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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FT explorer 허마일 Apr 22. 2020

예술적 세신사를 찾습니다.

#브런치 #에세이 #글쓰기 #평론에대하여 #서평같은에세이 #예술이란정녕이런것인가요? #예술의세신사


 사실 나는 이 글을 쓰고 싶어서 어제 피드에 위 책에 대한 짧은 리뷰를 올렸던 것이다. 우선 이번 11회 젊은 작가상 수상집에 대상작으로 수록된 강화길 작가의 작품, ‘음복’에 대한 평론을 서문에 인용하며 얘기해보자. 


 스릴러는 일반적으로 앎과 모름이라는 인지의 시차를 이용하여 공포감을 자극하고, 그 기울기 조정을 통해 쾌락을 구성해나가는 장르다. 그리고 그 인지의 시차가 단지 객관적인 시각 차이가 아니라 성을 근간으로 한 권력의 차이임을 밝힐 때, 스릴러 장르의 문법은 여성주의 인식론과 결합한다. 가부장제의 핵심 상징 제의인 제사를 묘사한 이 소설에서 긴장감을 조성하는 축은 여성 인물들은 모든 걸 훤히 아는데 남성 인물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태를 촉발시킨 가족 내 성 기율이다. 

- 강화길의 ‘음복’ (제11회 젊은 작가상, 대상작)에 대한 평론, 오은교 -


 이런 수상작품집은 작가들의 내밀한 노트를 보는 것도 물론 매력 있지만, 작품 세계에 대한 해석과 의미를 면밀히 분석해주는 평론에 나는 흠뻑 빠져들게 된다. 오 맞아! 와.. 대박! 진짜 이거였다고? 레알!? 워매 소름…!! 속으로 소리를 지르게 만드는 평론가들의 분석은 매번 멋들어지게 현학적이어서 아득한 현기증을 선사해주지만 무겁게 눌어붙은 무지의 때들을 벅벅 긁어줘서 시원하기까지 하다. 그렇게 세신의 환희가 끝나고 나면 내가 접한 작품은 눈부신 날개를 달고 저 위에 떠있는 경이로운 존재가 돼있는 것이다. 앗.. 아아.. 가닿을 수 없는 문학의 위대함이라니… 


 생각해보면 이것은 문학에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음악, 음식, 미술, 영화, 드라마 등 창조적인 활동이라면 모두 해당한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을 예로 들어보자. 영화에 대한 현란한 평론들은 관객이 미처 가늠하지 못했던 부분들을 조명해줌으로 창조자와 소비자 모두 감동과 즐거움을 함께 누릴 수 있게 만든다.

 봉 감독이 디테일의 왕, 봉테일이라 불리는 것은 작품 곳곳에 숨어 있던 자잘한 이스터 에그들을 전 세계 관객들이 서로 공유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렇게 관객 모두가 자유롭게 사유하고 해석하는 평론가가 되어 서로가 서로에게 소름을 전이시키며 영화 기생충은 날개를 달고 빛이 되었다. 물론 천재적인 봉 감독님은 고것이 아니었어도 이미 계획이 다 있으셨겠지 말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나는 이런 웃긴 상상도 해본다. 평론가들이 작품 속 내밀한 묘사, 온갖 사물과 인물들의 대사에서 족집게처럼 집어내는 의미 요소들 전부를 작가가 의도해 심은 일이었을까? 작가가 자신의 작품에 대한 평론을 보면서 본인도 몰랐던 디테일에 소름 돋는 경험은 없는 것일까? 


 지금은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지만, 열정적으로 글을 쓰던 때가 있었다. 당시 나름 마스터피스라 뿌듯해하며 에세이 한 꼭지를 완성했다. 사실 내용은 별거 없었다. 다섯 살 때, 이사 간 처음으로 낯선 교회에 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만난 아이들과의 이야기였다. 긴 테이블 위에서 땅으로 점프하면서 노는 또래들과 어울리고 싶어서 피지컬이 딸리는 나 역시 점프에 도전하는… 겁쟁이의 성장기쯤 되겠다.(문학적인 표현을 매우 의식하면서 상황과 사실들을 나열해나간 글이었는데, 글 말미에는 생뚱맞게 어떤 설교풍에 메시지로 잔뜩 힘이 들어가 있다. 순진무구한 다섯 살짜리의 고백에서 갑자기 목사님이 튀어나오는 이질감에 지금도 나는 그 글을 퇴고하지 못하고 있다.)


 그때 그 글을 왜 그리 자랑하고 싶었는지... 맞춤법을 확인하는 정도로 깃털처럼 가벼운 1차 퇴고를 마친 그날로 당장,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어 안달이 난 것이다. 오 마이 갓. 내 손가락은 오므라들어 키보드를 누를 수가 없어.(이 브런치에 있습니다. 아 절대 보지 마세요. 제목은 '배트맨이라고 안 쫄 릴까?'인데요. 절대 보지 마시라고 알려드립니다.) 하지만 바로 그날 밤, 문학적 감성을 나누는 오픈 채팅방에서 ‘요요’라는 닉네임을 쓰는 한 명의 평론가(쓰고, 읽는 것을 사랑하는 일반인입니다.)가 나타나 내 글에 대한 상세하고 치밀한 피드백을 해주었던 것이다.


 나는 그때의 얼떨떨함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분의 훌륭한 평론에 따르자면, 내가 떠났던 이사는 현실로부터의 도피이며, 교회에서 헌금을 하지 않은 것은 자본주의 체계에 대한 저항을 말하고 또래 아이들과 어울리고 싶던 마음은 지금의 세상을 거부하면서도 놓을 수 없는 욕망을 뜻하는 것이었다. 점프 직전 테이블 위에서 덜덜 떨었던 내 다리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이 시대 청춘의 아픔과 갈등이었으며, 땅으로의 낙하는 생으로의 포기를 말하는데, 이 생은 또 생물학적 생명을 뜻하는 것이 아니며 서열과 계급으로 얼룩진 위계사회 속 굴종의 삶이라는… 

 아니 선생님! 어디 계시다 이제야 나타나셨나이까!...ㅠㅠ


그 후로도 한참이나 이어지는 통찰과 이스터에그의 향연… 부활절이로구나!! 

아니 봉 감독님 보고 있나요? 제 글이 이렇대요. 이게 저랍니다.

내 글은 시대 고발적이면서도 공동체를 추구하는 따듯한 시각이 묻어나는 수작으로 판명난 것입니다. 


 ‘정말 글을 잘 쓰시네요. 보면서 놀라웠습니다. 이런 글을 쓰실 수 있다는 것이 부럽네요. 많이 배워갑니다. 감사합니다.’

 빛의 평론가는 마지막 인사말까지 젠틀했다. 나는 감격에 겨워… 감사의 표현으로 별박스 아메리카노 톨 사이즈 기프티콘으로라도 보내드리려 했으나. 자본주의에 굴종한 삶이라니… 현실과 작품의 맥을 같게 하기 위해(예술의 완성 아닙니까) 보내지 않았다. 


 나는 그날 밤 분명히 내 등딱지에 움찔거리는 날개, 내가 지닌 예술 감성을 맛본 것이다. 나조차 몰랐던, 전혀 예상 못했던 디테일을 가득 머금은 내 글은 이제 작품이라 부를 수 있었다. 브런치에서 곧 연락이 오겠군, 출판사가 겹치면 어디랑 출판 계약을 해야 될까? 음, 싸인도 좀 연습해둬야지… 역시 아티스트 삶이란 피곤하구먼.


 잔뜩 예술 뽕 맛에 취한 어느 날, 소그룹으로 모여서 진행되는 4주 차 짜리 글쓰기 강의에 참여하게 되었다. 몇 주간 진행되었던 과제 수행, 현장 실기를 보자니 나는 분명히 뛰어난 학생은 아니었다. 아니 그냥 떨어지는 학생이었다. 15분, 20분 내에 주어지는 즉흥 글쓰기에선 매번 몇 글자 못 적었고 나름 힘주어 숙제해간 과제물은 딱 봐도 다른 학생들에 비해 정성이 부족해 보였다. 하지만 이런 초라한 입지에도 내 근자감은 넘치고 있었다. 분명 근거 있는 자신감. 선생님, 저는 세상을 깊이 바라보는 렌즈를 달고 있다고요. 즉흥 글쓰기는 별로예요. 생각은 묵히고 묵힐수록 좋은 글이 나오지요. 허허허.

 마지막 주차 때였다. 내 실력을 보여주고자 벼르고 벼르던 중, 선생님께 피드백 요청을 명분으로 나의 마스터피스를 꺼내 든 것이다. 문장의 매끄러움을 위해 몇 글자 조금 손보긴 했지만 역시 수작은 많이 건들면 아니 되는 것. 선생님께 글을 띄운 노트북을 내밀며 침을 삼켰다. 얼마나 놀라운 반응, 날개를 펄럭이는 참문학을 만난 선생님의 눈빛은 어떨까. 나는 벌써 기대와 설렘을 넘어 혼자 하늘을 날고 있었다. 


 당신의 학인을 대하는 선생님의 태도는 언제나 따듯하고 친절했다. 내 글에 대한 세세한 조언과 평가를 내릴 때도 옅은 미소와 상냥함을 잃지 않았다. 하지만 그 내용은 참혹했다. 맥락에 어긋난 과한 표현, 흐름을 흐트러뜨리는 사족, 의미를 바꿔버린 황당한 비문, 시제 불일치, 도무지 이해 안 되는 상황과 설정, 갑자기 생뚱맞게 날아온 마지막 문단.

 손에 땀이 흥건했다. 잡아두려 했던 동공도 사정없이 흔들렸다. 내 글에 묻어있던 그 깊은 세계는 어디로 갔을까? 자본주의와 위계사회를 향한 처절한 저항정신은 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이란 말이냐.


 집에 오는 길, 많은 생각에 잠겨 운전을 어떻게 한지도 모르겠다. 도착하자마자 단톡 방에서 그분을 찾았다. 

 '요요님 계신가요?! 저번에 제 글 피드백해주셨는데.. 계신가요? 요요님!…'

 그렇게 날카롭고 눈부셨던 평론가는, 튀어나왔다 이내 집에 들어가 버린 요요처럼 카톡방에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예술이 지닌 이 어딘가 우스꽝스러운 성질은 여전히 나를 간지럽히지만, 독자들이 자유롭게 뛰어놀 수 있는 울타리, 사유와 울림의 공간을 만드는 창조자의 능력을, 그리고 나는 나의 울타리에 선생님을 초대하지 못했음을 명백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평론가 역시 함께 노는 독자에 속하지만 자신들의 공간에서 제각기 뛰어노는 이들을 이끌고 노는 방법을 알려주는 사람이라 할 수 있겠다. 마치 긴 테이블에서 점프 뛰는 방법과 놀이를 제시해주는… 지적인 슈퍼 인싸.

 허술하고 너저분한 내 글에도 사람들을 초대해 인도해줄 인싸, 묵은 때로 꼬질한 내 문장에 생명을 불어넣어 줄 예술적 세신사를 나는 또 만날 수 있을까? 요요님 어디 갔어요…? 보고 싶어요… 흑흑


아파요 ㅠㅠ 살살 ㅠㅠ!

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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