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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르디우스의 매듭 Mar 24. 2020

잡담, 그리고 대화

그리고 떨림과 울림

요즘은 식당에 가면 괜히 아줌마한테 장사 어떠신지 말 걸고, 택시 타면 기사님한테 요즘 돈벌이 어떠신지 말 건네며 지내려고 한다. 이건 아마 아빠 친구 병석이한테 배워서 일 것이다. 대학교 다닐 때 그 친구와 미장원에 같이 가면 그 녀석이 미장원 언니들과 도란도란 얘기 주고받으며 머리 자르는 거 보고 놀랬었다. (물론, 이 친구가 그 당시 키도 크고 잘생겼으니 그랬으리라 짐작은 한다만) 아빠는 미장원 가면 '깔끔하게 잘라 주세요' 한마디 하고 나서 별로 말이 없었다. 여자들의 관심이 부럽기도 했지만, 머리를 자르는데 들이는 시간이 비교가 안된다는 걸 느꼈었지. 물론, 병석이가 좀 까탈스럽긴 했다. 그래도 아빠 머리를 만지는 데 15분 정도 걸렸다면, 그 녀석은 30분 이상의 공을 들여 다듬더구나. 작은 대화들의 위대함이라고나 할까? 장사가 잘되는 동네 미장원도 가만히 보면 고객 응대를 잘하는 미용사 덕에 장사가 잘 된다. 온 동네 아줌마들의 사소한 얘기들을 알고 다양한 잡담으로 고객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덕분인 듯하다. 말 한마디 건네면 많은 것이 달라진다.  


아빠가 채권시장에 있을 때도 재미있는 이야기 몇 개 찾아와서 이것저것 말을 잘 거는 브로커들한테 전화기를 먼저 들게 되는 경우가 많았었던 듯하다. 아빠도 잡담에 그렇게 능한 것은 아니다. 같은 얘기라도 언제나 재미있게 얘기하는 친구들이 부러웠었다. 상사들이나 선배들한테는 물론이고, 고객들한테도 시답잖은 이야기라도 말을 잘 건네는 녀석들이 사랑받는다. 어차피 손해 볼 일 없는 잡담이니까 상대에 대한 관심과 칭찬의 표현이면 더 좋다. 서로 무료한 시간의 공감이면 또 그것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잡담이 우리 인생의 윤활유임에는 틀림없다. 그리고 세상이 심각한 것만으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다. 몇 해 전 유행했던 알쓸신잡도 잡담이지 않나? 한 주제에서 계속 가지를 치고 나가는 형태였지. 다만, 좀 깊이가 다르긴 했다. 그러고 보면 잡담도 참여자들이 아는 게 많으면 더 풍성하고 재미나다. 


사이토 다카시가 <잡담이 능력이다>에서 잡담의 원칙을 얘기한 게 있는데, 우선, 잡담은 알맹이가 없다는 데 의의가 있다. 실제로 의미 없는 얘기 라야 잡담이다. 그리고 계약, 협상, 연락, 보고 등과 같이 의미를 전달하는 것보다 의미 없는 얘기가 우리의 사회생활 대화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리고 잡담의 시작은 '인사 + α'로 이루어진다. 그냥 인사에 덧붙여 건네는 말 한마디로 시작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게 참 우리나라 사람들이 약하긴 하다. 다들 너무 한 곳에 모여 살아서 그런가?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일수록 더 그렇네. 같은 층 사람들 외에는 별로 인사를 잘 안 하고 사는구나. 


그리고 잡담은 결론이 필요 없다. 이건 아주 좋은 장점이다. 물론, 굳이 없는 결론을 만들어 내려는 사람들도 있다. 제발 일하면서 그렇게 하지 꼭 잡담에서 승부 거는 사람도 있긴 하다. 잡담은 잡담이지 토론이 아니다. 굳이 결론 낼 필요가 없어. 잡담의 또 다른 좋은 장점에는 과감하게 대화를 맺어도 된다는 것이다. 어차피 짧은 대화일 경우 자연스럽게 마무리가 될 경우도 있지만, 필요하면 '다음에 또~' 이걸로 충분하다. 깊은 의미를 둔 대화가 아니니 상관없다. 


그리고 잡담은 훈련하면 누구나 능숙해진다고 한다. 이것은 사실이다. 잡담도 버릇이고 연습이다. 잡담을 주고받으며 서로 간도 보고, 친해지는 개기가 되기도 하고, 머리도 식히고 한다. 아빠도 의식적으로 잡담을 건네는 노력을 자주 하는 편이다. 물론, 잡담도 약간의 스킬은 필요하다. 상황을 잘 이해해야 하고, 각 상황에 맞게 가지를 치며 잡담을 늘어놓아야 썰렁한 사람이 되지 않는다. 비즈니스에서의 잡담은 필수다. 아빠도 다른 기관 사람들과 만나면 처음에는 서로 인사와 몇 가지 잡담이 주로 오간다. 그중에 공감대가 형성되는 주제가 있으면 한참을 잡담으로 분위기를 이어가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의 경우 어차피 계약은 첫 만남에서 이루어지는 경우는 없다. 장기전일수록 잡담 활용은 효과적이다. 잡담을 할 때 주의해야 할 것이 하나 있기는 하다. 요즘 흔히 말하는 '안물안궁(안 물어봤고, 안 궁금하다)' 스탠스는 곤란하다. 어차피 궁금할까 봐 한 얘기도 아니다. 잡담의 방향 전환용으로 친한 사람한테만 써야 하는 말이다. 물론, 고수는 이것을 받아서 신조어로 잡담을 이어갈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우리가 잡담만 하고 살 수는 없다. 어떤 사적인 대화든 혹은 무대에서의 강연이든 누군가를 꼭 설득해야 하거나, 납득을 시켜야 하는 순간도 있다. 엄마, 아빠가 항상 너한테 실패하던 것이긴 하다. 중고등학생들은 무엇으로 설득해야 했던 것이니? 

 

다카하시 켄타로의 <지지 않는 대화>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변론술에 의해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고자 한다면, 다음 세 가지가 있어야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것은 1. 말하는 사람(화자)의 인품, 그리고 2. 말하는 내용의 올바름, 마지막은 3. 듣는 사람(청자)의 기분 이렇게 세 가지다. (다른 철학 관련 책에서는 이걸 다르게 표현해서, 말하는 자의 신뢰인 '에토스', 논증인 '로고스', 상대의 상태인 '파토스'라고도 한다.) 물론, 그중에서도 가장 우선인 것은 말하는 자의 인품이자 신뢰다. 그래서 아리스토 텔레스는 말하는 자가 인품 있어 보이기 위해서 필요한 세 가지인 1. 청중에 대한 호의, 2. 덕(德), 3. 프로네시스(Phronesis, '이성적 사유에 의한 실천적 지혜')를 갖추어야 한다고 했다. 엄마와 아빠가 실패한 부분은 주로 세 번째인 네 기분을 이해하지 못해서였다고 생각된다. (네가 늘 그렇게 주장했다.) 사춘기 딸의 기분을 파악하는 것은 쉬우면서도 어려웠다. 


강사가 누구였는지 기억은 나지 않았지만, 커뮤니케이션 스킬과 관련한 회사 내 강의 중에 대한민국에서 자신이 하는 말이 권위를 가지는 방법 세 가지를 들은 기억이 있다. 첫 번째는 1. 지위가 높은 경우다. 당연하다. 사장님 말은 부장이 하는 말보다 더 권위를 가진다. 두 번째는 2. 나이가 많은 경우다. 유교적 권위주의일 수도 있지만, 역시 어르신들이 하는 얘기는 권위가 있다. 아마 그 권위의 근거는 나이를 먹으면서 쌓은 연륜이어야겠지. 마지막은 3. 전문가로 인정받는 경우다. 특정 분야의 전문가로 인정받으면 최소한 그 분야의 일에 관한 한 권위를 가진다. 코로나19 에 관해서 아빠가 하는 이야기보다 의사가 하는 얘기가 더 신뢰가 가는 것이 당연하다. 그래서 일부 국가에서는 의사 가운을 입고 치약광고를 하면 반칙이라고 들었다. 심지어 드라마나 영화에서 의사 역할로 인기를 끈 사람이 의약품을 광고해도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는 경우도 있다. 그만큼 전문가를 내세워 설득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의미의 반증이다. 최근에 지위나 나이보다 전문가의 신뢰가 높아지는 건 다행인데, 반대로 가짜 전문가를 내세우는 경우도 많아 난감하긴 하다.  


잡담이든, 설득이든 아는 것이 많은 것은 좋은 것이다. 다양한 잡학이든 전문 지식이든 도움이 된다. <채근담>에는 "덕은 도량에 따라 커지고, 도량은 식견에 따라 커진다(德隨量進, 量由識長 덕수량진, 량유식장)"라고 실려 있다. 식견이 없는 사람, 즉, 아는 것이 부족하면 도량이 좁고, 도량이 좁은 사람은 덕이 없다는 뜻이다. 덕이 없는 사람은 옳고 그름을 분간하지 못하고, 설사 안다고 해도 일신의 안위와 이익을 우선하기 때문에 결국 바른 길을 가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선을 따르고 허물을 고치려면 우선해야 할 것이 식견을 키우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 식견이란 배움과 경험을 통해 바르게 볼 수 있는 힘을 말한다. 물론, 우리가 흔히 보듯이 지식이 많다고 해서 반드시 올바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배우지 못했다면 사리판단과 분간을 하지 못하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뭘 알아야 잡담을 하고, 뭘 배웠어야 전문가가 된다. 이것이 아빠가 책을 읽는 많은 이유 중에 하나다. 


사람의 말은 영혼의 표현이다. 물리학자 김상욱 교수는 <떨림과 울림>이라는 책 프롤로그에서 아빠의 마음을 울린 글을 썼었다. 물리학자에게 이런 얘기를 들을 줄은 상상도 못 했었다. 


"우주는 떨림이다. 정지한 것들은 모두 떨고 있다. ... 소리는 떨림이다. 우리가 말하는 동안 공기가 떤다. ... 빛은 떨림이다. 빛은 전기장과 자기장이 시공간상에서 진동하는 것이다. ... 인간은 울림이다. 우리는 주변에 존재하는 수많은 떨림에 울림으로 반응한다. ... 우리는 다른 이의 떨림에 울림으로 답하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 나의 울림이 또 다른 떨림이 되어 새로운 울림으로 보답받기를 바란다. 이렇게 인간은 울림이고 떨림이다." 


우리 몸을 이루는 주요 원자들, 이런 것들이 모여 DNA를 만들고, 생명이라는 화학반응의 집합체를 만들어 냈으나 사실은 그 안에 부분의 합을 뛰어넘는 창발의 무언가가 있다. 전기신호를 모았다고 사람이 되지는 않는다.(AI가 발달하면 언젠가 되려나?)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영혼이라 부를지도 모른다. 몸속의 화학반응과 전기신호의 떨림이 '나'를 구성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게 '나'의 전부는 아니다. 다른 이의 떨림뿐만 아니라 내 안의 떨림에 울림으로 답해야 하는 것도 결국 우리의 몫이다. 김상욱 교수가 "우리는 다른 이의 떨림에 울림으로 답하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는 것은 상대가 전하고자 하는 떨림에 내 영혼이 답해야 한다는 것이고, "나의 울림이 또 다른 떨림이 되어 새로운 울림으로 보답받기를 바란다."는 것은 나의 영혼이 상대에게 전하고자 하는 것에 공감받기를 원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은 울림이고 떨림이다. 그것은 우리가 하는 대화 속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작은 잡담이든, 대화든 모든 말은 영혼의 울림과 떨림이다. 아름다운 영혼이고 싶다면 하는 말이 바르고 아름다워야 한다.   


2020년 3월의 어느 봄날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한 젊은 여자가 남자친구와 전화로 통화를 하면서 욕을 해대고 있었다. 코로나 19가 집단감염을 통해 확산하는 것을 막기 위해 경기도지사인 이재명 씨는 학원들을 휴업하게 지도했는데, 이 여자는 이게 짜증 난다면서 욕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렇지 않아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요즘, 학원(무슨 학원인지는 듣지 못했다)에서 스트레스 푸는 게 유일한 낙인데 "이재명이가 왜 지랄이냐"고 큰 소리로 욕을 하는데 마치 그 여자의 사고 수준과 영혼이 어떤지 보이는 것 같았다. 하필 그날 이어폰을 안 챙겨 와서 듣기 싫어도 옆에서 그 욕지거리를 들어야 했다. 모르는 여자가, 그 스트레스가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빠의 즐거운 퇴근길을 망치고 있어서 너무 화가 났었다. 아빠가 무슨 잘못이 있어서 이런 더러운 떨림을 받아야 했을까? 어떤 울림으로도 답할 수 없었다. 그냥 그 여자가 꼴 보기 싫어서 멀찌감치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내 영혼에게 속삭여야 했다. 'Peace~' 넌 제발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다. 말을 예쁘게 하면 좋은 일이 생기고 좋은 사람이 온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그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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