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전, 아내의 이 말 한마디로 4박 5일간의 이번 여름휴가는 제주도로 갔다 왔습니다. 그런데 복귀는 저 혼자 했습니다. 아내는 8월 한 달간 제주에 머물며 워케이션을 할 예정이었거든요.(사실 말이 좋아 워케이션이지 아내가 쳐내야 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어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더군요.)
아내가 속한 회사에서 제주도에 사업장을 확장하면서 재택근무를 하던 아내는 최근에 수 차례 제주도로 출장을 오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제 휴가도 겹치게 되어 자연스럽게 제주도로 휴가지를 정했고 제주에 새로 차린 사업장에 가서 해야 할 일도 있어서 제주도에서 한 달 살기를 결심했더군요.
휴가 전날이었던 지난 화요일 저녁, 각자 일을 마치고 우리 가족은 작은 차에 짐을 구겨 넣고 아이들을 태운 채 제주로 가는 배를 타러 삼천포항으로 향했습니다. 제주에서 아내가 출장 갈 일이 많을 것 같아서 차를 배에 싣고 간 건데요. 어차피 저는 휴가 복귀 후 출퇴근을 자전거로 하면 되니까 괜찮았습니다.
배를 타고 제주에는 처음 가봤는데요. 삼천포로 가기 전에 고성에서 중식당을 하는 처형네에 들러 짜장 양념을 좀 받아갔습니다. 나중에 또 언급하겠지만 이 짜장이 휴가 기간 동안 우리의 아침을 책임진 고마운 식량이었습니다.
삼천포항에서 자정이 다돼서야 출발했는데 너무 피곤해서 아내와 맥주 한 캔 마시고 객실에 담요를 펴자마자 곯아떨어졌습니다. 눈을 뜨니 아침 6시, 이윽고 제주항에 도착했다는 방송이 흘러나오더군요. 물론 저의 코골이 때문에 아내가 밤새 제 옆구리에 일침을 종종 가한 바람에 꿀잠은 못 잤습니다. 졸린 눈을 비비며 한참을 기다려 차를 끌고 배에서 빠져나와 곧바로 맥도날드로 향했습니다. 이유는 제일 저렴한 아침 메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제주 물가가 살벌하다길래 어느 정도인지 궁금했는데 어떤 곳은 돈까스 정식 18,000원, 아메리카노는 6,500원, 갈치구이 대략 1인 4만 원(4인가족이 가면 16만 원이 되겠죠?), 흑돼지 1인분에 2만 원 정도더군요. 일단 이 정도는 예상하면서 가게 된 거라 아내는 숙소에 쌀과 물을 택배로 주문해 놓더군요. 웬만하면 해 먹자고...
아침에 아내가 자는 동안 이미 잠에서 깬 아이들에게는 처형한테서 받은 짜장을 데워서 밥에 비벼주고 다음날에는 라면사리에 비벼줬습니다. 이게 없었다면 아침에 아이들 먹을만한 밥집 찾느라 시간과 돈 모두 들었을 테죠. 덕분에 휴가 기간 동안 짜장으로 저와 아이들이 충분히 한 끼를 때웠습니다. 그렇게 먹어도 아직 절반이상 남았으니 한 이틀은 더 아이들과 아내가 충분히 먹을 수 있겠더군요.
식사도 그렇지만 커피 역시 저와 아내 둘 다 전투력 상승을 위한 충전재 개념이 강해서 분위기 좋은 카페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저가형 프랜차이즈 커피점에서 2천 원짜리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카페인 충전만 하면 됐습니다.
족발도 시켜먹고 숙소 근처에 있던 연돈에도 가봤습니다.
제주 경치 구경 맘껏 하고 근처 해수욕장에서 모래찜질하면서 애들이랑 물놀이나 실컷 하려고 했었는데 무덥고 습한 기운이 온몸을 강타하면서 우리 계획은 일부가 아닌 전면 수정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요. 신화월드에 들러서 놀이기구 몇 번 타고 더위를 먹어버려서 그 이후로는 휴가기간 내내 실내만 찾아다녔습니다. 아쿠아 플라넷, 산방산 근처 탄산 온천, 리조트 찜질방, 각종 박물관 등이 이번 휴가 때 들렀던 곳인데요. 제주의 경치는 날씨가 선선할 때 다시 가서 구경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냥 한 여름에는 실내가 최고입니다.
한편, 아내는 휴가 기간 동안에 맘껏 즐기지는 못하는 표정이었습니다. 일과 관련해서 휴가 때는 다 잊어버리는 저와는 달리 본인이 손을 쓸 수 없는 일에도 온 신경이 집중되어 있더군요. 좀 마음이 아팠습니다. 게다가 저는 회사에서 휴가비도 얼마 받지 못해서 아내가 휴가기간 거의 모든 비용을 지불했습니다. 그래서 운전하고 밥하고 빨래하고 자잘하게 손이 가는 것들은 제가 도맡아 했습니다. 이거라도 신경을 안 쓰게 하는 게 정신건강에 좀 낫겠다 싶었죠. 물론 아내의 명령과 지시도 있었지만요.
저녁에는 다들 피곤한 눈으로 자기 전까지 올림픽 경기를 봤습니다. 노는데 집중하려고 딱히 읽을거리를 가져가지 못한 게 아쉬웠습니다. 그렇게 알찬지 알차지 않았는지 모를 휴가를 보내고 저는 아침에 비행기를 타고 육지로 올라왔습니다.
어찌 됐든 휴가는 휴가네요. 4박 5일이 4.5초 같이 흘러가니 말이죠. 마치 백일 휴가를 나온 이등병의 기분이었습니다. 분명 다음 날 출근을 하면 여독에 시달릴 것 같은데요. 최대한 그 여파를 줄이기 위해 혼자 도서관에 와서 글을 쓰고 있습니다. 평소 일요일 루틴으로 돌아오기 위해서죠.
아내는 제가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는 아침부터 집에 도착해서 짐 풀고 도서관에서 더위를 식히고 있는 지금까지 아이들과 어디에 갔는지 카톡으로 알려주고 있네요. 오히려 오늘 아이들과 간 곳들이 제가 더 좋아했을 곳들이라며 아쉬워하네요. 저도 아쉽긴 아쉽더라고요. 이제 한 달간 아내와 아이들을 못 볼 거라고 생각하니 더 그런가 봅니다. 내일이면 장인어른과 장모님이 아이들을 봐주러 제주로 가셔서 그나마 걱정은 덜었습니다.
저는 앞으로 며칠간은 저녁에 친구들과 소주 한 잔 기울이며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삭여봐야겠습니다. 집 안에서 웃통 벗고 돌아다니는 거랑 넷플릭스 시리즈도 도움이 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