다. 뉴스 소비자인 우리가 현명하게 Fact와 주장을 가려 읽어 내야 된다. 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