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2017년 08월 19일. 함께 여행했던 수경 언니와 하나언니가 한국으로 떠나는 날. 함께 한국으로 돌아가야 될 것 같은데 우리에겐 한국행 비행기가 아니라 모스크바로 떠나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 표 2장만 있을 뿐. 내가 한 마디 하면 세 마디로 돌아오던 대답이 다시 하나가 됐다는 사실에 외로워졌고, 떠나고 나서야 느낄 수 있는 사람의 향기가 그리움처럼 오래도록 코끝을 찡하게 했다. 숙소에 들러 짐을 정리하고 다른 숙소로 옮겼다. 핸드폰에 남겨진 잔여 배터리 7%쯤 된다고 말할 수 있겠다. 딱 지금 우리 상태가. 선명했던 화면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충전이 필요하다.
해양공원에서 아르바트 거리로 걷고 있는데 저 멀리 풍선이 바람결 따라 춤추고 있었고 주위에는 많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분명 충전할 수 있는 콘센트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아르바트 중앙 거리에서 포토그래퍼들의 사진을 줄에 걸어두고 마음에 드는 사진이 있으면 가져가거나 교환하는 사진전이 열리고 있었다. 두 말할 것 없이 혜원이와 나는 구글 지도를 열어 가장 가까운 사진관을 찾았다. 영어권이 아닌 러시아에서 언어의 벽이 높음을 매일 깨닫게 되는데 오늘도 마찬가지다. 도와주세요 구글씨.
- 원하는 사진을 여기 메일로 보내줘. 사진 하나에 한 장씩? 사이즈는? 오케이, 20분 기다려.
컴퓨터 화면에 구글 번역기를 열어 영어에서 러시아어로 몇 번의 키보드를 주고받으며 마침내 우리는 인화를 할 수 있었다. 인화된 사진 뒷면에는 사진에 대한 짧은 글을 남겼고 곧장 아르바트 거리로 나갔다. 혜원이가 빨리 걷는 이유는 딱 두 가지다. 처음 가는 길을 찾을 때와 재미있는 무언가를 발견했을 때. 혜원이 걸음이 빨라졌고 뒤 따라 걷는 내 심장은 그 걸음에 맞춰 빠르게 뛰고 있었다.
입구에서 사진을 걸 수 있는 집게를 사진 장수에 맞춰 쥐어들고는 다른 이들의 길게 늘어진 추억 속에 우리를 걸었다. 빈자리를 찾으며 천천히 우리 추억으로 채워나갔고 걸어 놓기 바쁘게 사람들은 사진을 가져가기 시작했다. 저 멀리서 한 남학생이 내 사진 앞에 멈췄다. 그리고 내 사진이 그의 손에 닿았다. 떨리는 마음으로 그에게 다가가 사진 한 장을 요청했다. 내 사진을 들고 있는 그를 보면서 고맙고 뿌듯한 마음도 있었지만 사실 더 고맙고 뭉클했던 건 그가 입고 있던 티셔츠 오른쪽 팔에 박혀 있던 태극기였다.
8월의 어느 오후. 아르바트 거리 사진전. 그들이 전해주는 사진의 감정은 무심한 듯 툭 - 찍은 사진처럼 보였지만 절대 가볍지 않았고, 온전히 있는 그대로 사진 속의 생각과 느낌을 전달할 수 있다면 영어가 내리지 않는 이 땅에서 서로 다른 언어에 얽매일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늘 소금물로 갈증을 해소하듯 무료한 여행에서 오늘은 목마르지 않았다.
<사진전 사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