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걷다 보면 ‘임대 문의’ 간판이 몇 달째 붙어 있는 상가를 종종 마주친다.
사람이 오가지 않는 구석진 자리도 아닌데, 희한하게도 임대료는 그대로다.
이럴 땐 한 가지 의문이 든다.
‘가격만 좀 깎으면 바로 나갈 것 같은데 왜 안 깎지?’
‘비어 있는 것보다 싼값에라도 세를 주는 게 낫지 않나?’
하지만 현실 부동산 시장은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다.
공실을 그냥 두는 것도 일종의 전략일 수 있기 때문이다.
상가를 가진 건물주는 단순히 '이번 달 임대료’만 보지 않는다.
그들은 임대료를 ‘건물 가치의 기준점’으로 본다.
한 번 임대료를 내리면, 그 가격이 다음 계약의 기준이 된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기존 세입자들이다.
“저 호실은 더 싸게 받던데요?”라는 말이 들어오는 순간, 전체 건물의 수익 구조가 흔들릴 수 있다.
그래서 건물주는 차라리 공실을 감수하고라도 기준 가격을 지키려 한다.
“한 달 비는 건 버틸 수 있지만, 임대료는 깎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결국, 가격을 내리는 건 ‘지금 돈이 급한 사람’이 하는 것이고, ‘버틸 여유가 있는 사람’은 기준선 자체를 무너뜨리지 않는다.
이제 건물주의 속사정을 조금 더 들여다보자.
상가 건물은 대체로 전액 현금으로 사지 않는다. 보통 매매가의 절반 이상을 은행 대출로 충당한다.
그럼 은행은 ‘이 건물이 매달 얼마를 벌어들이느냐’을 보고 돈을 빌려준다.
즉, 임대료 수익이 곧 신용 등급이 되는 셈이다.
가령 어떤 상가가 월 1,000만 원의 임대료를 받고 있다고 하자.
그걸 기준으로 은행은 “이 정도 수익이 있으니 대출 이자 갚을 수 있겠군” 하고 판단해 대출을 승인한다.
그런데 공실이 생겨도, 건물주는 기존 임대료 수준을 유지한 채 ‘새 세입자를 기다리는 것’이 유리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가격이 대출의 신용 기준이기 때문이다.
만약 급하게 계약을 하느라 기존보다 30% 저렴하게 임대를 내주면 은행은 그 낮아진 임대료를 ‘새 기준’으로 삼아 “건물 가치가 하락했다”고 판단할 수 있다.
그러면 대출 조건을 다시 조정하거나, 추가 담보를 요구할 수도 있다.
즉, 공실 상태는 단기적으로는 손해처럼 보여도, 장기적으로는 대출 리스크를 관리하는 방패가 되기도 한다.
공실이면 당연히 수익이 없고 손해일 것 같지만, 실제로는 공실이 오히려 유리한 경우도 있다.
바로 세금 문제 때문이다.
건물주가 임대사업자로 등록되어 있다면, 임대소득에 대해 종합소득세 또는 분리과세를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이 소득은 세금의 크기를 좌우하는 매우 민감한 변수다.
예를 들어, 세입자가 들어와도 수익이 거의 없고, 반대로 수리비나 관리비, 감가상각 등 비용 처리할 항목이 많다면, 오히려 ‘적자’로 처리해 절세가 가능해진다.
또한, 소득이 일정 기준을 넘으면 종합소득세율이 급격히 뛰기 때문에, 소득 자체를 줄이는 게 세금 관리에 유리할 수 있다.
게다가 임대료를 깎았을 때, 실제 수익은 줄었는데도 기준시가로 세금을 부과받는 일이 생기면 '장사도 안 되는데 세금은 똑같이 내는' 이상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이런 경우 건물주는 이렇게 판단한다.
‘세입자 하나 받느라 소득은 늘지도 않는데, 세금과 행정비용만 더 들겠구나. 그럴 바엔 그냥 비워두자.’
싸다고 들어간 상가에서 낡은 벽지를 새로 바르고, SNS에 어울리는 간판을 달고, 유행에 맞는 메뉴를 고르고, 사람들의 발걸음을 불러모은 이들은 결국 누구였을까?
상권을 다시 숨 쉬게 만든 건 임차인이었지만, 그 상권이 살아난 이후의 이익은 대부분 건물주와 상가주인에게로 흘러간다.이것이 대한민국 상권의 젠트리피케이션 공식이다.
상권이 살아나는 순간, 임대료는 오르고, 그 자리를 지켜온 가게들은 쫓겨난다.
결국 우리는 누군가의 열정과 시도가 부동산 가치 상승의 사다리로 이용되는 구조 안에 있다.
그렇다면 공실 문제도 젠트리피케이션도, '가격'만의 문제가 아니다.
어떻게 상권을 함께 키우고, 그 이익을 함께 나눌 수 있을 것인가라는 구조의 문제다.
실질적인 장기임대료 안정 장치, 예측 가능한 계약 갱신 제도 없이 ‘임대료는 안 내리고, 공실은 방치하고, 상권이 살아나면 다시 쫓아내는’ 구조가 반복된다면, 우리 도시는 결국 지속가능하지 않은 싸움터로 남을 수밖에 없다.
상권을 살리는 건 임대료가 아니라 사람이다.
그 사람을 지키지 못한다면,
어떤 가격도 결국 비어 있는 공간에 지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