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과 본질 사이
시가 지향하는 모방이란
세상사의 진리와는 전혀 관련이 없고,
말이나 앞세우는 시인은
불특정 다수 선량한 시민들의
이성적 사고체계를 파괴할 뿐이다.
본성과 진리에서 멀어진 채
구름 잡는 놀이나 하는 시인은
애초부터 열등한 존재이기에,
그들이 구술 혹은, 서술하는 시는
후세를 모범적인 시민으로 성장케 하는 데
어떠한 도움도 주지 못한다.
플라톤의 <국가> 중 일부입니다. 시인을 열등하며, 시민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로 표현했는데요.
어떤 사연이 있나 싶을 정도로 과격해 보입니다. 도대체 플라톤은 시인을 왜 그렇게 싫어했을까요?
『국가』는 플라톤의 저작 중 가장 유명한 책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소크라테스가 주인공으로 나오죠. 사실 소크라테스는 실제로 남긴 저작이 하나도 없고요, 이렇게나마 플라톤의 저작에서 만나볼 수 있어요. 『국가』의 화자는 소크라테스이지만 이는 등장인물일 뿐이고, 책의 모든 내용은 플라톤의 생각을 바탕으로 합니다.
플라톤이 제시하는 올바른 국가를 간단하게 정리하면 ‘각자 잘하는 직분을 맡아 서로 넘보지 않고 분수를 지키며 자신의 직분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파생되는 아주 중요한 논의가 ‘철인 정치론’입니다. 통치하는 직분은 철학자가 맡아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철학자가 통치자가 되어야 한다는 철인 정치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먼저 짚어볼 필요가 있어요. 이데아는 사물의 본질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난 어제 책상에 올라가 춤을 추었어요”라고 하면 책상의 모습이 상상되잖아요. 하지만 각자 상상하는 책상의 모습은 다 다를 겁니다. 그래도 책상이라는 단어에서 전해지는 기본 개념은 전달되죠. 그것이 바로 책상의 이데아입니다. 현실의 책상은 이런 개념적 책상의 모방에 불과한, 그저 현실 형태일 뿐이에요. 그 모방한 것을 다시 모방한 그림이나 글은 플라톤이 보기에 저열하고 열등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래서 플라톤은 시인들이 괜히 사람의 정신만 홀린다며 ‘시인 추방론’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철학자가 통치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니 철학자를 찌질하고 괴짜 같은 소리나 하는 사람들이라고 치부하던 사람들이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비판하자 이를 반박하기 위해 동굴의 비유가 등장합니다.
동굴만 보도록 고개가 고정된 사람들은 동굴 밖의 실제 물건들을 그림자로만 접하게 됩니다. 이때 실제 물건들은 이데아, 그림자는 모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굴 안의 사람들에게 이데아는 없고 그것의 모방만이 진실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우연히 동굴 밖으로 나와서 태양과 실제 사물들을 보게 된 사람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철학자들인데요, 이 사람들이 다시 동굴 안으로 들어가 “사실 새는 그런 모양이 아니라 원래는 이렇다”라고 설명해줘봤자 동굴 안의 사람들에게는 씨도 안 먹힌다는 거예요. 동굴 안의 사람들은 그림자를 실제 그 사물로 인식하고 있으니까요. 마찬가지로 철학자가 아무리 “이상적인 국가는 이래야 돼”라고 설명해줘봤자 동굴 안의 사람들이 그 말을 이해할 수 없고, 오히려 진실한 철학자들을 이상한 말이나 하는 괴짜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고 플라톤은 설명합니다.
아주 논리적인 이유를 들어 철인 정치론을 주장하는 것 같지만 현 시대에서 이것을 읽고 있는 저에게는 자신의 주장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향한 플라톤의 고급 조롱처럼 느껴지는데요. 이 말을 직설적으로 풀어보면 “본질을 모르는 너희가 얘기하는 건 모두 허상일 뿐이야. 본질을 얘기해봤자 너희가 알 수나 있겠어?”와 같은 말이지요.
정리해보면 플라톤의 『국가』에서 이야기하는 정의로운 국가, 그러니까 이상적인 국가는 ‘철학적 소양이 있는 군주 아래에서 개개인이 자신의 직분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국가’입니다. 나라의 의무는 국민들에게 그런 삶을 보장해주는 것이며, 국민의 의무는 다른 일이나 계급을 넘보지 않고 자신이 맡은 직무를 성실하게 수행하는 것입니다.
비록 제목이 『국가』이긴 하지만, 이 책의 의문은 결국 어떤 사람이 정의로운 사람이냐는 것이었으니, 사람 역시 이렇게 조화가 잘 갖추어진 인간이 정의로운 인간이라는 말로 결론을 낼 수 있습니다.
참고 도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