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단다 Jun 16. 2020

나는 이곳에 없다

그 거짓말

12년 전 이맘때, 요코하마 변두리의 작은 파칭코에서 환전을 해주고 있었다. 손바닥만한 가건물 안에 틀어박혀서 히터를 쬐며 칩을 현금으로 바꿔주는 일이었다.


거래(?)는 작은 쪽창으로만 이뤄졌다. 쪽창으로 손이 불쑥 들어와 칩을 두고 사라지면, 맞는 액수만큼의 현금을 내어주면 되는 일이었다. 사람 얼굴 볼 일이 없는 일자리였다. 잘은 모르지만 법적으로도 변두리에 위치한 일이었기에, 대부분 아주머니들이 하는 일이었다.



그때로 말하자면, 겨울 하면 뒤따르는 단어가 왕국보다는 연가였던 시절이었다. 서가에는 겨울연가나 가을동화 같은 한국 드라마의 비디오테이프가 빽빽이 꽂혀 있었다. 일본 아주머니의 한드 사랑이 뉴스를 타던 시절이었다.



나는 드라마를 고루하고 유치하다고 생각하던 파였기에 보지 않았다. 그래도 쪽방에 앉아 하루종일 드라마를 보는 삶을 이해한다고 생각했다. 얼굴 볼 일 없는 일, 그렇게나마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그랬던 내가 최근 드라마에 빠진 것 같다. 실은 말 걸고 싶은 사람이 재밌어하는 드라마가 있다기에 명분이나 만들어 볼 요량이었는데, 빌어먹을, 너무 재밌는 거다. 잠이 안 올 때 한편 보면서 마시는 맥주 내지 소주 한 잔이 소확행이다. 나는 모름지기 스스로를 취하게 만드는 데는 프로다.



살짝 알딸딸해진 채 보고 있으면 마치 내가 이곳에 없는 것 같다. 현실 속에 모나고 못난 모습은 사라지고, 이야기만 남는다. 나와 이야기가 있던 자리에 이야기만 남는다. 나는 사라진다. 사라지고 싶다고 오래토록 바라왔다. 그래서 본다. 대리만족이 아니다. 대리 그 자체다.



이제사 이해가 간다. 요코하마 변두리 그 작은 쪽방의 빽빽했던 비디오 테이프는 사람을 보려는 증거가 아니었다고. 오히려 사람을 보지 않으려는 수단이었으리라. 눈보다 빠르다는 손으로 환전을 해주면서, 실제 눈은 배용준과 최지우를 보며, "나는 이곳에 없다." "나는 이곳에 없다."

매거진의 이전글 제스프리의 자격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