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7. 중력을 닮은 인간관계의 법칙
"주희야, 나 그냥 전화했어. 그냥 퇴근길이 너무 헛헛해서. 그냥 아무 말이나 하고 싶네."
8시 반쯤 걸려온 전화. 어설픈 야근으로 8시쯤 퇴근해서 집에 가는 길이라 했다. 지하철이 6~7시 사이보다는 덜 붐벼 좋지만, 마음이 다 말라비틀어진 화분 같다고 푸념했다. 나도 안다. 저런 야근이 세상에서 제일 짜증 난다는 걸.
내일로 미루기에는 좀 불안 불안한 일. 6시부터 시작해서 7시면 마칠 수 있을 줄 알았던 일. 근데 시작하고 보니, 8시쯤에야 끝난 일. 저녁 약속을 잡기에도 애매한 시간이고, 이미 배고픈 시간도 지났다. 뭘 새롭게 만들어 하기에는 마땅하지 않은 몸과 마음의 에너지. 집에 가서 혼자 넷플릭스나 유튜브나 봐야지 하며 지하철에 올라 이어폰을 끼고 멍하니 있다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아, 오늘 하루도 별 게 없네-'하는 염증.
친구는 오늘 회사에서 받았던 황당한 전화, 동료가 점심시간에 들려준 이야기, 세일하고 있는데 살까 말까 고민되는 원피스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고맙다 한다.
"주희야, 내 아무 말 대잔치 들어줘서 고마워. 맨날 전화하려고 보면 너 밖에 없다? 나 원래 친구가 그렇게 많은 건 아니었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너랑 몇 번 같이 봤던 소진이랑 하나도 지금은 인스타로 근황은 아는데, 사실 매일 연락하거나 선뜻 전화하거나 그게 어렵더라."
소진이는 출장이 많아, 언제 한국에 있는지 알기 어렵다. 하나는 아이를 낳아, 육아에 매진 중이다. 각자의 인생의 트랙에서 열심히 전투 중이다. 친구는 지하철에서 내린다며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걸어온 친구는 윤아다. 20대 초반에는 줄곧 붙어 다녔는데, 아무런 이유 없이 연락이 소원해졌었다. 30대 초반에 다시 연락이 닿아, 아직까지도 매일같이 연락한다. 주고받는 이야기에는 별 알맹이는 없다. 어제 '나 혼자 산다'를 봤냐, 새로 생긴 카페 가보고 싶다, 치킨을 먹을까 엽떡을 먹을까 같은 이야기다. 사실, 누구와도 할 수 있는 이야기다. 하지만 선뜻 편하게 나눌 사람이 없는 그런 이야기.
"8년 만이죠? 그동안 잘 지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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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지막으로 본 게 경리단길에서였지? 반갑다, 야. 너 요즘 프리랜서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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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희랑 이렇게 같이 일을 하게 되다니, 너무 신기한걸. 요즘 거의 1주일마다 한 번씩은 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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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지냈어? 오랜만인데도 그제 만났던 것 같다! 너 요즘 재밌게 살더라?"
회사를 그만두고, 탈회사형인간으로 살아보기를 선언하자 연락이 쏟아졌다. 퇴사하면 몇 있는 친구들 외에 동료들과도 멀어지고 그나마 있던 인간관계도 다 부실해지고, 세상에 혼자 남은 기분이 될 것 같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몇 년 만에 만난 반가운 얼굴이 1달 새 10명이 넘는다. 회사를 다닐 때는 팀원이나 옆 부서 동료들 보느라 꽉 차 있던 내 인간관계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매일 보던 사람을 1~2달에 한 번씩 보게 되고, 1년에 1번 보던 사람이 1주일에 1번씩 만나는 사이가 되었다. 어떤 이는 10년 만에 한 번쯤 보는 사이가 되기도 하겠지. 나도 그들에게. 그들도 나에게.
우리는 살면서 이런 변화를 가끔 마주한다. 인간관계의 지축이 크게 흔들리는 듯한 혼란과 함께. 무슨 이야기든 곧잘 통했던 자주 보던 친구와 특별히 다투거나 오해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문득 소원해져 있는 것. 가끔은 이런 변화가 뭉텅이로 나타나, 마음에 큰 구멍이 뚫린다. 반대로 얼굴 정도는 알고 지냈지만 특별히 친분이 없던 사이가 자주 보고 연락하는 사이가 되기도 한다.
회사를 그만두고 나타난 이런 변화에서 발견한 사실이 있다. 인간관계는 마치 중력을 닮았다. 저마다 자기만의 우주의 한가운데에 서있다. 그리고 거기서 비슷한 방향으로 회전하고 나아가는 사람들끼리 '끌어당겨' 서로 만난다. 각자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들끼리 서로 만나고, 그 방향이 다를 때는 다시 헤어졌다가, 또 먼 훗날 만나기도 하고 다시는 못 만나기도 한다.
놀랍게도 인간관계는 나의 현재 마음 상태와 가장 닮은 세상을 살고 있는 사람을 끌어당긴다. 내가 탈회사형인간으로 살기를 자처하자, 어디서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갑자기 창업자/프리터/프리랜서들을 알게 됐다. 내가 퇴사를 알리자, 퇴사하고 지내는 다양한 사람들이 내 소식을 들었다며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내게 위로가 되어주고, 자기만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응원을 건네어줬다. 대화 중에 알게 된 내 관심사를 더 잘 아는 지인을 기꺼이 소개해줬다. 더 자주 보는 사람들이 몇몇 새로이 생겨났다. 내 관심, 의욕, 하고 싶은 것에 따라 새로운 만남을 타고 새로운 기회들도 찾아왔다. 그렇게 매일매일이 새롭게 채워지고, 새로운 인간관계의 파도 속으로 나도 모르게 밀려들어갔다.
지금 전화를 걸어,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나눌 사람이 없어도 괜찮다. 시답지 않은 이야기는 내가 현재 진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알아줄 사람과 나누고 싶은 법이다. 내가 진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너무 복잡할 때는, 내 마음을 꼭 다 알아줄 사람이 없을 수도 있는 것이다.
내 마음과 의욕과 방향이 분명할 때, 누군가는 내 삶 속으로 기꺼이 끌어당겨져 들어온다. 그들은 언제 봤냐는 것과 상관없이 내 옆에 다정히 앉아 위로와 응원을 건네고, 소소한 대화도 재미있게 나와 나누어 줄 것이다. 그리고 서로의 방향이 달라지는 날에는 다시 또 살짝 떠나 있다가 언젠가 필요로 할 때 다시 내 옆자리로 다가올 것이다. 나도 그들에게. 그들도 나에게.
누가 뭐래도 세상의 중심은 나입니다. 지하철에서 내 옆자리에 앉은 사람도 그의 우주를 가지고 있을 테고요. 우리는 저마다의 방향으로 향합니다. 그러다가 방향이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면 친구, 지인, 인맥, 인간관계- 그게 무엇이든지 교류하며 지내게 되는 듯합니다. 회사만 다닐 때는 제 방향이 늘 한 곳으로 흐르다가, 제가 이것저것 해보려고 하니까 그 방향마다 저를 기다렸다는 듯 알게 되는 사람을 만나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됐어요.
요즘 인간관계에 대해, '끼리끼리'라는 말이 진리처럼 통용되더라구요. 끼리끼리 어울린다는 것은 그 사실 자체로는 맞는 말일 수 있습니다. 현재의 사고방식, 나가고자 하는 방향이 맞는 사람들일 테니까요. 하지만 그걸로 한 사람의 수준을 단정 짓는 듯한 시선은 조금 안타깝습니다.
내가 지금 당장 금요일 밤 전화해서 불러낼 친구가 없다고 해서, 나에게 전화는 오지만 내가 그들을 만나기가 특별히 내키지 않는다고 해서- 그런 인간관계의 상태가 나의 '수준'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지금 어디론가 나아갈지 고민하는, 내 마음의 방향이 분명하지 않을 때는 내 주변에 사람이 없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없어 외롭고 헛헛하다면 그건 내가 아직 뭔가를 망설이거나, 혼자서 생각할 거리가 남아있기 때문일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누가 뭐래도 우주의 중심에는 내가 서있고, 내 마음속에 담긴 생각대로 날 도와줄 사람들이 찾아오게 되어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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