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
원래 미디어(Media)란 인간 사회에서 자신의 의사나 감정 또는 객관적 정보를 서로 주고받을 수 있도록 마련된 수단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매스미디어의 등장으로 뉴스와 미디어는 이제 동의어로 변해갔다. 그리고 뉴스 미디어는 단순한 정보를 전달하는 수단이 아니라 사회 전체를 통괄하고 제어하는 기능까지도 떠맡게 되었다. 이에 관한 최고의 고전은 조지 오웰의 <1984> 다. (읽어 봤겠지? 이 책이 분명 집 서재에 꽂혀 있다. 이 소설이 1949년에 쓰였다는 사실이 놀랍고, 지금도 소설 속 사회로 옮겨가기 위한 중간과정 같아서 소름 끼친다.) 소설에 등장하는 빅브라더는 텔레스크린이라는 미디어를 통해 방송으로 계속 세뇌 및 사상통제를 하고 동시에 사람들을 감시한다.
"날마다 그리고 거의 매 순간마다 과거는 현재가 되어 버린다. 이런 식으로 당이 발표한 모든 예언은 문서상으로 옳다고 증명되고, 그때 필요하지 않은 뉴스 항목이나 의견 표출은 기록상으로 절대 남겨지지 않는다. 모든 역사는 필요할 때마다 다시 쓰는 양피지와 같은 것이다."
소설 속의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는 빅브라더 사회에서 보기 드문 별종이다. 그는 자기가 알고 있는 게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고 의심하고, 빅브라더가 거짓말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빅브라더는 그렇게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을 잡아다가 고문한 뒤 실종 처리해왔던 것이지. 소설에서는 그것을 ‘증발됐다’라고 표현한다. 과거에 일어난 사건은 바꿀 수 없다는 건 진실이다. 그러나 윈스턴의 직업은 과거 사건에 대한 기록을 교정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논리적인 모순이 발생한다. 그러나 빅브라더는 그 모순에 의문을 가지는 언행을 엄격히 금하고 있다. 알면서도 모른 척 넘어가라고, 당이 민주주의가 아닌 걸 느끼더라도 민주주의의 수호자라 굳게 믿으라고 ‘이중사고’를 강요받는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당이 말하는 거짓말을 믿는다면 –모든 기록들이 똑같이 되어 있다면- 그렇다면 그 거짓말은 역사로 흘러들어 가 진실이 되는 것이다."
조지 오웰은 책에서 말했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한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 현재 권력을 쥔 자는 역사를 바꾸고 싶어 한단다. 그렇게 해서 미래를 지배하고 싶은 것이지. 2015년 대한민국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좌파 교과서를 바로 잡는다는 명분으로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을 미화하고 싶었나 봐. 일본의 아베 총리는 위안부의 강제성과 국가 개입을 부정하고 싶었고. 그래서 둘이서 눈이 맞았다. 자세한 내용은 기회가 되면 한 번 찾아보렴. 나중에 교과서 국정화는 무산되고,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총리와의 위안부 합의안(일본 정부의 책임은 인정하지 않되, 돈으로 배상은 해 주는)은 다음 정부에 의해서 부정된다. 그 결과 대한민국과 일본의 관계는 악화된다. 정치적 이유로 역사 교과서를 다시 쓰고 싶겠지만, 사실 아빠 세대의 사람들은 근현대 역사를 교과서로 배우지 않았다. 할머니, 할아버지, 엄마, 아빠, 삼촌, 형들을 통해 배웠지. 그리고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는, 언론에 말하지 않는 역사를 대학 동아리방에 모여 스스로 학습해야 했다. 그리고 길에서 대학생들과 시민들이 짱돌을 들고 역사를 만들어야 했다. 아빠가 그 끄트머리 세대다. 안타깝게도 아직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도 있다.
근데, 우리는 왜 이렇게 역사의 해석에 목을 매는 걸까? 지나 간 일인데 말이지. 아마 우리 가슴속에 들어 있는 서사적 인간에 대한 해석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어느 인디언이 법정에서 자기를 소개할 때 자기의 조상들의 이름을 쭉 나열하며 그들의 자손 아무개라고 소개했다는 일화를 영어 문법책에서 본 적이 있다. 네 할머니가 일주일 전에 전화 하셔서 집에 있던 족보들을 종친회 사무실에 넘기겠다고 하시더라. 내가 말렸지만, 막무가내였다. 아빠의 존재의 가장 오래된 서사의 기록이 이제 집에 없게 되는 것이지. 너희 세대는 지금의 너를 이루는 것이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서사적 관점에서 역사가 현재의 너를 만든 것이다는 주장에 동의할 수 있니? 이 허구를 사피엔스는 받아들였다. 지금의 전후세대 일본인에게 우리가 역사왜곡을 하지 말라고 하는 것도, 독일이 아직도 나치의 만행에 대해 사과하는 것도 전후세대인 그들의 책임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지만, 현재의 그들이 누리고 있는 삶과 부는 다 그런 역사가 만들어낸 것이기에 우리 세대는 그렇게 주장하고, 그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했다. 역사는 현재의 정체성을 정의하는 것이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가난한 독립군의 자손들과 달리 사회 고위층이 되거나 재벌이 되거나 일부는 학교재단을 가진 친일파들, 징용으로 끌려갔다 빈털터리로 일본에서 돌아온 아빠의 할아버지와 지게를 지고 나무를 하며 연명했던 아버지와 삼촌, 지리산 아래 마을에서 자라서 각자 빨치산과 경찰이 된, 그러나 한때는 친구였을 그들, 빨치산에 끌려갔다 살아온 외할아버지와 경찰의 양민학살에 희생된 외가댁 먼 친척들, 가난한 무지랭이로 일제에 의해 끌려가서 아직도 오사카나 블라디보스토크 어딘가에 자리 잡고 남은 숨을 할딱 거리며 살고 계신 이름 모를 어르신들, 민주주의를 위해 돌을 들고 싸우며 박종철과 이한열의 죽음을 딛고 서야 했던 많은 사람들, 노동법을 준수하라며 자신을 몸을 불사른 전태일, 고문과 언론통제로 권력을 유지한 이들과 이들에 붙어서 부를 늘린 재벌들, 가진 게 없어 그저 열심히 일하면 잘 될 줄 알았던 아버지들과 그들에게 남겨진 불안한 노후, IMF 경제위기로 거리로 내몰려 이제는 노숙자가 더 편해져 버린 지하철 구석탱이 노인, 어렵게 취직해서 겨우겨우 돈 모아 전셋집 마련했더니 이제는 점점 서울에서 멀리 집을 구하고 출근만 한 시간 반 걸리는 직장인들. 이것들이 다 개인의 관점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남겨진 역사이고, 서사적 인간인 우리와 우리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조각들이다.
그렇기에 역사를 바로 쓰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아름다운 역사만(물론, 권력자 자신에게 아름다운) 기록하고 싶은 건 모든 권력자들의 욕망인지도 모르겠다. 역사책을 분리할까? 일반인들의 역사교과서와 권력자들의 역사교과서? 아직은 서로가 다른 서사의 흐름 속에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근현대사를 다시 쓰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후손들에게 국가에 대한 자긍심을 갖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일본 제국주의의 후예들도 똑같은 이야기를 한다. 부끄러운 과거는 지우고 자랑스러운 역사를 부각하고자 한다. 그들이 역사를 다시 쓰면 그걸 뉴스 미디어가 기록한다. 지금 우리가 만들고 있는 삶, 나중에 역사가 될 삶도 미디어가 기록한다. 과거에 비해 엄청나게 많은 것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신뢰받지 못하는 것 중 하나가 미디어다. 그들에게 역사를 기록한다는 자부심과 공정하게 쓰겠다는 의지를 읽을 수가 없다. 그들이 한 때 뉴 미디어였으나 그 자리를 다른 미디어에 내어주면서 오직 돈을 향해 달려가고 있을 뿐이다. 진영에 따라 권력을 향한 욕망을 드러내며 서로 다른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과거(분명히 지금은 SNS의 발달로 양상이 살짝 달라졌지만,)의 신문이나 방송의 힘을 우리가 무서워한 것은 제한된 지면과 방송시간 안에 편집자가 무엇을 선택하여 전달하는 가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중에서 전하고 싶은 것을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이지. 그게 자주 권력자의 필요에 의해 결정된다는 무서운 현실과 정작 우리가 상호작용하고 싶은 사실은 실리지 않는 결과에 절망하곤 했었다. 하루하루의 기록인 언론이 그러할진대, 역사는 더욱더 말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아빠도 다음 글에서 나올 "어떤 사실에게 발언권을 주며 서열과 순서를 어떻게 할 것인지 결정하는 게 역사가다"는 카의 정의에 동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