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헬스를 안 다녔더니 추운 겨울에도 조금씩 녹아내리는 근육을 느꼈다. 부쩍 무거워진 몸을 가다듬자는 마음에 조금 더 욕심을 보태서 홈트레이닝 턱걸이를 방에 들이기로 했다. 이 덩치 큰 운동기구가 많은 공간을 차지하기 때문에 방안에 모든 배치를 엎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결연한 마음으로 집으로 곧장 달려와 침대와 책장을 옮겼다. 주인의 작심삼일을 수없이 지켜보았던 책장은 또 한 번의 호들갑에 속이 거북했는지 책을 다 토해냈다. 구입해놓고 오랜 시간 보지 않은 많은 책들이 그제야 눈에 보인다. 특히나 두껍고 어려워 보이는 고전들은 거의 손이 닿지 않아 처음 모습 그대로였다. '반드시 읽으리라' 굳은 다짐으로 책꽂이에 모셔왔건만 이 책들은 왜 이토록 읽히지 않았던 것일까..? 책장의 시원한 구토는 나를 향한 질책이었다. 뾰로롱~ 철봉의 고수가 되겠다는 큰 꿈을 안고 방으로 들인 턱걸이가 갑자기 거대한 옷걸이로 보이는 마법이었다.
이 시대의 우리는 바쁘다. 대단한 걸 하는 것도 아닌데도 그냥 매일이 바쁘다. 이런 일상 속에서 독서라는 것은 바쁜 출근길, 그날따라 유난히 정성껏 차려놓은 엄마의 아침상이며 그것들을 무시하고 현관문을 나서는 나의 뒤통수에 꽂히는 성가신 잔소리다. 학업과 취업에 매달린, 회사에서조차 끊임없는 스펙을 쌓아야 하는 우리에게 책을 읽는다는 것은 시간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부담이며 오히려 사치에 가까운 일이다.
몸에 좋은 걸 알면서도 먹기는 번거로운 약재들처럼 회사와 학교라는 스트레스의 바다에서 온종일 허우적거려 가뜩이나 피곤한 우리에게 건강을 위해 해야 한다는 운동이니 명상이니 독서, 글쓰기 등의 몸에 좋다는 것들은 죄다 쓰고 괴롭다. 그리고 그것들을 챙겨 먹기에는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인생의 쓴맛들이 너무 많다. 그렇게 책장에 가지런히 꽂혀있는 서적들은 주인을 잘못 만난 탓에 장롱 속에 오랫동안 박혀있던 환약들처럼 쓴 속을 달래며 세월을 견디고 있었다.
이런 씁쓸한 현실에서 단숨에 삼키기 간편하고 영양이 빠르게 흡수되는 종합 비타민 같은 책 읽기라면 부담 없이 손을 뻗어 즐길 수 있지 않을까?
'메신저가 오면 연락을 하고, 쓸 만한 애플리케이션을 다운로드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또 사진을 찍어 SNS에 올려야 한다. 잠자는 시간 빼고는 거의 모든 시간을 스마트폰과 컴퓨터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지내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책을 읽을 시간도 없을뿐더러,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나 중국의 고전 사상, 셰익스피어의 희곡이 대체 무슨 도움이 되는지 의아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고전을 읽는 것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바로 고전을 읽으면서 자신을 복잡한 현실로부터 떼어놓을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스스로 생각한다고 믿고 있지만, 대부분은 유행하는 것들을 비판 없이 곧이 독대로 받아들이며 살아간다. 유행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뉴스 등을 통해 시대의 분위기에 흠뻑 빠지고, 이미 굳은 이미지에 의존해 살아가는 게 현실이다.'
- '세상에서 가장 빠른 고전 읽기' 들어가는 말 中 -
온라인과 오프라인 할 거 없이 요즈음 서점을 둘러보면 현대인의 라이프스타일에 맞춘 출판계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다양해지고 활발해졌다는 걸 알 수 있다. 그중에서도 내가 읽고 싶었지만 읽지 않았던 고전들을 다룬, 위즈덤하우스에서 기획한 '세상에서 가장 빠른 고전 읽기'라는 책은 간지러운 곳을 벅벅 긁어주는 시원한 책이었다.
이 책은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음직한 120권의 불멸의 명작(사실 나는 처음 들어본 책들도 어마하게 많았다.)을 한두 페이지에 그 줄거리와 핵심 내용을 축약시켜 놓은 고전 교양 집인데, 출근길에 입으로 떠먹여 주는 영양 가득한 한 숟갈. 바로 지금 우리의 비지한 하루에 딱 맞춤 기획이다. 하지만 아마추어 태클러인 나는 슬쩍 발을 걸어본다. 생각의 깊이가 상당한 고전의 그 많은 내용들을 어떻게 한 페이지에 축약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었다.
목차
제목들만 봐도 억 소리가 나는 책들이 수두룩했지만 분야 카테고리로 나열해 단숨에 느낌적인 느낌을 전달했다. 이 목차 페이지를 보기만 해도 고전에 대한 부담감을 크게 덜어지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둥글둥글하고 아기자기한 폰트로 '고전'이라는 단어에 담긴 상투적이고 딱딱할 것 같은 고정관념을 허무는, 편집자의 마술 같은 감각이 돋보인다. 아마추어 태클러는 발길질은커녕 박수를 보내며 시작했다.
2시간이면 머리에 쏙! (책 표지에 쓰여있는 문구)
나는 책을 볼 때 오래 걸린다. 만화책을 볼 때도 남들보다 두 배, 세 배는 더 걸린다. 생각을 깊게 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는데 애초부터 내 머리가 그렇게 생겨먹은 모양이다. 앞뒤 상황을 그려보다가 공상에 잠기고 삼천포로 곧잘 빠지는 유형이다. 하지만 진도가 빨리 나가지 않아도 좋다. 어차피 책 읽기에 정답은 없으며 독자마다 얻어 가는 것도 제각각이니! 그렇게 이 책은 두 시간 만에 읽을 수 있다는 표지 문구와는 달리 독서 늘보인 나에게 흥미로운 효과를 안겨주었다.
'세상에서 가장 빠른 고전 읽기' 중, 돈키호테 수록 페이지
한두 페이지에 실린 고전문학들은 줄거리 하나만으로도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의 작품들이었다. 괜히 불멸의 명작들이 아니었다. 간단한 설명에 이어서 그림으로 볼 수 있는 스토리의 흐름이 책 모든 구석구석을 조명하고 있지 않아도 충분한 울림을 주기에 두 시간 만에 끝내기는커녕 오히려 아껴보고 싶은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림들 옆에 번호와 함께 붙어있는 자잘한 내용들만 읽어도 머릿속에선 끊임없이 필름이 뽑혀 나오는데, 짧은 글귀와 이미지만으로도 진득한 영화 한 편을 보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전반적인 스토리를 지탱하는 핵심 내용들이 큰 자갈이라면 빈 공간을 채워주는 자잘한 모래들의 이야기는 나의 상상으로 채워져 특별한 작품이 되었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도스토옙스키의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 년 동안의 고독'등의 도저히 읽을 엄두를 못 내는 엄청난 두께의 대작들을 보도사 편집부의 기획과 구성으로 단 하룻밤에 만날 수 있는데, 무엇보다 잘 읽히고 재미있다. 다만 상상을 좋아하는 독서 늘보에겐 비극이든 희극이든 묵직한 대작들의 결과를 스포 하는 것이 아쉽기도 하였지만 탓할 수가 없다. 이 책이 아니었다면 이 세상 떠날때까지 몰랐을 이야기였을 수있다. 인정해야 했다.
어렵지 않고 편하고 가볍게 명작들을 즐길 수 있다는 본질적인 유익 말고도 넓고 얇은 교양의 지식을 갖출 수 있다는 점에서 효과가 커 보이는 책이다. 시간 대비 가격 대비 남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지적인 매력은 우리 입맛에 안 맞을 수가 없다.
수록된 고전들을 온전히 하나씩 읽어보고 싶게 만드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책'을읽는 즐거움과 친해지게 하는 것이 이 책의 진짜 꿈이자 바램이다.
현대의 출판계가 쓰고 괴로운 독서가 아닌 영양이 응축된 달큼한 종합 비타민 같은 책 문화를 만들어가는 것은 바쁜 밀레니얼 세대를 향한 당부의 외침이다. 물론 책 말고도 영상, 사진 미디어와 SNS를 통한 지식 콘텐츠를 어디서든 접하는 세대이지만 젊은이들이 점점 책과 멀어진다는 것은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잃어간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런 흐물거리는 사회의 미래에는 희망이 없다.
'세상에서 가장 빠른 고전 읽기'처럼 생각의 단련장으로 이끌어주는 친절하고 편안한 길잡이 역할의 책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독자들은 이런 책들을 통해 알통이 생기는 재미와 보람을 느끼고 점점 더 깊이 있는 양서들을 탐독해 나갈 것이다. 독서모임 말고도 강연이나 강의 등 다양한 지적 소통의 마당이 살아 숨 쉬고, 직접 눈으로 보고 만지는 감각체험을 활용한 오프라인 서점이 항상 인기 있는 것은 젊은이들의 지식문화에 대한 힘과 욕망이 결코 작지 않다는 것을 방증하며, 읽히고 논해지길 원하는 모든 책들의 꿈과 소망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믿음을 낳는다.
책을 다 덮고 나서 온라인 중고서점에 접속해 강렬하게 끌렸던 '돈키호테'를 냉큼 주문했다. 속을 게웠던 책장이 나를 또다시 비웃지만 종합 비타민을 먹은 탓일까? 오늘만큼은 뻔뻔해지는 자신감을 느낀다.
* 이 책은 성장판 서평단 2기의 활동으로 출판사의 책 지원을 받았습니다. 서평은 저의 주관적인 감상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