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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르디우스의 매듭 Mar 25. 2020

차 한잔 할까?

다례(茶禮)는 사람을 향한다 

곧 곡우다. 곡우가 되면 농사에 가장 중요한 볍씨를 담근다고 했다. 봄비에 백곡이 잘 자라길 바란다. 아빠는 곡우 때만 되면 늘 차가 생각난단다. 아마 우전차(前茶) 때문이겠지. 대학생 때 '다회(茶會)' 동아리의 멤버였기도 했다. 차를 만들고 차를 나눠 마시던 모임이지. 여학생이 많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가입했으나, 똑같은 생각으로 모인 남자들도 만만치 않게 많았던 모임이었다. '풍다우주(風茶雨酒)'라 하여 바람 부는 날 차를 즐겨 마시고 비 오면 곡차를(술을 곡차라 불렀다. 알다시피 곡식이 발효되면 술이 되잖아.) 마시던 모임이었다. 장마철에 일부 멤버들은 그냥 술독에 빠져 살았다. 입하가 지나면 보성이나 하동에 있는 녹차밭에서 찻잎을 따서 직접 덖어서 1년 마실 차를 만들곤 했었다. 


5월 봄볕의 차 밭에서 옹기종기 모여 차 잎을 따서 바구니에 담고 건조실에 하루 이상 말린 다음 덖는 과정을 거친다. 커다란 전용 가마솥을 300도 이상 달궈서 말린 잎을 넣고 타지 않도록 잘 섞어가며 덖은 다음, 깨끗한 멍석 위에 쏟아 내면 재빠르게 비벼 주무른다. 잎에 작은 상처를 내서 따뜻한 물에 잘 우려지게 하기 위함이다. 이렇게 덖어야 차가 발효 또는 산화되는 것을 지연시킨다. 이런 과정을 아홉 번 거치는 것을 '구증구포'라고 하지만 차는 진짜 아홉 번 덖을 수가 없다. 다 탄다. 차를 따는 시기에 따라 다르지만 세 번, 많아야 네 번 정도다. 덖을 때 넣는 잎의 양, 솥의 열기에 따른 덖는 시간 조절과 재빠른 손놀림이 필요하다. 물론, 뜨거운 솥 앞에 오래 있어야 하는 동시에 뜨거운 솥에 손을 넣고 견딜 인내심도 필요했다. 아빠는 덖는 실력이 없어서 주로 불이나 땠다. 가끔 너무 장작을 많이 넣어 필요 이상으로 뜨겁게 되거나 멍 때리다 온도가 내려가면 혼나곤 했지만, 아빠가 캠핑 가서 모닥불 잘 피우는 것은 이때의 경험도 한몫했을 것이다.  


차 만드는 시기에 따라 분류하는 차 종류에 대해 잠시 설명하자면, 곡우 전에 만든 차를 우전차라 하여 최고로 친다. 가장 어린잎을 가지고 만들기 때문이지. 아주 어린잎을 한장 한장 따서 만들기 때문에 맛이 깊고 부드럽단다. 곡우가 지나고 입하 전까지의 어린잎으로 만든 차를 세작(細雀)이라 부르는데, 작이 참새를 의미한다. 그래서 참새의 혀처럼 작다는 의미다. 과거 태평양(지금은 '아모레퍼시픽'이라 이름이 바뀌고, 설록원 브랜드를 만들었다.)이라는 회사에서 작설(雀舌)차로 명명한 차가 세작이다. 그 회사에서 아예 대 놓고 한자로 '참새 혀'라 붙였던 것이지. 입하가 지나고 음력 5월까지 따는 차를 중작(中雀)이라 불렀다. 녹차밭을 운영하는 다원에서 대학생들의 다회 모임에 차 제작을 그나마 허용해 주는 시기였다. 어린잎 하나(1기)와 어린순(1창)을 같이 따서 만드는 게 좋다. 이 시기를 지나 따는 차를 대작(大雀) 또는 말작(末作)이라 부른다. 가장 잎이 큰 시기라 나무 끝의 마지막 연한 잎만 잘 골라 따야 하지. 개인적으로 세작보다 중작을 좋아한다. 가장 차 맛 다운 맛이랄까. 말작이 가장 저렴하지만 떫은맛이 강해서 주로 갈아서 다양한 재료로 활용한다. 특히, 갈아서 현미녹차 만들 때 많이 쓴다. 그래서 현미녹차가 가장 저렴한 이유기도 하다. 설록(雪綠)은 그냥 태평양의 차 브랜드다. 제주도에서 대규모 차밭을 운용하다 보니 눈이 많은 한라산과 상록수인 녹차밭이 어떤 모습일지 그려지지? 그래서 설록이다. 좋은 이름이야. 

이왕 차 이야기를 시작했으니 아예 그때 들었던 차에 대한 이야기를 몇 가지 더 이야기해야겠구나. 학교 때 선배들한테 들은 차의 기원에는 몇 가지가 있다. 첫 번째 이야기는 달마대사가 주인공이다. 인도의 달마대사는 석가모니 이후 최고의 수도승으로 추앙받았고, 인도에서 중국으로 불교를 전하기 위해 건너가 중국 1대 조사가 되었으며, 소림사를 창건 후 9년간 면벽수도를 했다고 한다. 그 후 인도에서 가져온 요가와 동물들의 움직임을 본떠서 소림사 무술을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한편, 달마대사가 면벽수도를 하던 중 졸음을 쫓기 위해 눈꺼풀을 떼내서 던졌는데, (여러 버전이 있다만 대동소이하다.) 그곳에 자란 나무가 차라는 설이 있다. 그러고 보니 우리나라 영화 중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라는 유명한 영화에서 안성기의 대사 중에 달마가 면벽 수도를 한 이유가 말이 안 통해서라던 게 갑자기 생각나는군. 썰렁하지? 어쨌거나 녹차에는 카페인 성분이 잠을 쫓는 효능이 있다. 


다른 설화는 기원전 1,800여 년쯤에 중국의 신농이라 왕이 제자들과 약제 수집을 나갔다가 물을 끓이던 중 차나무 잎이 끓는 물에 떨어져 향기가 피어나는데, 너무 향기로워서 마셔봤더니 마음이 편안해져서 마시기 시작했다고 하는 재미없는 버전이 있는가 하면, 아빠가 들은 것은 이 신농이라는 사람은 배가 투명하여 온갖 약재의 효능과 변화를 쉽게 관찰했다고 한다. 어느 날 독초를 먹고 고통을 겪다가 찻잎을 먹었더니 배가 나았다고 한다는 중국식으로 과장된 버전이 있다. 차의 해독 기능을 강조한 설화다.  


또 다른 설화는 '옛날 옛날에..'로 시작하는데, 어느 용한 의원이 있었는데, 못 고치는 병이 없었다. 그러나 한 번은 아주 먼 마을에 왕진을 간 사이에 18살 딸이 그만 병에 걸리고 말았는데, 의원이 돌아오기 전에 죽고 말았단다. 너무나 안타까운 나머지 그 의원은 몸에 좋다는 모든 약재들을 다 담아서 딸의 무덤에 같이 묻었다는군. 그랬더니 봄에 그 무덤에서 자라난 나무가 차라고 한다. 그래서 한자로 열여덟 살 (十 八)의 무덤 안에서(入) 솟아난 풀(艸)이라 茶(차/다)라고 한단다. 좀 황당하지? 그냥 설說이다. 한자풀이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만들어 낸 말이겠지. 어쨌거나 세가기 차의 기원을 종합하면 차가 졸음을 물리치고, 해독 기능이 있으며, 몸에 좋다는 의미로 이해하면 충분하다. 


차 문화는 중국에서 발달했는데, 그 이유가 물이 안 좋아서라는 이야기가 있다. 넓은 중국 땅에 물 좋은 곳이 없었겠냐만은, 
아마도 식수 문제는 대도시의 발달에 따른 문제라고 봐야 한다. 그래서 중국의 차는 문화를 넘어 일상이 되었던 것이겠지. 도자문화의 발달과 더불어 차문화가 발달하게 되고, 서민들에게 일상이던 차와는 달리 강호의 호사가들은 차를 녹차, 황차, 백차, 오룡차, 흑차 등 발효 정도에 따라 부르기도 하고, 물 좋은 지역이나 기호에 따라 용정, 벽라춘, 황산모봉, 기문운침, 운무차, 철관음... 등등 이름도 다양하게 불렸다. 


물이 좋은 우리나라에 차가 들어와서는 절에서 수양을 위해, 그리고 불교행사와 관련해서 많이 마시게 되는데, 이는 아마 달마대사가 차의 기원의 한 부분을 차지한 것도 원인이었을 것이다. 고려의 팔관회와 연등회에서 늘 부처님께 차를 올렸으며, 우리가 조상님께 제사를 지내는 걸 차례(茶禮)를 지낸다고 하는 것도 차를 올렸기 때문이다. 불교가 쇠퇴했어도 차문화는 우리 뿌리 깊이 남게 되었다. 심지어 임진왜란 이후 차나무에 세금을 메기자(역사시간에 배웠지?), 차 맛에 푹 빠진 우리 조상님들은 대용으로 각종 탕(湯)을 차라 대신 부르며 마셨단다. 우리가 마시는 유자차, 대추차 등은 사실 차가 아니고 탕이라 하는 게 맞다. 이런 탕도 없으면 하다 못해 숭늉이라도 마셔야 식사를 다 했다고 생각하셨더랬다. 차는 일상에서 땔레야 뗄 수 없는 일이었고, 그래서 나온 말이 '일상다반사(日常茶飯事)'다. 어찌나 차를 좋아했는지, 심지어 담배도 연차(煙茶)라 불렀을 정도다. 지금은 커피가 차를 대신하게 되었는데, 넓은 의미의 차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나라만큼 이렇게 빠르게 커피가 대중화되고 소비가 증가한 나라가 또 있을까 싶다. 사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단순히 차가 좋은 게 아니라 차를 마시며 나누는 인간관계에 더 매력을 느끼는 것이라 생각된다. 임진왜란 이후 차는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고, 동시에 도공들도 끌려가게 되었단다. 싸움만 하던 무사들이 정신수양을 하기에 차 만한 것이 없었다. 도자문화를 빼고 차를 얘기할 순 없으니 일본식 차문화와 함께 도자산업도 발달하게 된다.

유럽의 차 이야기는 사실 인클로저(enclosure) 운동부터 이야기해야 될 듯싶다. 원래 중국에서 다양한 차가 전해지긴 했지만, 홍차 이야기는 사실 여부를 떠나 
흥미롭긴 하다. 세계사 시간에 배웠지? 인클로저 운동은 16세기 영국에서 모직물 공업의 발달로 양털 값이 폭등하자 지주들이 자신의 수입을 늘리기 위하여 농경지를 양을 방목하는 목장으로 만든 운동이다. 이로 인해 영세농들은 시골을 떠나 도시로 유입되고 이들이 도시 노동자가 되고 공업 발달에 필요한 노동력을 제공했단다. 이때 대규모 목축업이 발달하면서 고기가 풍부하게 제공되었지만 당시는 아직 냉장기술이 개발되기 전이라 염장 또는 훈제를 통해 보관해야 했단다. 그래서 오래 보관된 고기의 누린내를 해결할 방법을 찾아야 했고, 그 결과 후추와 같은 이국적인 향신료의 수요가 푹증했다. 그러나 당시 오스만튀르크가 아시아로 가는 길목인 지금의 터키지역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프리카를 돌아서 가는 항로를 개발하게 되었단다. 그게 바로 남아프리카의 희망봉을 거쳐가는 항로다. 아프리카를 한 바퀴 돌아 인도에 도착한 유럽인들은 후추뿐만 아니라 입냄새를 깔끔하게 없애주는 녹차도 잔뜩 싣고 인도를 출발했다. (사탕수수도 이때 유럽에 전해지면서, 설탕 수급을 위해 아프리카를 피로 물들인 노예노동의 역사가 시작된다.) 차를 싣고 배는 뜨거운 적도를 지나 다시 선선한 남아프리카로, 그리고 다시 태양이 작렬하는 적도를 거쳐 서늘한 유럽에 도착했다. 도착하고 보니 차가 모두 발효되고 말았고, 이게 홍차의 기원이라고 하는 설이 있다. 이것도 그냥 설이긴 하다. 그 후 영국이 인도 지역을 식민지로 삼으면서 홍차의 이름들은 스리랑카(실론), 다즐링이라는 그 지역 이름이 붙었다. 사실, 그 이전에 이미 발효차가 존재했고, 발효 정도에 따라 다양한 이름(아빠는 '저녁노을 차'라 불렀던 반발효차도 좋아했었다)이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역사 설명을 위해 끌어들인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뭐 어때, 그럴싸하잖아. 산업혁명과 대항해시대의 이야기를 차 속에 녹여 풀어낸 것이니 말이다.     


우리 딸, 차에 대한 흥미가 좀 생겼니? 서른쯤 되면 이제 커피도 좋지만 차를 마실 때도 되었다. 차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 마시면 더 좋다. 


좋은 사람들과 마주 앉아 주전자에 찻물을 끓이고, 다관에는 찻잎을 담는다. 물이 끓으면 숙우에 담아 80도 정도로 식혔다가, 다관에 물을 붓고 차가 우려 질 때까지 약간의 담소를 나누렴. 차가 잘 우러났는지 수시로 네가 마실 잔에 조금씩 부어 색과 맛을 살피고, 잘 우러났으면 모두의 찻잔에 나눠 따른다. 이때 조금씩 여러 번 나눠서 찻잔에 첨잔 하는데, 이는 나중에 따르는 차가 더 진하기 때문에 농도를 맞추기 위함이다. 같이 마시는 사람이 적어서 한 번에 다관의 차를 비우지 못한다면 우린 차를 숙우에 한 번에 붓고, 이것을 찻잔에 나눠 따르기도 한다. 이때 잔잔한 음악이 같이 하면 좋고, 다식으로 떡이나 양갱, 초콜릿도 좋다. 바른 자세로 차를 마시며 사는 얘기를 나누면 된다. 다관에 남은 차는 물을 살짝 부어서 한 바퀴 휙 회전시켜서 스냅을 이용해서 퇴수기에 깔끔하게 부을 수 있다. 그리고 다시 앞의 순서대로 새로운 차를 마시면 된다. 다 우린 찻잎은 버리지 않고 말렸다가 백설기를 할 때 같이 넣어 차떡을 만들어도 좋다. 간편하게 차를 마시는 티백도 있고 일인용 다기들도 많지만, 가끔은 차를 이렇게 정식으로 차려서 마시면 없던 여유도 만들어진다. 이게 다례(茶禮)의 장점이다. 안타깝게도 좋은 것들은 손이 많이 간다. 어쩌면 그래서 좋은 것인지도 모른다. 차는 어디까지나 좋은 사람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 위한 매개체다. 다도(茶道) 또는 다례의 형식을 따라 차를 마시며 시간을 나눈다. 같은 기억을 가진다. 결국은 또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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