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여름 Jul 22. 2023

사랑에 관한 에세이 3 - 닮은 영혼

허공에 흩어진 이야기들. 와글와글한 소리들. 수신자를 찾지 못하고 흘러 다니는 외침들. 너무나 사랑한다는 말이 정작 사랑하는 사람에겐 전달되지 못하고. 마침내 찾았나? 그사람을? 결국 찾고야 말았을 때에도 실패하는 사랑. 이번에는 용기를 내고 꼭 수신자를 정확히 설정했는데도 차단되어 있을 때의 믿을 수 없는 무기력함. 신의 등돌림. 원망. 그래도 사막 위로 해가 뜨고 또 석양은 물 위로 떨어지고. 

 

나의 세 번째 사랑은 캐나다에 와서 만났다. 나는 그 지긋지긋하던 대학을 졸업하고 또다시 3년제 커뮤니티 컬리지에 다니고 있었다. 졸업이 가까이 다가오자 나는 초조함에 시달렸다. 과연 내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이국에서 돈을 받으며 내 자리 한 켠을 만들 수 있을까? 아마 그럴 것이었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불안했다. 졸업이 한 학기쯤 남았던 아직 추운 3월에 나는 그를 만났다. 

 

캐나다에서 인종 얘기를 하는 것은 재미있다. 이것이 실제만큼 큰 문제가 아니라고 외면하고 싶은 백인들을 보는 것도 재미있고 여기에 잔잔히 열 받아 있으면서도 굳이 더 생각하려고 하지 않는, 여기서 태어난 비백인들을 보는 것도 꽤 재미있다. 다른 나라에서 온 이민자들은 굳이 백인이건 뭐건 하는 문제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먹고 사는 데 바쁘고 캠핑도 가야해서. 나는 이민자지만 희한하게 인종문제가 꼭 내 문제 같았다. 까딱 정신차리지 않으면 기모노를 입히려는 남자들이나 곤니치와 하고 길거리에서 말을 걸어오는 남자들이 있기 때문이겠지만 그것보다도, 나에게는 그 문제가 권력의 문제라는 것이 명확했고, 한국에서 한국 남자들의 위선적임과 시스템적 성차별주의에 기가 막혀 나라를 뜬 나에게 그 주제는 남 일 같지 않았다. 

 

이 사람과는 말이 잘 통했다. 나만큼 인종문제와 성차별주의에 관해 뚜렷한 의견이 있었고, 정치적이었고, 그걸 유머로 풀어낼 줄도 아는 사람 같았다. 첫 데이트에서 술을 5잔씩 먹었는데 다음 술이 끊기기 전에 호쾌하게 계속 술을 주문하는 것도 맘에 들었다. 너도 나만큼 이 대화가 재미있구나. 바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한 멋진 첫 키스도 좋았고, 잃어버린 귀고리를 같이 찾아주겠다며 성큼성큼 앞장서는 모습도 좋았다. 고작 걸어서 15분 거리에 사는 주제에 차를 가지고 나와서 맥도날드까지 내가 먹고 싶다던 감자튀김을 사러가는 것도 좋았다. 

 

두번째 데이트에 옥타비아 버틀러라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중 한명의 <킨>이라는 책을 설명하는데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거리며 한참 열심히 듣더니, 자기도 그 책을 읽었고 그 작가를 너무 좋아한다고 했을 때 나는 조금 멍 해졌고 갑자기 행성이 반대 방향으로 돌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내가 만나본 사람 중에는 그 사람의 책을 실제로 읽어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 주변에 책을 읽는 사람이 많은 편인데도, 단 한명도. 이 사람이 처음이었다. 이해받는 느낌이 들었다. 책은 길고 긴 수많은 단어들의 조합인데, 그 조합들을 모두 내가 읽은대로 읽고, 비슷한 감상을 느꼈다면, 나와 지구 반대편에서 태어나고 살아왔지만 이 사람은 나와 비슷하게 생긴 영혼을 가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드디어 보여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동시에 불안정했다. 이 두가지가 겹치면 파괴적인 시너지를 낸다. 이 사람이 내 유일한 희망 같아지니까. 우리의 첫 두 달도 아주 멋졌다. 이십대가 아닌데 이런 시간이 다시 오다니 싶을 정도로. 졸업과 학점으로 가는 길은 그다지 희망적이지 않아보였지만 스스로에게 몇 번이나 자문해도 학점보다 이 시간을 즐기는 게 내 인생에 더 좋은 일이라는 결론이었다. 나는 이 시간을 즐기는 것을 언제 돌이켜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런데 내가 혼자서 이런 결론을 내는 사이 그 사람은 정신을 차렸고 일에 몰두하기 시작했고 나는 남겨져 있었다.

 

그 불안을 견딜 수 없었던 내가 끝을 냈다. 그래도 사랑꾼 짬바가 있어서 그런지 이제 5년 혹은 1년씩 걸리지 않았다. 그래도 아픈 건 똑같았다. 아니 더 아팠다. 시간이 덜 걸리니까 충분히 하지 않았다고 생각해서 더 미련이 남았고, 몇 개월이 지나고 다른 사람을 만나도 꿈에 나왔다. 내마음이 이제 좀 더 나 자신에게 붙어있게 된 걸까? 꿈이 나의 마음을 알려줬다. 좋은 차를 타고 멋진 애인을 가지고 행복해보이는 그 사람이 두번이나 꿈에 나왔다. 아직 미련이 있구나, 나. 

 

 해가 바뀌고 계절이 바뀌고 봄이 되었을 때, 나는 벚꽃을 보러 갔다. 작년에 그 사람과 함께 갔던 곳. 나를 떠난 사람을 위해 벚꽃을 보러 한 시간이나 스트릿카를 타고 어디론가 가서 내 시간을 쓰고 마음을 쓰는 것은 과거의 나라면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사랑은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 확실했다. 적어도 지금의 나는 내 마음을 읽을 수 있어서 자존심만으로는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리라는 것이 명확했다. 가서 벚꽃을 보고, 작년에는 내 옆에 서있던 그 사람이 이젠 없는 걸 내 눈으로 확인하고 스스로를 납득시킨 뒤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긴 편지를 썼다. 나는 사실 아직까지도 너를 못 잊었었는데 이제는 보낼 준비가 된 것 같다고.

 

그 문자를 보내니까 답장이 왔다. 다시 한 번 만날 수 없겠냐는 문자가. 그리고 나서 다시 만난 사람은 내가 작년에 기억하던 사람이 아니었다. 생각보다 조금 더 불안해 보이고, 생각보다 조금 더 불행해 보이고, 그 사람의 아파트는 내가 기억하던 것보다 좁았고, 차는 생각했던 것보다 낡아 있었다. 그래도 내 마음은 그대로였다. 어쩌면 나는 작년에 잃었던 것을 복구하고 싶었는지도. 마음을 다 주지 못해서 이번에 만은 다 줘보리라 불태워 버리리라 싶었을지도. 그래도 나는 좋은 사랑만 주었다. 지난 사랑에게서 몰랐지만 그동안 배웠고 그들에게 못해줬던 것들을 전부 쏟아부었다. 운이 없어 한 번도 좋은 방식으로 사랑받지 못했던, 나와 닮은 영혼을 지닌 사람에게, 세상에 딱 한 사람이라도 너를 진정으로 보호하고, 너의 안녕만을 위하고, 너를 있는 그대로 보는 사람이 존재한다고 알려주고 싶었다. 그냥 사랑을 있는 그대로 전달해주고 싶었다. 

 

다시 만난 사람은 한달여 만에, 배신으로 끝을 맺었다. 나는 이 이상은 사랑으로 아플 수 없을 만큼 최대한 아팠고, 그 사람은 나를 부서뜨렸다. 나는 다 부서져서 다른 사랑이 아니면 극복할 수 없어서, 평생 이야기 하지 않던 아빠에게 전화를 하고, 엄마에게도 전화를 하고, 좋아했지만 딱히 친하지는 않았던 친구들에게 연락을 하고, 십년지기인 친구에게도 에스오에스를 치고, 친했지만 이제는 소원해진 친구에게도 에스오에스를 쳤다.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뭐 사실은 내가 좋은 사람이어서겠지만, 정말 운이 좋게도 좋은 사람들이 주변에 잔뜩 있었고, 작은 한 숟가락 씩의 도움으로 조금씩 회복했다. 아직도 회복하는 중이다. 

 

언제나 나는 남는다. 아무리 부서져도 부서진 내가 남고, 내가 포기하지 않으면 나는 복구된다. 사람은 가장 취약할 때에야 진심으로 다른 사람에게 손을 뻗는다. 좋은 사람을 알아보는 눈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운이 조금 따라준다면 가장 큰 부서짐을 가장 큰 반짝임으로 재조립할 수 있다. 나는 내가 부서질 것을 모르고 이것에 들어왔지만 어떤 일이 생겨도 내가 결국에는 괜찮을 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무엇을 할 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이 무엇이든 내가 나를 좋게 만들 선택을 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나는 부서졌지만 부서진 것이 부끄럽지 않다. 나 대로 살지 않는 것이 더 부끄러운 일임을 알기 때문에. 나는 배신당했지만 그것은 내가 멍청해서 혹은 잘못된 선택을 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나 답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기 때문에 그 길을 알면서도 걸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내가 좋다. 그래서 또 살아가고 또 믿을 수 있다. 

 

언제나 내가 나 다웠다는 것, 그것이 가장 취약한 곳에서 사랑을 갈구하는 우리를 지키는 유일한 위로이자 정의이다. 



작가의 이전글 사랑에 관한 에세이 2 - 다정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