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 보호를 위한 집단소송법 제정연대, 17일 기자간담회 개최
소비자 피해는 반복되는데 책임은 묻기 어렵다. 한국의 사법 시스템이 ‘소액다수 피해’ 앞에서 사실상 무력하다는 지적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19개 소비자·시민단체로 구성된 ‘소비자 보호를 위한 집단소송법 제정연대’는 17일 기자간담회를 열고 집단소송제 도입 필요성을 정면으로 제기했다. 이들은 이달 발간 예정인 팩트북 『집단소송법의 정석』을 통해 한국이 사실상 ‘집단소송 공백국’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반복되는 대형 피해, 그러나 “소송은 1%도 안 된다”
현행 민사소송 체계에서는 피해자 개개인이 직접 소송을 제기해야 한다. 하지만 수천만 명이 피해를 입어도 실제 소송 참여는 극히 일부에 그친다.
SK텔레콤, 쿠팡 등 대규모 개인정보 유출 사건에서도 소송 제기 비율은 1%에 못 미쳤다. 입증 책임은 개인에게 있고 시간과 비용 부담 역시 고스란히 피해자 몫이기 때문. 결국 피해는 광범위하게 발생하지만 책임은 사실상 분산되고 희석되는 구조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 역시 수천 명의 피해자가 발생했음에도 실질적 구제는 장기간 지연됐고 특별법 제정 이후에야 제한적 지원이 이뤄졌다. 대진침대 라돈 사태에서도 수만 개 제품이 판매됐지만 배상액은 1인당 약 100만 원 수준에 그쳤다. 피해 규모와 보상 수준 사이의 괴리는 반복되는 패턴이 됐다.
“같은 피해, 다른 배상”…국가별 격차 뚜렷
집단소송제의 부재는 국제 비교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애플의 ‘아이폰 성능 저하’ 사건에서 미국 소비자들은 집단소송을 통해 약 6천억 원 규모의 합의를 이끌어냈다. 반면 한국에서는 약 6만 명이 소송에 참여했지만 1심에서 패소했고 항소심에서도 일부 승소자에게 1인당 7만 원 수준의 배상만 인정됐다.
폭스바겐 배기가스 조작 사건 역시 유사한 양상을 보였다. 미국에서는 차량 1대당 최대 1,300만 원대 배상이 이뤄진 반면 한국에서는 약 100만 원 수준에 머물렀다. 동일한 기업의 동일한 위법 행위에도 불구하고, 국가별 제도 차이가 소비자 권리의 실질적 수준을 갈라놓고 있다는 지적이다.
OECD 38개국 중 사실상 “한국만 없다”
팩트북에 따르면 OECD 38개국 가운데 한국을 제외한 대부분 국가가 집단소송 또는 유사 제도를 도입하고 있다. 형식적으로 미도입 국가로 분류되는 튀르키예와 스위스 역시 위법확인소송이나 권리양도 방식 등을 통해 집단적 권리구제가 가능하다.
제정연대는 “실질적으로 집단소송제도가 없는 국가는 한국이 유일하다”고 강조했다. IMF 기준 상위 100위 경제권으로 범위를 넓혀도 최소 65개국이 관련 제도를 운영 중인 것으로 파악됐다. 글로벌 기준에서 한국의 제도적 공백이 이례적인 수준이라는 것이다.
“기업 책임 회피 구조 고착”…입법 촉구
문제는 이 같은 제도 공백이 기업 행태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대규모 피해가 발생하더라도 실제 소송 위험이 낮다 보니, 사전적 안전 투자나 개인정보 보호 강화보다 사후 대응이 더 ‘경제적 선택’이 되는 왜곡이 발생한다는 비판이다. 일부 기업이 분쟁조정 절차에도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배경으로도 지목된다.
제정연대는 집단소송제와 함께 징벌적 손해배상, 입증책임 전환 제도 도입을 병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미 정부 차원의 법안 발의와 정치권 공약이 있었던 만큼 더 이상의 지연은 책임 회피에 가깝다는 지적이다.
집단소송제 도입 논의는 수년째 공전을 거듭해 왔다. 그 사이 소비자 피해는 누적됐고, 구제는 지연됐다. ‘권리는 있지만 행사할 수 없는 구조’를 언제까지 방치할 것인지, 입법부의 선택이 다시 시험대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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