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필라델피아에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오후 9시 쯤 노숙자로 알려진 가해자 피스턴 노이가 피해 여성 옆에 앉으며 시작된 이 사건은 여러 승객이 그 공격의 일부 과정을 목격하는 동안 성폭행은 서서히 진행되었습니다.
이 여성은 노이가 바지를 찢는 동안에도 수차례 밀어내며 약 45분간 강하게 저항했지만, 점차 강도를 높여 공격적인 행동을 이어 가면서, 45분이 지난 후 끔찍한 강간이 시작됐습니다.
정답은 하나도 아니었습니다. 단 한 사람도 피해자를 돕지 않았습니다. 교통국의 CCTV를 보면 그날 저녁 통근 열차에 타고 있던 승객 중 몇 명은 실제로 전화기에 손을 갖다 댔습니다.
하지만 911에 전화는 하지 않았고, CCTV에는 두 명의 승객이 스마트폰을 범행 현장 쪽으로 두고 촬영하는 장면이 담겨 있었습니다.
승객들이 휴대전화를 들고 있었지만
911에 접수된 신고는 없었다.
왜 그들은 신고조차 하지 않고, 자신의 휴대폰에 촬영하기에 급급했을까요? 어떤 마음으로 신고가 아닌 촬영을 택한 걸까요?
도서 <손 안에 갇힌 사람들> 에서는 사람들의 추악한 본성이 도파민과 만나 극단으로 이룬 사례라고 설명합니다.
출처 : 『손 안에 갇힌 사람들』 中
지역 경찰서장이었던 티머시 번하트Timothy Bernhardt는 누군가가 개입했다면 피해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언론에 말했다. “이 여성을 돕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섬뜩함을 느낍니다. 그 기차에 탔던 사람들은 거울을 보고 왜 그 일에 개입하지 않았는지, 왜 무언가를 하지 않았는지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대체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우리는 다정하고 착한 종이었다. 그렇지 않은가?
필라델피아의 이 사건은 수십 년 전 뉴욕에서 일어난 또 다른 ‘나쁜 사마리아인’ 사건과 일부 유사한 특징이 있다. 바로 악명 높은 키티 제노비스Kitty Genovese 강간 및 살인 사건이다. 1964년 웨이트리스로 일하던 28살의 키티 제노비스는 교대 근무를 마치고 퀸스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던 중, 그녀를 미행하던 한 남자에게 공격을 당했다. 이 사건을 당시 전국민적인 이야기로 만든 것은 키티 제노비스가 절박하게 도움을 요청하는 소리를 듣고도 관심을 보이지 않은 다수의 이웃이었다. 그는 거의 한 시간에 걸쳐 칼에 찔리고, 강간당하고, 살해당했다. 많은 이웃이 나중에 경찰에 말한 바에 따르면, 그들이 비명 소리에 잠에서 깨고도 경찰에 신고하지 않은 이유는 다른 사람이 신고할 거라고 생각해서였다. 그러니 관여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불을 끄고 침대로 돌아가서 한 젊은 여자의 생명이 서서히 꺼지는 동안 다시 잠을 청할 수밖에.
처음에 언론은 키티 제노비스가 살해당할 때 38명의 목격자가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이후에 기자들은 실제 목격자 수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아마 키티 제노비스가 살해당하는 동안 훨씬 더 많은 사람이 그 오싹한 비명을 들었을 거라고 보도했다. 또한 원래 보고서에서 빠진 사실이 있는데, 실제로는 소피아 패러Sophia Farrar라는 여성이 비명 소리가 나는 곳으로 달려가 제노비스를 도우려 했다. 안타깝게도 너무 늦게 도착했지만, 패러는 제노비스가 죽을 때 함께 있어줄 수 있었다.
키티 제노비스 사건과
필라델피아 열차 강간 사건의 유사점
끔찍한 사건이긴 했으나 2021년 필라델피아 열차 강간 사건과 몇 가지 분명한 유사점이 있다. 적어도 그러한 범행을 목격하거나 들은 제노비스의 이웃들은 그 장면을 찍기 위해 카메라를 들진 않았다. 우리는 스스로 물어야 한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무서워서 그렇든 무관심해서 그렇든 만약 우리가 형편없고 나쁜 사마리아인이 되어, 공격받고 있는 여성을 돕고 싶지 않다고 해도, 좀 비열하긴 하지만 그 “연루되지 않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경향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영상을 찍는 건 뭔가? 왜 그 끔찍한 사건을 기록하려 전화기에 손을 뻗는가?
동료 하나가 흥미로운 설명을 내놓았다. 21세기 미국에서 휴대폰은 우리의 목발이고 애착 담요다. 우리는 지루하고, 불안하고, 혹은 무서울 때 반사적으로 휴대폰에 손을 뻗는다. 그렇다면 그 기차에 탄 사람들은 강압적인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 즉 휴대폰을 만지는 것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또 하나, 현실을 직시해보자. 지금 우리는 모든 것을 기념하는 데 집착한다. 우리는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려 모든 것을 기념한다. 예를 들면 우리의 저녁 식사, 창문에서 바라본 풍경, 셀 수 없이 많은 아이들, 그리고 통근 열차에서의 강간 같은 것들이다. 영화 「트루먼 쇼」 같은 우리의 리얼리티 TV 세계에서는 삶의 좋고 나쁘고 추악한 모든 면이 촬영되어야만 할 것 같다. 지나치게 디지털화된 지금, 어떤 것에 대한 전자적 기록이 없으면 마치 그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가 무관심해진 이유는 아주 기본적이고 단순한 것일 수도 있다. 우리는 일상에서 끊임없이 쏟아지는 폭력적인 이미지에 너무 둔감해져서 이제 매일의 고통과 폭력을 그저 일종의 오락물로… 사자에게 먹이로 던져진 기독교인을 보듯 본다. 또한 우리는 관음적 오락의 강도를 조금씩 높여 가면서 도덕적 나침반도 잃어버리게 되었다. 가령 방송국 간부인 내 친구는 사형 집행을 생중계할 수 있을지를 대놓고 궁금해했다. 이는 한 때 디스토피아 SF의 영역이었지만, 이제 거기까지 가는 데는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강간 촬영에 대한 내 최종적인 생각은 이렇다. 우리는 자동차 사고가 나면 늘 목을 길게 빼고 둘러봤고, 거리에서 싸움이 나면 가던 길을 멈추고 구경했다. 고등학생들은 싸움이 일어나면 신이 나서 현장을 빙 둘러싸고 싸움 난 아이들을 향해 살기등등하게 “싸워라! 싸워라!”를 외친다. 안타깝게도 이것이 우리 인간 본성의 밑바탕이다.
도파민의 노예가 된
비인간화 아바타들
우리는 아이들이 아드레날린을 분출하는 야만적인 이드 단계를 지나도록 키워 왔다. 그런데 유치한 비디오 게임을 통해 대부분 남성에게 영속적인 사춘기 현상이 나타나면서 유감이지만 지금 우리 사회에는 매우 미성숙한 어린 성인이 생겼다. 도파민을 분비시키는 것이라면 뭐든 찍어 올리는 멍하고 둔한 사람들 말이다. 그 고통 받은 여성은 그들에게 그저 영상으로 올릴 비인간화된 아바타였을지 모른다.
출처 : 도서 『손 안에 갇힌 사람들』
* 휴대폰에 갇힌 인간 본성의 밑바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