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한 달간 저는 혼자 지내는 신세가 됐습니다. 아내는 회사 일로 스트레스를 받긴 하겠지만 경치 좋은 제주에서 아이들과 한 달간 잘 지내다 오리라 믿고 있습니다. 문제는 전데요.
가족과 떨어져 혼자 지내기 시작한 첫째 날과 둘째 날은 마냥 신났습니다. 퇴근 후 룰루랄라 집에 들어와서는 땀을 식히려 바로 욕실로 들어가 찬물 샤워를 했습니다. 샤워를 끝낸 후 몸에 물기를 닦자마자 곧바로 퇴근길에 들러서 사 왔던 매운 닭날개 구이를 테이블에 세팅하고 냉장고에 고이 모셔둔 캔맥주를 꺼내 한 모금 했습니다. 매운 닭날개와 맥주의 조합에 저절로 웃음이 나더군요. 손에 쥔 리모컨은 쉴 새 없이 채널을 돌리고 있었고요.
조금은 알딸딸 상태에서 글을 써보려고 노트북 덮개를 열었지만 아이들이 옆에서 재잘거릴 때보다 글이 더 안 써지더군요. 이렇게 그냥 멍하니 3일 동안 먹고 싶은 걸 먹거나 티브이만 보면서 퇴근 후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어제는 아이들이 보고 싶어서 영상통화를 걸었는데 논다고 바쁜지 바로 끊어버리는 바람에 괜스레 마음만 울적해지기도 했습니다.
회사는 이번 주 내내 덥다고 오후 5시에 마쳤는데요. 저는 일찍 마칠 때마다 뭘 먹어야 할지부터 고민을 하게 됐습니다. 그나마 집에 와서 냉장고 문을 열어보니 곰탕 즉석식품이 있더군요. 파를 송송 썰어 넣고 끓였습니다. 밥은 이틀 전에 해놓은 게 아직 많이 남아있어서 바로 곰탕 국물에 말았습니다. 냉장고에서 김치랑 마늘장아찌도 꺼냈고 참치도 한 캔 깠습니다. 갑자기 혼자 자취를 했던 20대 시절이 생각났습니다.
약속이 없는 주말 저녁에 이렇게 밥상을 차리고 티브이를 틀면 나오던 익숙한 사운드가 귓가에 맴돌았습니다. 무언가에 이끌려 리모컨으로 다시 보기를 눌렀는데요. 바로 '무한도전'이었습니다.
놀랍게도 이 세팅이 자취할 때와 똑같은 구조인 게 생각나더군요. 냄비째 먹던 국물, 제가 좋아하는 반찬도 변함이 없고요. 자취할 때는 주로 라면을 먹었었는데 지금은 곰탕이라 조금 업그레이드 됐네요. 옛날 생각하며 그땐 그랬지라면서 무한도전도 오랜만에 재미있게 봤습니다. 서울 구경 특집이었는데 다음에는 추격전만 따로 골라 보고 싶어 지더라고요.
그 시절 무한도전은 말 그대로 무한히 나의 인생과 함께 늙어갈 줄 알았는데 결국은 저만 나이를 먹어버렸습니다. 혼자 있으면 자유롭게 뭔가를 즐길 줄 알았는데 결국 즐긴 것이라고는 무한도전이 재생되는 한 시간 동안 천천히 식사를 한 것 말고는 없네요.
설거지를 하고, 밖에 나가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고, 재활용 쓰레기 분리수거를 하고 들어오니 어느새 해는 뉘엿뉘엿 지고 있었습니다. 화면 속 박명수보다 이제 내가 더 나이가 많다는 사실에 화들짝 놀랐지만 저녁을 먹었던 조금 전 그 시간만큼은 저도 무한도전을 보며 낄낄대던 어릴 적 모습으로 돌아가서 행복한 순간이었습니다.
음... 그래도 더 보고 싶은 건 아내와 아이들이네요. 저는 아무래도 기러기 아빠는 못 될 것 같습니다. 사실 오늘 저는 조금 외로웠나 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