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LE BREAKER 24. 미네르바스쿨(Minerva Schools)
어릴 적 TV에서 보던 만화. '2020년 우주의 원더키디' 속 까마득해서 상상도 안되던 2020년이 와버렸다. 현실은 원더키디 주인공 아이캔처럼 아빠를 되찾기 위해 우주의 악당과 싸움을 벌여야 하는 시대는 아니다. 그러나 AI와 특이점과 맞서야 하는 시대의 아젠다는 만화 속 세계만큼 광활하고 울적하다.
특이점이란 '인공지능이 비약적으로 발전해 인간의 지능을 뛰어넘는 기점'을 뜻한다. 알파고를 개발한 구글의 기술이사 레이먼드 커즈와일은 '특이점이 온다'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놀랍게도 이 책은 2005년에 쓰였다.) 책을 통해 커즈와일은 2045년이면 인공지능이 인간 지능의 총합을 뛰어넘을 것이며, 통제할 수 없는 위험 지점이 올 수도 있다 전망했다.
인공지능은 2020년 가장 주요한 화두일 것으로 보인다. 오늘부로 우리나라는 인공지능 예산 1조 5천억을 배정했다는 뉴스가 보인다. 샤오미도 신년 서신을 통해 2020년 인공지능 및 관련 분야에 8조 3천억 원을 투자하겠다 밝혔다 한다. 'AI! AI! AI!'라는 외침의 주인공인 소프트뱅크의 손정의 회장, 뉴럴 링크를 설립하고 AI와 경쟁할 수 있는 뇌를 꿈꾸는 일론 머스크까지. 2020년의 전후로 돈과 기술이 AI를 중심으로 자리 잡는 움직임이 구체화되고 있다.
AI. 그 음절만으로도 디스토피아적 상상력이 본능처럼 사람을 졸아붙게 한다. 겨루기도 전에 완패일 것 같은 직감. 알파고와 (심지어 최근 한돌과 다시 한번) 대국하던 이세돌의 심정을 헤아려보게 된다. 그리고 그가 주는 감동을 전부 다 느끼기도 전에, 이제 평범하게 살던 우리 차례가 온다.
세상의 많은 인사와 문헌은 AI의 정보처리 속도를 따라갈 수 없는 인간은 현재 같은 교육을 버리고, 고유의 영역을 개척하라고 경고한다. 오늘 룰브레이커의 주인공인 '미네르바 스쿨'은 AI 시대의 교육 해법을 찾아간다. 정말 인간만이 할 수 있는 무언가를 길러내기 위한 대학교. 철학만 기존 대학의 공식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설립부터 운영까지 기존 대학과 비슷한 건 하나도 없다.
미네르바 스쿨은 수학능력을 평가하는 표준화된 입시 성적은 취급하지 않는다. 창의력, 논리력, 표현력 등 6가지 부문에 시험을 본다. 정답이 없다는 면에서 프랑스식 바칼로레아와 유사하기도 하다. 정원은 매우 적으며, 입학 후에는 세계 7 도시에 있는 기숙사를 순환하며 생활한다. 세계의 다양한 문화와 사고방식, 당면과제를 직접 경험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캠퍼스는 없다. 모든 수업은 온라인이며, 토론식이고, 상시평가제로 운영된다. 영화 킹스맨 같은데서나 보던 정예요원을 길러내는 과정 같다는 느낌이 든다.
이 실험적인, 그러나 대단히 설득력 있는 교육 혁신은 벤 넬슨의 제안으로 설립됐다. 높은 학비, 스포츠팀 운영 같은 고상한 문화, 거대한 캠퍼스 등을 운영하느라 정작 교육이 시대에 발맞추지 못하는 것들을 해결해보고자 한 것. 미네르바 스쿨은 스타트업처럼 투자를 받아 만들어졌는데, 트위터/드롭박스/스냅챗 등에 투자한 벤치마크캐피털이 290억 정도를 초기 투자했다. 설립에는 스티븐 코슬린 전 하버드대 사회과학 대학장, 비키 챈들러 전 오바마 대통령 과학정책자문위원 등이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네르바 스쿨의 1년 학비는 교재비와 생활비를 포함하여 3천만 원. 1년 학비와 생활비의 합이 억 단위에 이르는 아이비리그의 무거운 상아탑이 이 시대의 흐름을 담아낸 산뜻한 교육 혁신에 흔들린다. 하버드를 포기하고, 미네르바 스쿨을 선택하는 학생들의 이야기가 속속 이어지고 있다. 하버드를 나와서는 AI와 경쟁해야 할지도 모르는 이 세상을 살아가기에 창의력과 상상력이 충분하지 않다는 판단 때문일 것이다.
2020년 우주의 원더 키디 건, AI의 특이점이건. 결국에는 살아내야 하는 시간. 스마트폰과 IoT로 모든 것이 점점 연결되어 가지만, 역설적으로 고립의 무게가 더해진 세상. 안타깝게도 변화도 고립도 사람이 본능적으로 싫어하는 감정이다.
필연적으로 우리는 예전보다 삶이 더 불안하고 힘겹다고 느낀다. 새해가 밝았지만, 기쁨보다도 매일을 살아가야 하는 무게감이 더 크다. 매 순간이 안간힘이고, 발버둥인 삶. 우리의 모든 순간은 사람으로 산다는 것이 전제이며,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지향점을 향한다.
그래서일까. 레트로 유행을 이어 진짜 옛날 방식으로 삶을 방향과 생각을 되짚어보는 흐름이 곳곳에 보인다. 독서모임으로 대표되는 살롱 문화, 고전 필독서를 읽어주고 토론하는 TV 프로그램, 자기 집으로 공통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을 초대하는 플랫폼 서비스까지. (특히 온라인으로 불특정 다수를 집으로 초대하는 프로그램은 정말 놀랍다)
미네르바 스쿨도 개개인도 저마다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사람다울 수 있는 삶과 희망을 닮은 무언가를 위해 노력 중이다. 늘 그랬듯이, 우리는 답을 찾을 것이다. 그래서 별 의미 없다, 같은 매일의 연속 일뿐이다 말하면서도. 새해의 룰 브레이커즈는 미네르바 스쿨로 시작하고 싶었나 보다.
* 참고
레이쥔 CEO “10주년 샤오미…5G, 인공지능, 사물인터넷에 8.3조 투자한다” (플래텀 | 2020-01-03)
[Interview] 벤 넬슨 미네르바스쿨 창립자 “올해 첫 졸업생들 진로, 아이비리그도 못 낼 성과”(이코노미조선 | 2019-05-06)
[시선+] 서울대 포기하고 미네르바스쿨 간다…'스카이캐슬' 들어가도 받아적기만 (한국경제 | 2019-0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