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여름 May 15. 2024

6. 힘들게 성취하는 것이 의미있다?

사랑조차도?


편함을 좋게만은 보지 않는 문화는 어디에나 존재한다. 고진감래라는 사자성어부터, 미국 뒷골목 어딘가 복싱장에 걸려 있을 것 같은 No pain, no gain이라는 속담도 그렇다. 쉽게 성취한 것은 쉽게 사라진다, 그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 말이 인간관계에는 그렇게 잘 들어맞지 않는 것 같다. 






고통은 근육성장에 필수







어릴적 우리 집에서 칭찬을 받으려면 아주 잘 나온 성적표를 들고가는 수밖에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가난하셨던 두분은 먹는 것, 입는 것, 자는 곳이 있는 것이 가장 중요했고, 그 외의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여겼다. 미래의 성공을 담보하기 위해 좋은 성적을 받는 것이 중요했고, 가족은 책임감이 우선으로 구성된 공간이었지, 칭찬, 인정, 웃음이 가장 중요한 공간은 아니었던 것 같다. 아빠는 돈을 버는 것, 엄마는 살림을 하는 것 그리고 양육을 하는 것, 자식들은 공부를 잘 하는 것 등등이 각자의 의무로 주어졌고 그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어딘지 제 자리가 없을 것 같은 미묘한 공기가 집안에 흘렀다. 



나는 운이 좋게도 중학교에 가서 처음 친 시험에서 꽤 성적이 좋았다. 어렸을때부터 책을 많이 읽었던 터라 학교 공부가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부모님은 내가 성적표를 들고 달려들어가면 어딘지 모르게 '흥 이정도' 하는 느낌이었다. 애들에게 크게 칭찬을 해주면 애들이 거만해져서 인성을 망친다고 믿으셨던 것 같다. 그 예상은 틀렸는데, 칭찬을 안 해주셔도 거만한 아이로 자랐기 때문이다. '아, 그래 잘했네' 정도의 반응은 내가 원하는 칭찬에 한참 모자랐다. 동생은 아프거나 말썽을 피웠고, 엄마랑 자주 싸웠다. 나는 착한 딸이 되는 것으로 어느 정도의 관심을 받을 수 있었지만 가끔은 '동생은 문제투성이지만 그에 반해 순하다'는 정도 말고, 100%로 상대해준다는 느낌을 받고 싶었다. 그래도 내가 원하는 만큼이 아니었어도 그래도 그것만이라도 없었다면 아무 반응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에 계속 공부를 잘하고 성적을 잘 받아왔다.



이렇게 뭔가를 성취하면서 빵 말고 빵가루같은 애정을 받는 것이 나의 애정 패턴이 되었다. 어렵게 노력해서 성취한 것은 내가 뭔가 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고,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것을 받을 가치가 있을 것 같았고, 그 사람들은 당연히 떠나지 않을 것 같았다. 이것을 돌려 말하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고생을 하지 않고서는 이 애정을 받을 가치가 없는 것 같았다는 말도 된다. 친구들은 그냥 내가 좋아서 있는 것인데도, 어딘지 모르게 내가 노력하는 것, 어떤 연출을 하는 것을 멈추지 않으면 떠날 것 같았다. 당연히 편하지 않았다. 백조가 물 위에 편하게 떠있는 것 같아도 발은 언제나 바쁘게 젓고 있는 것처럼. 누군가를 만나고 들어오면 완전히 진이 빠져 집에 누워있는 시간이 있어야 충전이 가능했다. 내가 피플 플리징을 하고 있는것도 몰랐다. 내가 하고 있는 게 '연극적'이라는 말을 듣기 전까지는.






백조 바쁩니다 말걸지 마세요








이런 성향의 사람들이 연애를 하게 되면, 연애가 힘들어질수록 투지를 불태운다. 힘든 연애를 극복하면 더 큰 열매가 오리라 생각한다. 이것은 여러 문제를 일으키는데, 하나는 원래 성취라는 것의 본질 때문에 그렇다. 성취하고 나면, 그 기쁨은 낮아진다. 그 어떤 것도 성취할 때의 기쁨만큼 강렬할 수는 없다. 인간관계에서 이것은 큰 아이러니가 된다. 인간관계의 기본은 '함께 있을 때 편안하고 행복한 것'인데 인간관계를 성취하려고 하면 성취 그 이후로는 시들해지기 마련이다. '잡은 물고기 밥 안 준다'는 속담은 나의 가장 커다란 공포였으며, 바람피우기가 난무하는 한국연애시장도 그 공포를 줄여주는데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또 하나의 문제는, 성취하고 싶게 만드는 파트너들은 대체로 함께 있을 때 편안한 타입들은 아니라는 것이다. 애초에 처음부터 편안하면, 왜 더 노력을 하고 싶으며 내가 더 성취를 하고 싶겠는가? 또 성취라는 건 대체로 고생을 담보하기 때문에 그 관계가 성취되었을 때 본질적으로 복수를 하고싶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피플 플리징의 본질이기도 한데, 본질적으로 모든 피플 플리징은 자신을 배신하는 행위이므로, 억압된 분노가 항상 속에 생긴다고 한다.



연애관계가 편하지 않은게 당연하다고 느낀데에는 가족에서 보고 자란 부모의 관계 역학도 있었다. 우리 아빠는 전형적인 경상도 남자로 가족에게까지 그렇게 가깝거나 다정한 사람은 아니다. 엄마는 그런 아빠를 데려다가 삶고 데치고 해서 자식들한테 다정한 말을 한마디라도 해줘봐라, 이럴 때는 용돈이라도 좀 줘라 등등 다양한 말을 해가면서 그를 고치려고 이런 저런 일을 다 해 봤지만 사람은 자기가 다짐하지 않는 한 변화하지 않는 존재다. 그냥 그것은 둘 사이에 항상 존재하던 말싸움의 한가지 종류일 뿐이었다. 나는 항상 말싸움을 하는 관계를 보고, 서로의 관심이나 사랑을 귀찮음으로 보는 관계를 보면서 나도 모르게 그 패턴을 반복하곤 했다. 이걸 내 상담 선생님은 이렇게 표현했다. 뇌는 반복을 좋아하고 새로운 것을 하는 것을 불편해 하기 때문에 한 적이 없는걸 하는 것보다는 어디선가 본 걸 모방하려고 한다고. 사랑도 그래서 받아본 것만 혹은 관찰 한 대로만 줄 수 있다고.



어렸을 때부터 아빠는 애정을 주지 않고, 엄마는 애정을 갈구하는 사람이라는 도식을 보고 자라며, 애정은 주지 않는 사람이 더 힘센 것이라는 공식 또한 학습한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애정을 갈구만 하거나 혹은 관계가 안정적으로 접어들면 그 애정을 무시하는 패턴을 보이곤 했다. 그 관심을 감사하게 여기고 고맙게 여기는 것도 본 적이 없어서 새롭게 배워야만 했다. 일정 정도 평화가 지속되면 내가 심지어 싸움을 걸어서 분란을 만들기도 했다. 이 익숙하지 않은 상태는 뭐지, 언젠가 미래에 싸움이 날텐데, 지금 싸우는게 낫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듦으로. 뇌는 정말 놀랄정도로 반복을 하고 싶어하는 존재고, 나는 그것이 가끔 무섭다.






그만 열심히 일해도 될텐데... 반복하는 뇌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의 감정을 알고 나눈다는 것임을 알았다면, 빠르게 안될 것 같은 연애를 벗어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라면서 나의 감정은 이해받은 적이 별로  없었기에 원래 감정은 고립되고 소통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엄마와 아빠도 항상 소통이 안되는 채로 싸웠고, 엄마는 사회적 기준의 '좋은 엄마' 체크박스를 채우는게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보다 중요한 것 같았다.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면 내 마음이 이해를 받는다는 느낌을 느끼지 못하고 자라났고, 인간관계란 원래 그런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외로웠다. 가족은 단절된 공간이었다. 그래서 친밀한 관계는 당연히 단절되는 거라 생각했고, 소통은 당연히 되지 않는 것이라 생각했다. 내가 소리를 지르면 상대쪽에서는 귀를 닫고 안 듣는 것이 나에게는 정상이었다. 그렇지 않은 파트너가 나타나도 나는 계속 소리를 지르고는 했다. 내말을 좀 들어줘! 듣고 있어? 응? 듣고 있다구? 어, 정말 들었네. 하고 뻘쭘해지곤 했다. 



사랑은 성취하지 않아도 된다. 사랑은 성취되지 않는다. 감정은 흐를수 있고, 내 말은 소리치지 않아도 들릴 수 있다. 누구든지 존재하기 때문에 그대로 사랑받을 수 있다. 자신을 기만하는 일은 지속가능하지 않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