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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르디우스의 매듭 Mar 25. 2020

너도 네가 누군지도 모른 채 서른이 되었지?

내가 누군지도 모른 채 마흔이 되었다

이번에는 오롯이 책 하나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겠다. 너도 네가 누군지도 모른 채 서른이 되었을 테니까.  


제임스 홀리스가 쓴 <내가 누군지도 모른 채 마흔이 되었다>라는 책이다.


책은 융 심리학을 바탕으로 쓰여 있다. 나이 마흔의 함의는 생물학적 나이라기보다는 사회적인 중간기, 책의 표현대로라면 인생의 중간 항로 또는 2차 성인기를 의미한다. 아빠도 40대 중반에 들어서부터는 늘 진정한 '사춘기'는 40대라 생각했으니 아마 같은 의미라고 생각된다. <내가 누군지도 모른 채 마흔이 되었다>의 원제가 <The Middle Passage>더라. 출판사에서 독자 타깃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 마흔이라는 용어를 넣었겠지. 물론, 책에도 40대에 대한 이야기가 중심이니 저자의 의도를 완전히 저버린 제목은 아니다.


융은 “마흔이 되면 마음에 지진이 일어난다. 진정한 당신이 되라는 내면의 신호다”라고 말한다. 이 시기에 많은 사람들이 우울증, 삶의 의미 상실, 신체의 변화, 외도, 이혼 등을 겪는데, 왜 마흔이 되면 삶 전체가 흔들리는 듯한 혼란을 겪게 될까? 이 책의 저자이자 융 학파 정신분석가인 제임스 홀리스는 그 이유를 우리가 진정한 자신에게서 멀어진 채 살아왔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아, 책을 읽어 내려면 초반에 나오는 몇 가지 단어들을 받아들이고 유념해서 읽어야 한단다. 책이 제시한 대로 융 심리학에서 나오는 용어들이다.


'자기-Self'는 '자아-Ego'와 구분을 해야 하는데, 융은 '자기'를 의식의 중심으로서의 '나'로 사용하면서, 내부의 원시적 충동과 외부 세계들의 요구 사이에 위치하면서 조정하는 내재된 심리적 기구로서의 '자아'와 구분하고 있다.

'내면 아이 - inner child'는 한 개인의 정신 속에서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처럼 존재하는 아이의 모습들을 나타내는데, 머릿속에 저장된 어린 시기의 기억은 개인의 정서에 관련된 기억을 설명해 주는 중요한 경험적 자원으로, 내면아이의 발달은 부모의 양육태도와 관련이 있으며, 자녀의 성장과 성격발달은 부모와의 상호작용의 산물이라는 개념이다.


또 융은 사람들이 서로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반복적, 지속적으로 보여주는 사고 및 행동의 패턴이 있다고 보았다. 이를 토대로 인간의 정신 구조를 형성하는 ‘원형’(archetypes)들이 있다고 주장했다. ‘아니마’(anima), ‘아니무스’(animus)는 ‘그림자’(shadow), ‘자기’(self)와 함께 네 가지 주요 기본 원형에 속하며, 융은 기본적으로 모든 인간에게서 네 가지 원형들이 모두 발견된다고 보았다.


'그림자'는 분노, 이기심, 욕망, 질투 등 우리가 숨기고 싶어 하는 내면의 모든 부정적인 부분을,

'자기'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보여주는 가면 같은 자아(페르소나 persona - 집단 사회의 행동 규범 또는 역할을 수행하는)와 달리 진정한 자아를 지칭한다.

'아니마'는 남성의 무의식의 한 부분을 구성하고 있는 여성적 심상으로, 사회화와 교육에 의해 남성 안에 억압되어 정신을,

'아니무스'는 여성의 무의식의 한 부분을 구성하고 있는 남성적 심상으로, 사회 문화적으로 수동적이고 의존적인 여성상을 이상화하는 사회에서 여성 안에 억압된 채 발달되지 않고 잠재해 있는 것을 말한다.


읽고 싶지 않아 지지? 그래도 읽어 볼 만하다. 특히 사는 것이 혼란스러운 인생의 중간 항로에 와 있다고 스스로 생각된다면 말이다.

이제 책을 간략히 요약하면, 우선, 책에서 말하는 기본적인 인간의 삶은 이렇다.


인간은 태어나서 부모가 물려준 굴절된 렌즈로 세상을 바라보도록 키워지며, 유년기가 아무리 풍요롭다 하더라도 다양한 트라우마를 겪게 되고, 여기서 비롯된 태도, 행동, 정신적 반사작용을 통해 '내면 아이'를 갖게 된다. 부모의 특정 행동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능력이 없을 때라 모두 자신을 향한 것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으며, 이런 제한된 경험 아래에서 개인의 콤플렉스가 만들어지고, 이 콤플렉스, 특히 부모와 관련된 콤플렉스를 극복하거나 보상하려는 심리가 만들어진다. 외부세계와 내면세계의 분명한 경계가 없는 유아기는 주술적 사고(자신의 소망이 다 이루어질 것이라는, 그리고 자신이 특별하고 우월하다는...)가 지배하게 되는데, 이러한 사고는 또래의 아이들과 접촉이 늘어나면서 자신이 우월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되거나 다른 또래들이 감명받지 않을 때 깨어진다.

1차 성인기라 할 수 있는 사춘기부터 40대에 이르기까지는 영웅적 사고를 보여준다. 주술적 사고에 비해 현실적이긴 하지만, 여전히 그 목표가 높다. '나는 엄마 아빠와 달리 배우자를 현명하게 선택할 거야' 또는 CEO가 되거나 걸작 소설을 쓰거나 멋진 부모가 되거나... 그리고 그 희망을 상대방과 사회에 투사하게 된다. 젊은 자아를 굳건하게 다져 부모로부터 독립하고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 생존을 위해 싸우면서 원하는 것을 다 이뤄낼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이때는 부모의 행동을 그대로 따라하거나 저항하면서 어른이 될 수 있다는 환상을 갖는다. 직장을 갖고, 결혼을 하고 부모이자 가장이 되면 이제 완전한 성인이 되었다 믿는다. 부모 콤플렉스와 사회적 역할이 갖는 권위는 여전히 강력한 힘으로 투사를 이끌어 낸다. 즉, 사회가 제시한 역할에 투사하는 힘으로 자아를 지탱하면서 내재된 '자기'를 눈가림한다.

그러나 어찌 산다는 것이 그렇던가. 기대한 대로 되지 않았다는 배신감과 투사가 사라지면서 나타나는 공허함이 중년의 위기를 만든다. 사회와 문화가 옳다고 생각하는 특정 가치를 유지하고 보존하는 데 일조하였으나 애석하게도 진정한 본성에 따르기보다는 '삶은 이렇게 보아야 하고 선택은 이렇게 해야 한다'고 키워진 결과로써의 삶에 가깝다. 중간 항로에 이르러 우리는 현실적 사고에 이르고 이는 '관점'을 선사한다. 다른 관점으로 젊음의 오만함과 자신감을 해결해야 하고, 희망, 지식, 지혜가 어떻게 다른 지도 가르쳐 준다. 젊은 시절의 자만심 가득한 기대는 절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도 안다. 이때 자녀는 사춘기에 와 있다. 퉁명스럽고 반항적이며, 부모가 '자신이 살지 못한 삶을 자식에게 투사하는' 것에 대해 분노하고 저항하는 시기다. 배우자는 서로에 투사했던 '내 삶을 좀 더 의미 있게 만들어 주는', '당신이 날 위해 언제나 거기 있어 줄 거라 믿는 기대', '당신이 날 완성시켜 주길', '당신이 내 맘을 읽어 내 욕구를 미리 알아주길' ... 이 모두가 얼마나 불가능하고 당황스러운 요구인지 받아들여야 하는 때다. 부모는 노년에 이르러 더 이상 상징적 보호자로 남아 있지 않거나 이미 이 세상에 없을 때다. 이제 “나는 지금까지 누구의 삶을 살아왔는가?” “지금까지 맡아온 역할들을 빼고 나면 나는 누구인가?” 이 같은 질문과 마주하고 지금까지 ‘거짓된 자기’를 쌓아왔다고 깨닫는 순간 자신의 진짜 존재를 만나는 2차 성인기로 넘어갈 수 있다.


이제 2차 성인기에 들어선 우리가 중간 항로에서 겪은 충격, 대표적으로, 우리가 옳게 행동하고 선의를 지니면 모든 일(결혼생활을 포함해서)이 제대로 풀릴 거라는 생각이 무너지는, 그리고 '자아의 우월함'이 깨지는, 니체의 표현대로라면 자신이 신이 아님을 깨닫게 되는 당혹스러운 경험을 넘어 스스로 온전한 인간이 되는 것에 대해 말한다.  


중간항로에서 필연적으로 페르소나와 그림자의 충돌을 만난다. 우리는 내면에서 다양한 페르소나와 사회적 역할을 발전시킨다. 그래서 부모로서, 직장에서, 연인과 있을 때 등등 외부세계와 어울리기 위해 다양한 페르소나를 만들어 생활한다. 페르소나는 개성인 척하지만 진실이 아니며, 개인과 사회 사이의 타협일 뿐이다. 사회화된 자기인 페르소나와 자신을 동일시할수록 억압된 그림자, 즉, 분노와 Sex, 즐거움, 자발성, 이기심, 의존성, 욕망, 질투... 등은 숨겨두는 것이다. 중년에 이르러 이미 많은 개성을 억누르고 살아왔던 것이 폭발한다. 평생에 걸쳐 페르소나에 투자한 사람에게 그림자를 만나는 것은 곤혹스러운 일이라 다른 사람만 그런 것으로 투사하고 싶겠지만, 자신을 속이는 일일뿐이다. 중간항로를 거치는 동안 그림자가 출현하는 것은 '자기'가 인격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스스로를 수정하려는 노력이다. 그림자를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다. 즉, 현실정치를 따르는 사회와 개인의 진실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결혼생활의 위기가 찾아온다. 우리는 결혼생활에 너무 많은 희망과 욕구를 걸기 때문에 그만큼 실망할 가능성이 크다. 사랑이 여성의 자아와 남성의 자아의 상호작용처럼 보이지만, 내면아이의 짐을 투사하는 것이다. 특히 낭만적 사랑이라는 것은 자신의 내면에 있는 다른 성에 대한 투사가 강력하게 작용한 것이다. 날마다 생활하다 보면, 이전의 투사는 무자비하게 지워지고 타인은 타인일 뿐, 나의 거대한 투사를 원하지 않으며 거기에 맞춰줄 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결국 자신의 잃어버린 부분이며, 이를 잃어버렸다는 것에 큰 충격이 다가온다. 결국 사랑이라 믿는 것은 자기 안, 특히 내면 아이의 아니마/아니무스와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래서 중년의 친밀감을 유지하는 길은 결국 두 사람이 각자 우선적으로 자신의 '개성화'를 추구하며, 관계를 통해 서로를 지지하고 격려하지만, 서로를 구원하는 관계가 아니라 각자가 스스로 책임을 지고 성숙해지는 관계, 서로에게 '제한 없는 자유로운 관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법 같은 타인의 존재를 믿는 것은 잔인한 자기기만이다.

결혼이 내면 아이에게 필요한  것을 가장 많이 지니고 있는 것처럼, 배우자가 완벽한 소울메이트가 아니라 나와 다른 평범한 사람임을 알게 되면 새로운 아니마/아니무스 투사는 바람피우는 행위로 가장 극명하게 나타난다. 이 투사를 걷어내지 못하면 끝없이 다른 이성을 바꿔가며 새로운 투사를 멈출 수 없을지도 모른다. 중년의 바람기가 강력한 힘을 갖는 이유는 1차 성인기로 끌려 되돌아가기 때문이다. 남편이 젊고 예쁜 여자와 바람이 나는 것만큼 아내가 나이 먹은 남성이랑 바람을 피우는 경우가 많다. 이는 아니마를 부적절하게 형성한 남성은 그와 비슷한 수준의 여성, 즉 자신의 미성숙한 아니마에게 끌린다는 의미이며, 아니무스를 부적절하게 형성한 여성은 불충분한 아니무스 발달을 보상받기 위해 세속적 힘을 가진 나이 많은 남성에게 매력을 느낀다. 결혼으로 충족될 수 없는 욕구를 다른 사람으로 채울 수 있다고 기대하지만, 그렇지 못한 현실은 곧 후회와 분노가 되어 짐이 된다. 결국 서로에게 완벽하게 독립적인 상태에서 결혼생활에 관해 대화할 각오를 해야 한다. 1) 부부는 자신의 심리적 행복을 스스로 책임져야 함을 인식하고, 2) 부부는 각자의 경험을 적극적으로 공유하며, 과거의 상처나 미래의 기대를 이유로 상대를 비난해서는 안된다. 3) 이러한 대화를 적극적, 지속적으로 해야 한다.

중간항로에서 부모와의 관계도 달라지는데, 1차 성인기의 잠정인격은 스스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부모와 사회제도가 정해준 지침에 따라, 특히 부모 콤플렉스의 강력한 영향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세상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든 냉담한 반응이든, 가끔은 핵심공포와 이에 대응하는 방식을 습득하고 권력과 권위에 대한 반응을 결정하는 많은 부분은 부모-자식의 관계에서이다. 이는 다시 내면에서 일어나는 대화를 자기검열하는 데 써버리게 만들었다. 우리가 많은 의사결정을 자기 머릿속의 누군가에게 조언을 구한다면 말이다. 부모들 대부분이 자신이 이루지 못한 삶을 자식에게 투사한다. 그러다 보면 아이는 부모의 사랑이 조건부 사랑임을 깨닫는다. 중간항로에 이르러서는 부모 콤플렉스를 벗어나게 된다. 권력관계가 달라지든 혹은 부모가 노쇠해지기 때문이다. 융에 따르면 우리는 부모를 그저 나와 다른 성인으로 볼 수 있게 된 후에야 진짜로 성장할 수 있다. 분명 내 이력과 특별한 연관이 있고 때로 상처를 주었을지도 모르지만, 부모를 그저 자신의 거대한 인생 여로에 용감하게 맞섰을 수도 아니었을 수도 있는 '타인'으로 인정해야 한다.


진정한 치유는 결국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라는 게 이 책의 내용이란다. 타인과의 친밀한 관계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타인으로부터 에너지를 얻지 않아도 될 정도로 자신이 스스로 충분히 발달해야 하는 것이다. 융은 세상을 위해 개인이 자신을 두고 떠나는 것은 유죄라고 표현했다. 대신에 또 이러한 논리가 가지는 반사회성을 의식했는지, 자신을 대신할 무엇을 반드시 사회에 제공하라고 한다. 굳이 포장하자면, 자기에 대한 자아도취가 아니라 사회에 공헌하고 타인의 개성화를 지지하는 것이다. 약간은 이율배반적이다. 

제임스 홀리스는 홀로 서기 위해 몇 가지를 제안하는데,


외로움에서 고독으로 - 분리 트라우마를 받아들이고, 중년에서의 상실은 흔한 일이며, 타인에게 자신을 투사한 것들을 거둬들여야 한다. 두려움을 의식 수준으로 끌어올려 마주 보라는 얘기다.

내 안의 잃어버린 아이를 만나다 - 내 안에 있는 내면 아이. 물론, 이 아이는 자기애로 가득하거나 탐욕스럽거나 질투심이 넘칠 수도 있지만, 어쨌든 중간항로에서 이 아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삶을 사랑하는 열쇠, 열정 - 열정은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다. 마흔에 들어서면 누군가의 허락이 아니라 스스로 이 열정을 얻어내야 한다. 그것이 비록 내면의 아픔을 건드리기도 하겠지만.

그 외에도 '영혼의 늪에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얘기와 '나와 나누는 대화'가 필요하며, '우리는 모두 언젠가 죽는다'라는 명제를 받아들여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도 얘기한다.


책을 보는 내내 아마도 이 책의 가장 짧은 버전은 우리가 어릴 때 읽었던 쉘 실버스타인('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썼던 작가다)이 썼던 '잃어버린 나의 한쪽' 또는 제목이 '어디로 갔을까 나의 한쪽은'이라는 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너도 아마 아는 내용일 거야. 짧게 정리하면 이렇다.   


"자기 몸의 한 조각을 잃어버려 이가 빠진 동그라미는 잃어버린 조각을 찾아 길을 떠난다. 동그라미는 뜨거운 햇살에 헉헉대기도 하고, 소나기를 맞아 기운을 되찾기도 하고, 눈 속에서 얼었다가 따뜻한 햇살에 몸을 녹이기도 하고, 도중에 벌레, 꽃, 풍뎅이, 나비 등을 만나 노래를 부르면서 행복한 여행을 한다. 동그라미는 여러 조각들을 만나지만 어떤 건 너무 작아서, 어떤 건 너무 커서, 어떤 건 네모나서, 어떤 건 지나치게 꼭 끼여서 잘 맞질 않는다. 다시 계속해서 길을 떠나는 동그라미는 이상한 사건도 겪고, 구덩이에 빠지기도 하고, 돌담에 부딪혀 코가 깨지기도 한다. 그리던 어느 날, 마침내 동그라미는 잃어버린 짝을 찾았다. 이제 완전해진 동그라미는 떼굴떼굴 빨리 굴러간다. 그래서 벌레도, 꽃도, 나비도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입이 열리지 않아 노래도 부를 수 없다. 결국 동그라미는 되찾은 조각을 다시 내려놓고 이가 빠진 채 흥겹게 노래를 부르며 길을 떠난다."

동그라미는 자기 잃어버린 내면아이를 찾아서 삶의 여정을 떠나 세상과 만나지만 자신의 아니마/아니무스를 투사하며 짝을 찾는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아니마/아니무스에 딱 맞는 조각을 찾았지만 행복은 길지 않았고, 곧이어 자신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다시 홀로 서기를 한다는 내용이었던 것이었다.  

이 책 대로라면 세상에는 연인 간에 '진실한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고독한 영혼 간의 친밀한 애정관계까지가 가능한 것이지. 동의하니? 이성적으로는 상당한 부분에서 동의하지만 마음은 씁쓸하다. 이 책은 실제로 1993년에 쓰인 것임에도 여전히 훌륭한 가르침을 준다.


아빠가 뜬금없이 이 책을 이야기하는 것은 지금 엄마와 아빠는 인생항로의 Middle Passage를 지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항상 문제가 많았다. 한국에서 갱년기라 함은 주로 신체적인 변화를 중심으로 말한다. 그리고 건강식품 광고가 그 사실을 끊임없이 강조한다. 그래서 엄마 아빠는 갱년기가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심리적으로 갱년기를 지나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 와중에 너는 사춘기를 지나고 있는 것이다.) 엄마와 아빠가 서로에게 투사했던 '내 삶을 좀 더 의미있게 만들어 주는', '당신이 날 완성시켜 주길', '당신이 내 맘을 읽어 내 욕구를 미리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은 많은 시행착오를 거친 뒤 상당히 거둬들일 수 있었다. 서로에게 어느 정도 독립적인 상태에서 결혼생활에 관해 대화할 준비를 해 왔고, 조금씩 조금씩 가능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너에 대해서는 좀 다르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자신이 살지 못한 삶을 자식에게 투사하는 잘못을 저지르게 마련이다. 융은 아이가 짊어져야 하는 가장 큰 짐이 부모가 살아보지 못한 삶이라고 말했다."


엄마와 아빠는 항상 그렇지 않다고 말은 하지만 무의식 중에 자신이 살아오면서 후회했던 순간들 때문에 가끔 너를 다그친다. 우리가 네게 주는 사랑이 조건부 사랑이라는 주장에는 절대로 동의하지 않지만, 우리가 바라는 네 행동은 어느 정도 있었다. 말로는 분명 너를 독립된 인간으로 인정한다고 했지만, 우리가 기대하는 대로 하지 않을 때는 네게 실망감을 표현했고, 너는 그것을 항상 부담스러워했다. 그 점에 대해서는 미안하게 생각한다. 물론, 너도 만만치 않게 사춘기라는 핑계로 못되게 굴기도 했다. 그냥 너그럽게 이해해도 될 순간들도 거친 감정표현을 해서 분위기를 차갑게 만들기도 하고 말이다.


막심 레오와 요헨 구취가 쓴 <그래서 좀 쉬라고 호르몬에서 힘을 살짝 빼준 거야>에 보면 이렇게 설명한다.


"질풍노도는 사춘기의 실존적 특징만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다. 갱년기의 질풍노도 역시 사춘기의 질풍노도만큼이나 그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을 정도다. 사춘기나 갱년기 인간들에게 다음 두 가지보다 더 쓸모없는 것은 없다: 이성과 논리."


아빠가 볼 때 별 것 아닌 것으로 갱년기인 엄마와 사춘기인 네가 말다툼을 하고, 눈물을 흘리거나 고함을 지르며 싸울 때 왜 조금만 서로의 입장을 이야기하고 상처 주는 말을 조심하지 않는지 안타까웠다. 그러다 아빠가 옆에서 한 숨 쉬면 둘 다 아빠를 비난했었지. 난감했다.


"성장하여 스스로 책임질 것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삶은 무자비하다. 단순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성장은 중간항로에서 정말로 피할 수 없는 요구사항이다. 이는 결국 타인의 중재 없이 자신의 의존성, 콤플렉스, 공포를 직면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가 짊어져야 할 몫을 타인 탓으로 돌리는 일을 그만두고 자신의 육체적, 감정적, 정신적 안녕을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

미안하지만, 사랑하는 우리 딸. 삶은 무자비하다. 지금 네가 하는 말과 행동. 그게 서른의 너를 구성하고 있을 것이다. 너는 성장해야 한다. 우리가 다그쳤던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스스로 인생을 마주하고 극복하고 살아내야 했던 순간들이었다.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라고 깨우고, 밥 먹을 때 핸드폰 그만 보라고, 페이스북이나 유튜브 그만 보라고(이건 분명 우리의 오해일 수 있다. 유독 이것을 거슬려하다 보니 네가 핸드폰을 보고 있던 순간만 인상에 남아서 오해한 것일 수 있다.), 책 좀 읽으라고 했던 모든 것은 지금 네가 피우는 게으름에 대해 나중에 모두 책임져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이제 서른이 되었다면 진짜로 네 몸과 마음과 사고에 대해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


너도 네가 누구인지 모른 채 서른이 되었을 것이다. (아빠도 그랬다. 마흔 후반을 지나 50에 가까워지고 있는 지금도 사실 내가 누군지 아직 잘 모른다.) 그러나 넌 실망할 필요가 전혀 없다. 이제 겨우 서른이니까. 서른까지 오면서 몇 번의 좌절을 겪었을 테고, 또 몇 가지는 보람을 가지고 성취한 것도 있을 것이다.  


"현재의 삶을 가장 충실하게 살아야 한다. 과거에 대해 끝없이 불평만 하면서 망설임과 부끄러움 속에 말년의 허약함과 죽음을 맞아서는 안 된다. 우리가 가장 온전하고 충실하게 살아야 할 시기는 분명 바로 지금이다."


10대인 지금이나 서른에서나, 혹은 지금의 아빠 나이에 이르러서나 현재의 삶을 충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명제는 변함이 없다. 엄마 아빠로 인해 힘들었다면 미안한데, 지나간 과거에 대해 불평만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우린 나름 최선을 다했다. 가끔 진심이 닿질 않았던 것이고, 너도 좋은 것들은 당연하게 여겼고, 네가 상처 받았던 것만 기억했을지도 모른다. 그게 다 무슨 상관이니. 앞으로의 훨씬 긴 삶이 있는데. 극복할 시간은 충분하다. 과거가 상처라면 스스로 내면의 아이에게 진정으로 그때 상처를 받았던 것이 무엇인지 물어보고 답을 찾아야 한단다.


"삶의 수수께끼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음을 깨닫는다. 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여전히 투사에 사로잡혀 있거나 사기꾼 약장수일 뿐이다. 그들은 기껏해야 본인에 해당하는 진실만 이야기할 수 있을 뿐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못한다. 인생의 구루guru(스승)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은 그 길이 다르기 때문이다."


네가 서른이 되었을 때 이미 아빠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그게 나쁘다는 의미는 아니다. (아빠도 서른을 넘어서서는 부모님의 말씀들을 알아서 가려듣고 행동했다.) 책에서 말하듯이 아빠는 그냥 아빠가 아는 진실만을 말할 뿐이다. 모든 인생이 다르니, 네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해야 한다.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마법사 간달프도 프로도에게 비슷한 말을 했다. "모든 사람들은 자기가 결정하지 않은 그런 일을 겪게 된단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럴 때 어떻게 할지 결정하는 것뿐이지."


"타인과의 관계에서 우리는 의존성을 탈피하여 타인보다 자신에게 더 많은 질문을 던질 것이다. (...) 자신에게 더 많은 질문을 던짐으로써, 우리는 타인이 자신에게 줄 수 없는 것을 이유로 타인에게 실망하지 않을 수 있다. 우리의 여정이 우리의 책임이듯이, 타인의 가장 큰 책임은 그들의 여정을 이끄는 것임을 받아들이게 된다."


자신에게 더 많은 질문을 던지는 가장 좋은 방법은 책을 많이 읽는 것이다.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해야 올바른 질문을 할 수 있다. 단순히 읽는 것을 넘어서 스스로 책을 정리해 보는 습관이 중요하다. 알고 보면 학창시절에 독서노트 적었던 것이 단순히 수행평가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아빠가 네게 해 주지 못했던 것을 이유로 실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네 삶도 결국은 네 책임이다. 아빠는 여태껏 네 옆에 서서 같이 걸어 주었다. 그러나 삶이라는 것은 한순간도 너를 안고 아빠가 대신 걷는 것을 허락하지는 않았다. 알고 보면 이제껏 네 스스로 걸어온 것이다. 남은 너의 여정을 스스로 잘 걷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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