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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르디우스의 매듭 Mar 25. 2020

추억의 절반은 맛

그래서 식구다

아빠가 요리 좋아하는 거 알지? 특히 생선요리를 좋아한다. 부산 사람이 생선 비린내를 싫어할 리가 없다. 다만, 아파트 생활하면서 집에 냄새 밴다고 네 엄마가 싫어해서 생선을 잘 안 구워서 그렇지. 게다가 요즘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근본 원인인 통풍의 조짐이 아빠한테도 생길까 봐 엄마가 등 푸른 생선인 고등어나 꽁치는 굽지 않는다. 간혹 아빠가 고등어김치찜이라도 하면 너도 그렇고 네 엄마도 손을 잘 안 대니, 반 이상 아빠 몫이었다. 


2012년 KBS에서 글로벌 대기획 다큐멘터리라고 소개하면서 <슈퍼피쉬>를 방영했었다. 5부작으로 방영했었는데, 제작비도 솔찬히 들어간 작품이라 KBS에서 광고도 열심히 하고, 방영도 여러 번 했었다. 꽤 인상 깊은 다큐멘터리였다. 실제 상도 몇 개 탔었을 거야. 주제는 제목처럼 물고기다. 지구의 70퍼센트는 물로 채워져 있고, 인간은 매년 강과 바다에서 1억 톤 이상의 물고기를 건져 올리고 있다. 그 물고기에 대한 독특한 다큐멘터리였다. 


"인류의 역사는 비린내와 함께 시작했다. 인간은 바람과 햇볕, 연기를 이용해 금방 썩는 물고기를 저장하는 지혜를 발휘했고, 소금에 절인 염장 생선은 그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강렬한 미각의 세계를 열어주었다. 풍요의 시대, 신선한 날생선을 어디에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오늘날에도 수르스트뢰밍, 프라혹, 하칼, 더치 하링 등 냄새나는 저장 생선은 여전히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물고기가 없었다면 인간도 없었을 것이다. 오랜 세월 인류를 구해온 물고기. 그래서 그들의 비린내는 위대하다." 


다큐멘터리의 주제가 생선을 중심으로 한 음식 이야기도 한 꼭지를 차지하고 있지만, 아마 제작자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현생 인류가 생겨난 이래로 지금처럼 바다가 오염된 적이 없었고, 인류의 역사와 같이한 물고기가 사라진 미래에 인간의 생존에 관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생선요리를 좋아하는 아빠한테는 그 과정에 나오는 요리들에 눈이 갈 수밖에 없었다. 


물고기는 쉽게 많은 양을 잡을 수 있다. 하지만 특유의 비린내를 풍기며 쉽게 상한다. 그래서 인류는 이를 저장하기 위한 지혜를 찾아내야 했다. 연기를 이용한 훈제, 소금을 이용한 염장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특히 소금은 인류 최초의 방부제이자 조미료였다. 생선을 소금에 절이면 길게 보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맛도 오히려 좋았다. 전 세계 어디에서도 염장은 보편적인 생선 보관법이었다. 염장하여 말린 생선은 교역의 대상이었고, 심지어 고대 이집트인들의 미라 제작도 썩기 쉬운 장기를 꺼내고 소금 성분으로 시신을 건조한 염장에 다름 아니다. 


아시아의 염장생선에 대해서는 스시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지금 우리가 먹는 스시는 날생선 한 조각과 초대리를 섞은 한 움큼의 밥이다. 그러나 최초의 스시는 생선을 밥과 섞어 발효시킨 것이었다. 쌀의 독특한 성분은 발효에 탁월한 효과가 있으면서 시큼한 초의 맛을 낸다. 실제로 일본어 스시(寿司)의 寿는 시큼하다의 酸っぱい(슷빠이)에서 온 것이다. 쌀농사를 짓는 아시아 어디에서나 쌀과 생선을 결합한 요리가 생겨났다. 오히려 세상의 풍요가 원래의 요리를 변형시켜 지금의 스시가 활어 또는 선어를 얹어 먹도록 변모했다. 아빠가 가끔 마트에서 연어를 사다가 만들어주는 연어초밥은 냉장기술의 발달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당연히 생선은 중요한 식재료였다. 아빠도 부산에 살 때 고갈비(고등어구이) 많이 뜯었다. 육고기가 귀했던 머나 먼 시절에 생선이 아니었다면 조상들의 생존이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당연히 우리 선조들도 염장을 해서 먹었다. 안동의 간고등어처럼 고등어의 보존과 운송을 위해 소금에 절인 것은 애교고, 그 이전에 각종 젓갈류를 만들어 어패류를 보관했다. 생선 젓갈은 물론이오, 그 작디 작은 새우를, 그리고 조개류들까지 염장하는 나라는 우리 외에 못들어 봤다. 그만큼 먹을 게 없었다는 반증이기도 하겠지. 그 젓갈들이 요즘은 육고기를 먹을 때 풍미를 돋우는 역할을 하지? 황선도 씨의 <우리가 사랑한 비린내>란 책에 보니까, 육젓(혹은 멸젓) 이야기가 나오더라. 제법 장사 좀 한다는 제주도 돼지오겹살(삼겹살에 비해 덜 손질하는데 더 비싸다. 이상하지?) 파는 곳을 가면 이 육젓을 내놓는데(여기에 찍어 먹으면 끝내준다), 삭은 멸치젓인 줄 알았는데, 아니더군. 비양도에서 많이 잡힌다는 꽃멸로 만드는데, 꽃멸은 멸치의 일종이 아니라 샛줄멸이라는 생선으로 청어과에 속한다. 그래서 젓갈을 담아도 멸치젓과는 달리 육질이 남아서 육젓이라 부른다. 멸치젓을 내고 육젓이라 우기는 가게들도 있기는 하다. 


유럽의 요리에 대해 사진과 함께 재미난 얘기를 전한 장준우 기자 겸 요리사가 쓴 <카메라와 부엌칼을 든 남자의 유럽 음식 방랑기>에 보면 다양한 소시지가 소개되고 있는데, 특히 신대륙의 발견은 새로운 요리의 지평을 열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경우 15세기경 신대륙에서 고추가 들어와 음식문화를 많이 바꿨는데, 스페인의 고춧가루인 피멘톤은 매운맛을 내는 피칸테, 단맛이 나는 돌세, 산미가 나는 아그리돌세, 훈제 향이 배어 있는 아우마도 등 이름도 다양하다. 푹 익힌 문어에 다양한 피멘톤을 배합해서 넣고 올리브오일과 소금으로 간을 해서 만드는 폴포, 소시지에 피멘톤을 넣어 만든 초리소/쇼리수가 여전히 인기다. 뜨끈한 국물요리가 겨울엔 늘 필요한 법. 스페인 북부 아스투리아스의 파바다(Fabada)는 그 지역 흰 강낭콩인 파베스를 이용하는데, 콤팡고라 불리는 세 가지 재료가 필수라고 한다. 훈제 피망가루를 넣은 건조 발효 소시지인 초리소, 돼지 피를 넣은 순대 모리시야, 그리고 염장한 삼겹살 토시노가 그것이다. 하루 정도 불려서 냄비에 넣고 뭉근하게 끓이면 끝. 순댓국과 비슷하려나? 어느 나라든 귀족들이야 어린 소를 잡을 수 있었겠지만, 서민들은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 늙은 가축을 도축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을 테고, 질긴 고기를 얻어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스튜를 만드는 것이었나 보다. 시칠리의 청국장 마코 디 파베, 이탈리아의 내장탕인 트리파(천엽과 양을 깨끗하게 빨아서 쓴다)도 소개하는데,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어딜 가도 고기가 아닌 부산물은 서민들 몫이었다. 


장준우 씨의 얘기들도 그렇고, <슈퍼피시> 다큐멘터리도 그렇고,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음식의 발달은 결국 재료들을 오래 보관하기 위한 노력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인다. 유목민들이 주기적으로 젖을 짜야 하지만, 보관이 쉽지 않아 유청을 분리해 소금을 가미하여 치즈를 만들어 내고, 포르투갈의 염장 대구가 다양한 요리로 발전했으며, 네덜란드는 심지어 청어를 장기간 보관하기 위해 소금물에 절이는 기빙이라는 통조림의 원형(이걸로 만든 요리가 '더치 하링'이다)을 만들어 부국으로 성장했다. 그러고 보니 정말 인간에게 '소금'이란 엄청난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서 '빛과 소금'을 얘기할 때, 빛은 하나님이요, 소금은 성도로서 희생적 삶과 사회적 사명을 뜻하니, 왜 소금으로 비유한 것인지 알겠다. 등심이나 안심을 구경하기 힘든 가난한 사람들이 동물들의 부산물을 익히거나 염장을 한 후 자연건조를 통해 소시지를 만들어 오래 보관하며 먹었으며, 동남아를 비롯해 세계 여러 나라의 생선들이 염장을 통해 장기 보관이 가능했던 것과 일본의 다꽝도 겨울에 채소를 먹기 위해 쌀겨에 묻어 발전한 것이고, 우리의 김치도 역시 배추를 오래 보관하기 위한 방법에서 나온 요리가 아닐까?


고추(피망도 고추의 일종이다)는 역시 기구한 역사를 가졌으면서도 전 세계에 가장 널리 퍼진 식재료가 아닐까 싶다. 우리나라도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서 고춧가루가 들어오게 되는데, 그때 이후 우리 김치도 붉게 변했다. 반면 일본은 '시치미(七味)'라 부르는 양념가루 외에는 딱히 고춧가루를 쓰지 않는다. 아빠도 일식을 배워봤지만, 일본요리가 재료 본연의 맛을 살린다고 얘기하다 보니 한식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요리를 할게 별로 없더군. 그냥 재료 준비가 전부다. 어쨌거나, 재료 보관이 요리의 시작이었다면, 인간의 요리가 풍부해진 것은 결국 고추나 후추를 비롯한 다양한 향신료로 인한 것이다. 네가 먹는 과자에 뿌려진 향신료 성분을 원산지로 나눠서 보면 남미,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등 세계 각 지역이 다 들어갈 거야. 향신료가 재료의 보관, 특히 항균작용만 한 것은 아니다. 후추에 대한 수요는 결국 신대륙의 발견으로 이어지고 고추가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많이 쓰이게 된 개기가 되었다. 유럽에서의 수많은 요리들은 또 다른 문화권, 특히 아랍과 남미의 영향이 절대적이다. 타 문화권과 다양한 재료의 컬래버레이션이 유럽 요리를 더 풍성하게 만들었단다. 시칠리아는 약 200년, 이베리아 반도는 무려 780년 동안 무슬림의 지배하에 있었던 탓에 유럽에서 이슬람 문화의 흔적이 가장 뚜렷한 지역이다. 모두 요리가 제대로 발달한 지역들이지. 이슬람의 아라비아 상인들이 다양한 향신료 무역을 관장했었다. 대항해시대를 연 것도 이슬람 덕분(?)이었다면 향신료의 발달도 그들 덕분이었다. 이래저래 요리에 관해서는 다양한 의미에서 독특한 역할을 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아랍지역을 제외하고 이슬람교가 코란과 칼로 지배하려 했던 곳은 결국 성공하지 못했지만 향신료 무역을 통해 다녔던 동남아 일부 지역에서는 오히려 자발적으로 이슬람 종교를 받아들이기도 했다. 사실 향신료도 결국 식재료의 장기 보관에 따른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역시 이 또한 재료의 보관법과 관련이 있다고 봐야지. 


인간이 이렇게 식재료를 장기간 보존하려고 한 것은 결국 생존과 이동의 문제에서 출발했다고 봐야 한다. 이것이 사피엔스가 지구를 지배한 원동력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음식의 역사를 중심으로 인류사를 쓴다면 꽤 재미난 역사책이 나오지 않을까?  


우리 대한민국의 음식도 당연히 오랜 전통을 가진 염장 음식도 많고 지금도 명맥을 잘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근대사의 고단함도 녹아들어 독특한 맛으로 변해왔다. 실향민으로서 삶에 대한 투쟁, 일제강점기에 한국으로 넘어와 본국의 공산화로 한국에 눌러앉았다가 온갖 차별을 견뎌야 했던 화교들, 가난한 노동자들의 벗이 되어준 목로주점, 몸이 망가지든 말든 손님한테 한 술 더 주려 찬물에 손이 붓고, 직원과 평생을 함께 가는 의리, 세월을 견딘 건지 그냥 세월이 가 버린 건지 이제 뒤를 이을 사람도 찾기 어려운 가게를 이끌어 온 주인뿐만 아니라 그 주변의 삶들에 대한 애환이 독특한 요리들로 남았다. 박찬일 셰프가 <노포의 장사법>이라는 책을 썼는데, 말 그대로 오래오래 장사하는 비결에 관한 책이다. 아빠가 2000년 서울 을지로에 발령 나서 뻔질나게 드나들던 부민옥부터 시작해서 하동관, 명동돈가스, 저녁에 맥주 한잔 기울이던 을지오비베어, 냉면의 성지로 불리는 을지면옥, 부산에 3년 동안 있으면서 여러 번 시도했으나 먹지 못한 신발원... 등등. 박찬일 셰프는 노포의 비결로 배포와 뚝심, 최고만을 대접하겠다는 신념, 그리고 사명감을 기준으로 가게들을 소개했다. 


"하동관 곰탕이 시민의 사랑을 듬뿍 받은 가게라는 중요한 징표가 있다. 바로 하동관만의 주문법이다. 따로 주문표에 쓰여 있지 않아도 단골들은 알아서 식성대로 주문해서 먹는다. 이를테면 맛배기, 넌둥만둥, 스무 공 스물다섯 공, 깍국, 통닭, 냉수, 뜨겁게, 안 뜨겁게, 밥 따로, 민짜, 내포 빼고, 내포 많이, 기름 많이, 기름 빼고……. 이것 말고도 더 있을지 모르겠다. 반찬도 없는 간단한 곰탕 한 그릇에 이처럼 많은 주문이 가능한 건 세계신기록이다. “손님이 먼저 이런저런 식으로 해달라고 주문해요. 그러면 우리가 고민을 하지. 너무 길면 주문이 복잡하니까 짧게 불러야 할 것 아니우. 그래서 약칭을 만드는 거지. 직원들끼리 암호처럼. 근데 그걸 손님이 다 아는 거야.”" 


그래서 박찬일 셰프는 '추억의 절반은 맛'이라 주장한다. 아빠도 고단한 삶을 살았던 부모님이 어릴 때 사 준 갈비, 어릴 때 친구들과 수다 떨며 먹던 떡볶이, 고등학교 때 구포 강둑에서 담치국물과 함께 몰래 마시던 소주, 대학 시절 자체 휴강으로 땡땡이치고 마시던 막걸리, 데이트할 때 찾아갔던 돈가스집, 네가 한참 어릴 때 데리고 가 먹었던 냉면... 추억은 음식과 함께 하기 마련이다. 집에서 먹던 음식은 부모님과 떨어져 살면서 추억으로 변한다. 마찬가지로 즐겨 찾던 음식점들도 살던 동네를 떠나면 그립다. 어릴 적 뛰어놀던 동네에 즐겨 찾던 맛집이 사라진 것을 볼 때마다 어린 시절의 추억이 사라진 듯한 아쉬움을 가질 수밖에 없다. 아빠한테 하동관이 맛있는 집인 건 분명한데, 그렇다고 크게 환호할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수십 년을 그 집에 다녔던 사람들 입맛에는 그 집 곰탕이 최고의 곰탕이다. 그건 거기에 쌓여 있는 추억을 같이 먹기 때문일 것이다. 박찬일 셰프는 "오래된 가게는 개인의 추억 속에서, 넓게는 한 사회의 문화사 속에서 유물이 되고, 독자적인 ‘의미’를 갖게 된다"고 말한다. 단골과 쌓아온 기묘한 연대감. 이것은 아마 험난하고 질곡 많은 우리 시대가 선물한 노포의 매력이다.  


서설이 길었다. 그래,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 그리고 그 맛은 그 순간에 같이 있었던 사람, 그날의 날씨, 그때 나눴던 이야기들과 함께 추억이 된다. 흔히 가족을 식구(食口)라고 한다. 가족이 한 명 늘면 먹는 입 하나 더 늘었다고 표현했다. 한 집에 함께 살면서 끼니를 같이 하는 사람이 식구다. 회사에서도 식구라는 말을 쓴다. 같이 일해서 밥을 마련하는 사이니까. 친구들 사이에서도 먹을 것을 나눠먹는 사이는 특별한 사이다. 그러나 요즘은 한 집에 같이 살아도 끼니를 같이 하기 힘들구나. 엄마, 아빠가 정성껏 저녁을 차렸을 때 '안 먹을래~' 한마디 하고 네 방으로 들어가면 얼마나 섭섭한지 너는 모를 거야. 반대로 네가 맛있게 먹어주면 엄마 아빠는 행복했다. 이제 고등학생이 되면 같이 밥 먹기 더 힘들겠지? 저녁까지 대부분 밖에서 먹고 들어 올 테니 말이다. 네가 서른이 되었다면 정말 우리가 같이 밥을 먹을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까? 다이어트도 좋고, 음식의 호불호가 갈리는 것도 좋은데, 일단 집에서든 밖에서든 밥을 좀 자주 같이 먹자. 말만 식구 말고 진짜 식구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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