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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름이 Aug 22. 2023

옛날 미국 떠돌이들의 문자가 21세기로 왔다

출처 : 도서 『슈퍼 사이트』



1930년대 초 대공황이 발발하자 수백만의 미국 시민이 일자리와 농장, 집을 잃고 거리로 내몰렸다. 이 떠돌이들은 서로를 돕기 위해 자신들만의 독특한 언어를 개발해서 소통했다. 그들은 집의 기둥, 담벼락, 벽면 같은 곳에 호보 마크hobo mark(떠돌이의 기호라는 뜻)를 남겼다. 이 기호들은 오늘날에도 종종 찾아볼 수 있다.



떠돌이들의 문자 '호보 마크'




마치 상형문자처럼 생긴 이 언어는 어느 집의 주인이 친절한 여성인지 또는 성미 고약한 남자인지, 위험한 집인지 아니면 하룻밤을 보낼 수 있는 안전한 곳인지, 또는 음식을 제공하는 일거리가 있는 집인지 등을 의미하는 일련의 기호들로 이루어져 있다. 가령 역삼각형 모양의 기호는 다른 떠돌이들이 이곳에 왔었다는 뜻이고, 삼각형에 모자가 씌워져 있는 기호는 집주인이 부자라는 의미다. 이 기호들은 집 없는 사람들을 의사나, 하룻밤 묵을 곳이나, 다음번 식사를 할 수 있는 장소로 안내하는 역할을 했다. 말하자면 눈앞의 풍경 위에 ‘지식을 덧입히는’ 행위였다. 그들이 기둥에 기호를 새기는 데 필요한 도구는 주머니칼이 전부였다.



호보 마크



호보 마크의 놀라운 점은 이 기호들이 지속적이고, 상징적이고, 암호화되고, 구체적인 현실을 반영하는 방식으로 정보를 부호화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일종의 공간적 지식 공유 시스템spatialized knowledge sharing system이었다. 현대인들은 증강현실 기술 덕분에 남들이 식별할 수 있는 디지털 호보 마크를 세상 어디에나 남길 수 있다.


2019년 여름, 나는 혁신 리더들을 대상으로 열린 콘퍼런스에서 워크숍 강좌를 맡았다. 이때 참가자 전원에게 다음과 같은 숙제를 냈다. 먼저 그들의 스마트폰에 월드 브러시World Brush라는 앱을 설치하게 했다(이 앱은 현재 서비스가 중단됐다). 이 앱을 사용하면 세상 어느 곳이든 가상의 기호를 남기고 스마트폰 카메라로 그 기호를 볼 수 있다.


월드 브러시 앱 화면



이 기호들은 물리적인 장소에 부착해서 다른 사용자들과 공유하게끔 되어있기 때문에, 월드 브러시 앱을 설치한 사람들은 해당 장소를 지나갈 때 스마트폰으로 그 기호를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반경 600미터의 지도에 표시된 모든 기호를 한꺼번에 확인할 수도 있다. 나는 워크숍 참석자들에게 이 앱을 사용해서 주위의 아무 곳에나 증강현실 기호를 남겨 보라고 말했다. 이 행사가 열린 난터켓섬은 시내 중심부의 넓이가 여섯 블록에 불과했기 때문에, 워크숍 참가자들이 이곳에서 며칠을 지내면서 동료들이 남긴 기호들을 발견할 확률은 매우 높았다.


난터켓섬의 레스토랑에 남겨진 증강현실 호보 마크



그러자 모두가 거리로 나가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기호를 남기기 시작했다. 가령 그들이 근사한 레스토랑을 찾아내면 그곳에 기호를 표시했다.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만일 당신이 이곳을 방문했을 때 친구에게 맛있는 식당이나 재미있는 일을 알려달라고 요청하기보다, 월드 브러시 앱을 켜서 남들이 추천한 훌륭한 식당이나 매장들에 대한 평가를 별점의 형태로 확인할 수 있다면 어떨까?



21세기로 온 호보 마크



이렇게 월드 브러시로 작업을 진행하다 보니 디자인 및 데이터 정책과 관련된 의문들이 하나씩 생겨났다. 가령 이 기호들은 얼마나 오랫동안 남아있어야 할까? 워크숍은 반나절 동안 진행됐고 참가자들은 이 섬에서 하루나 이틀 정도 더 묵을 예정이었다. 그들은 자신이 남긴 기호가 다음 해 여름까지 남기를 바랄까? 또 다른 의문점은 그 기호를 볼 수 있는 사람이 누구냐 하는 문제였다. 워크숍 참가자 20명은 당연히 동료가 남긴 기호들을 보고 싶어 하겠지만, 이 기호나 별점들은 난터켓섬을 방문하는 다른 관광객들에게도 공개되어야 할까? 아니면 이곳에서 살아가는 현지인들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좌절감을 느끼게 할 뿐일까? 이 기호들은 언제까지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언제가 되면 가상의 낙서로 전락해 버릴까?





신경과학자 보 로토Beau Lotto는 트레이시스Traces라는 지역 기반의 메시징 시스템을 개발해서 이런 디자인상의 의문점을 상당 부분 해소했다. 트레이시스의 사용자는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오직 특정 장소 안에서 문자, 음성, 이미지 등의 형태로 메모를 남길 수 있다. 따라서 그 메모를 볼 수 있는 것은 그 장소를 직접 방문한 사람뿐이다.


traces 구현 모습



사용자는 그 메시지가 얼마나 오래 남아있을지(한 시간, 하루, 1년), 그리고 누가 이를 볼 수 있는지(특정 회사 직원들 또는 세상의 모든 사람) 직접 설정할 수 있다. 가령 강의가 진행 중인 회의실 문에 초청 강사를 소개하는 트레이스 메모를 부착해서 나중에 도착하는 참석자들에게 보여주거나, 이탈리아 레스토랑에 추천을 글을 남김으로써 이곳을 방문하는 친구들이 맛있는 티라미수 케이크를 맛보게 할 수 있다. 주위의 세계에 이렇게 숨겨진 메모를 남기는 행위는 마치 스파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우리에게 짜릿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표시를 세상에 남기는 기술은 수많은 업무에서 요긴하게 활용할 수 있다. 가령 엔지니어들은 기계나 도구 위에 사용 설명서를 남기고, 점검이 필요한 사항이나 수리 이력 등을 첨부하는 용도로 이를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가상의 기호 중에는 ‘주의! 고압 전류가 흐르고 있음’ 같은 경고 문구처럼 그곳에 영원히 남아야 하는 표시가 있는 반면, 당신이 응급 서비스 전화를 걸 때 참조하려고 임시로 기록한 메모도 있을 수 있다. 이런 메시지는 당신이 떠나는 순간 사라진다. 누가 해당 메모를 볼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설정하는 기능은 업무에도 도움이 된다. 발전소에서 처음 일하게 된 신입 직원들은 경험 많은 직원들에 비해 상세한 업무 지침서를 더 많이 접할 필요가 있다.



traces 구현 모습



이처럼 슈퍼사이트는 사물의 사용법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제품에 녹여 넣고 사용자가 이를 필요로 하는 정도와 시점에 따라 그 지식을 적재적소에 전달함으로써 수많은 상황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출처 : 도서  『슈퍼 사이트』


https://url.kr/vjpkx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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