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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실인데 왜 임대료는 안 내릴까?


길을 걷다 보면 ‘임대 문의’ 간판이 몇 달째 붙어 있는 상가를 종종 마주친다.
사람이 오가지 않는 구석진 자리도 아닌데, 희한하게도 임대료는 그대로다.

이럴 땐 한 가지 의문이 든다.
‘가격만 좀 깎으면 바로 나갈 것 같은데 왜 안 깎지?’
‘비어 있는 것보다 싼값에라도 세를 주는 게 낫지 않나?’

하지만 현실 부동산 시장은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다.
공실을 그냥 두는 것도 일종의 전략일 수 있기 때문이다.


1. “깎느니 비워두겠다”는 계산법

상가를 가진 건물주는 단순히 '이번 달 임대료’만 보지 않는다.
그들은 임대료를 ‘건물 가치의 기준점’으로 본다.

한 번 임대료를 내리면, 그 가격이 다음 계약의 기준이 된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기존 세입자들이다.
“저 호실은 더 싸게 받던데요?”라는 말이 들어오는 순간, 전체 건물의 수익 구조가 흔들릴 수 있다.

그래서 건물주는 차라리 공실을 감수하고라도 기준 가격을 지키려 한다.
한 달 비는 건 버틸 수 있지만, 임대료는 깎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결국, 가격을 내리는 건 ‘지금 돈이 급한 사람’이 하는 것이고, ‘버틸 여유가 있는 사람’은 기준선 자체를 무너뜨리지 않는다.


2. 임대료는 곧 대출의 지표

이제 건물주의 속사정을 조금 더 들여다보자.
상가 건물은 대체로 전액 현금으로 사지 않는다. 보통 매매가의 절반 이상을 은행 대출로 충당한다.

그럼 은행은 ‘이 건물이 매달 얼마를 벌어들이느냐’을 보고 돈을 빌려준다.
즉, 임대료 수익이 곧 신용 등급이 되는 셈이다.

가령 어떤 상가가 월 1,000만 원의 임대료를 받고 있다고 하자.
그걸 기준으로 은행은 “이 정도 수익이 있으니 대출 이자 갚을 수 있겠군” 하고 판단해 대출을 승인한다.

그런데 공실이 생겨도, 건물주는 기존 임대료 수준을 유지한 채 ‘새 세입자를 기다리는 것’이 유리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가격이 대출의 신용 기준이기 때문이다.

만약 급하게 계약을 하느라 기존보다 30% 저렴하게 임대를 내주면 은행은 그 낮아진 임대료를 ‘새 기준’으로 삼아 “건물 가치가 하락했다”고 판단할 수 있다.

그러면 대출 조건을 다시 조정하거나, 추가 담보를 요구할 수도 있다.

즉, 공실 상태는 단기적으로는 손해처럼 보여도, 장기적으로는 대출 리스크를 관리하는 방패가 되기도 한다.


3. 공실은 손해일까? 때론 세금 전략이다

공실이면 당연히 수익이 없고 손해일 것 같지만, 실제로는 공실이 오히려 유리한 경우도 있다.
바로 세금 문제 때문이다.

건물주가 임대사업자로 등록되어 있다면, 임대소득에 대해 종합소득세 또는 분리과세를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이 소득은 세금의 크기를 좌우하는 매우 민감한 변수다.

예를 들어, 세입자가 들어와도 수익이 거의 없고, 반대로 수리비나 관리비, 감가상각 등 비용 처리할 항목이 많다면, 오히려 ‘적자’로 처리해 절세가 가능해진다.

또한, 소득이 일정 기준을 넘으면 종합소득세율이 급격히 뛰기 때문에, 소득 자체를 줄이는 게 세금 관리에 유리할 수 있다.

게다가 임대료를 깎았을 때, 실제 수익은 줄었는데도 기준시가로 세금을 부과받는 일이 생기면 '장사도 안 되는데 세금은 똑같이 내는' 이상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이런 경우 건물주는 이렇게 판단한다.
‘세입자 하나 받느라 소득은 늘지도 않는데, 세금과 행정비용만 더 들겠구나. 그럴 바엔 그냥 비워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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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실을 채워 넣는 사람은 누구인가


싸다고 들어간 상가에서 낡은 벽지를 새로 바르고, SNS에 어울리는 간판을 달고, 유행에 맞는 메뉴를 고르고, 사람들의 발걸음을 불러모은 이들은 결국 누구였을까?

상권을 다시 숨 쉬게 만든 건 임차인이었지만, 그 상권이 살아난 이후의 이익은 대부분 건물주와 상가주인에게로 흘러간다.이것이 대한민국 상권의 젠트리피케이션 공식이다.


상권이 살아나는 순간, 임대료는 오르고, 그 자리를 지켜온 가게들은 쫓겨난다.

결국 우리는 누군가의 열정과 시도가 부동산 가치 상승의 사다리로 이용되는 구조 안에 있다.

그렇다면 공실 문제도 젠트리피케이션도, '가격'만의 문제가 아니다.
어떻게 상권을 함께 키우고, 그 이익을 함께 나눌 수 있을 것인가라는 구조의 문제다.

실질적인 장기임대료 안정 장치, 예측 가능한 계약 갱신 제도 없이 ‘임대료는 안 내리고, 공실은 방치하고, 상권이 살아나면 다시 쫓아내는’ 구조가 반복된다면, 우리 도시는 결국 지속가능하지 않은 싸움터로 남을 수밖에 없다.


상권을 살리는 건 임대료가 아니라 사람이다.
그 사람을 지키지 못한다면,
어떤 가격도 결국 비어 있는 공간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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