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었다는 이유만으로 고문 당한 책

역사는 움직이는 것

by 나름이

1100만 명이 관람한 영화 <변호인>은 1980년대 있었던 부림사건에서 모티브를 따온 영화입니다.

1980년대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은 집권 초기에 통치 기반을 확보하고 민주화운동 세력을 탄압하고자 당시 사회과학 독서 모임을 하던 사람들을 불법적으로 체포한 뒤, 구타하고 고문을 가했습니다. 이 안타까운 사건이 바로 부림사건인데요.

영화 〈변호인〉에서 국밥집 아들은 독서 모임을 하다가 잡혀갑니다. 이 학생이 읽다가 잡혀간 그 문제의 책이 바로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입니다.


도대체 『역사란 무엇인가』에는 어떤 내용이 들어 있기에 그렇게 된 걸까요?


201312060600273280_l.jpg 영화 <변호인> 중 한 장면



『역사란 무엇인가』를 읽기 전, 저는 이 책이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다’라는 이 글의 핵심 결론이 이미 너무나 유명했기 때문이었죠. 그런데 『역사란 무엇인가』를 읽고 난 다음에는 그렇게 생각한 제가 아주 부끄러워졌습니다. 상당히 어려운 책이어서 쉽게 이해하기 어려웠거든요.


『역사란 무엇인가』는 6장으로 나누어진 책인데요, 사실 처음부터 책으로 쓰인 것은 아니었어요. 케임브리지대학에서 강연했던 내용을 묶어 책으로 만든 거죠. 그래서 그의 논의는 점층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unnamed.jpg




일반적인 서술의 기승전결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읽는 사람 입장에서는 상당히 난해하다는 인상을 받기 쉽습니다. 중심을 잃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쭉 따라가는 것이 조금 어렵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천천히 잘 읽었다고 생각하지만 머릿속에 개연성이 잘 안 잡힙니다. 그래서 기계적으로 정리해볼 필요가 있어요. 한눈에 볼 수 있도록 각 장의 핵심 내용을 간추려 볼까요.





1장 역사가와 사실

역사에는 역사가의 해석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


2장 사회와 개인

역사를 연구하기 전에 역사가는 개인이면서 사회와 역사의 산물이므로, 그의 시대를 연구해야 한다. 역사는 사회와 사회의 대화이기 때문이다.


3장 역사와 과학과 도덕

역사의 방법론은 과학의 방법론과 유사하다.


4장 역사에 있어서의 인과관계

역사는 미래를 위한 것이다. 역사를 연구할 때는 ‘어디로?’도 중요한 문제다.


5장 진보로서의 역사

역사의 방향은 인간 세계의 완성이라는 진보로 향하게 되어 있다.


6장 넓혀지는 지평선

이성을 확대해 역사 밖에 있던 집단과 계급을 역사 안으로 불러들이는 것이 역사가의 역할이다.




『역사란 무엇인가』를 읽고 저는 ‘역사는 단순한 직선 인식이 아니라 입체적 인식’이라는 느낌이 막연히 떠올랐습니다.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다”라는 말도 그래서 의미가 있는 거죠. 지나가서 다시는 오지 않을 시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상호연결되어 지금 시대에도 영향을 주는 사건을 바라보는 것이 역사이니까요. 그러니까 지금 현 시점의 상황에 따라 과거가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unnamed_(1).jpg MBC 드라마 <대장금>



예를 들어 살펴볼까요? 이영애가 주연을 맡아 유명한 드라마 〈대장금〉은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이야기 중 의녀 대장금에 관한 이야기에 기반을 둡니다. 여기에 살을 붙여 만든 드라마죠. 이것은 실록에 있기 때문에 기록된 사실입니다. 하지만 1970~1990년대 이른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남성 중심 사회였을 때는 이 기록이 크게 조명 받지 못했습니다. 역사 역시 왕을 중심으로 서술되었죠.


그런데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역사 서술에 미시사적인 바람이 불어 왕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았던 백성들의 이야기가 각광받기 시작하고, 여성의 지위와 사회 참여도가 높아지는 분위기가 형성됩니다. 그리고 비로소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이 사실은 현대인들에게 조명되어 눈앞에 역사적 사실로 나타나게 됩니다. 여성의 사회적 위치를 존중하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대장금〉은 히트하게 된 것입니다.

이게 바로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E. H. 카의 저작이 나오기까지 역사는 과거의 사실 자체로 존재하므로 변하지 않는 것이라는 인식이 강했는데 E. H. 카의 저작 이후로 역사는 사회에 따라 언제든지 해석과 초점을 달리할 수 있는 가변적인 것이 되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E. H. 카는 시대와 그에 따른 요구에 따라 역사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는 관점을 “역사는 움직이는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역사는 움직이는 것


2808081_230.jpg



앞서 언급했듯이 1980년대에 『역사란 무엇인가』는 가방 안에서 발견되기만 해도 잡혀가야 했던 불온서적이었습니다. 1982년 이 책을 읽었다가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았던 당시의 대학생이 2014년 32년 만에 열린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판사가 이런 말을 했어요. “과거 권위주의 정권 시대에 사법부가 가혹 행위에도 눈감고 인권의 마지막 보루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한 점에 대해 깊이 사과드립니다.” 사법부 역시 시대 상황에 맞게 판결을 내린 것이지요.


1980년대에는 읽기만 해도 잡혀가 죽을 위험에까지 처하게 했던 책이, 지금은 대학생들에게 추천되는 책으로 그러나 너무 어려워 죽어도 읽기 싫은 책으로 인식되고 있으니 그야말로 『역사란 무엇인가』 자체가 E. H. 카의 이야기를 증명하는 가장 명징한 증거가 아닐까 싶어요. 시대에 따라 같은 책도 다르게 받아들여진 것이니까요.




참고 도서 :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