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영일 Jul 04. 2023

돌아가신지 24년만에 국가유공자 명패를 달았습니다

'국가유공자 명패 달아드리기 사업'하면서 명패는 "직접 와서 찾아가라?"

6.25 한국전쟁이 일어난지 73년이 된 올해 6월 25일, 필자의 집 대문에 국가유공자 명패를 달았다. 참전용사셨던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24년만이었다. 그 명패 하나가 뭐라고, 무엇하나 아버지에게 잘 해 드린 게 없는 막내아들의 마음에 죄스러움과 또 뿌듯함이 공존했다.

6.25 한국전쟁 참전용사셨던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24년만에 국가유공자 명패를 대문 앞에 손수 달았다. 명패는 주민센터에서 찾아가라고 했다. ⓒ 이영일


국가유공자 명패 달아주기 사업은 지난 2019년 문재인 정부때부터였다. 그전에도 자치구마다 명패를 달아주었다고는 하는데, 필자가 살고있는 서울 동대문구에서 그런 사업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여하간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24년만에 살아생전 그토록 자부심이 강했던 국가유공자로서의 명예를 조금이나마 다시 세워드리는 것 같아 가슴은 뿌듯했다. 하지만 마음 한켠은 그리 가볍지 않았다.


국가유공자 예우 위한다며 명패는 주민센터에 직접 와서 찾아가라니...


주민센터에서 국가유공자 명패를 찾아가라고 연락받은 것은 작년 11월말인가 12월초였다. 그 소식을 듣고 기분이 별로였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주민센터에 가서 무슨 용지에 수령 싸인을 하고 '덜렁' 명패를 받아오고선 텔레비전 옆에 언제어디서건 잘 보이게끔 전시한지 6개월만에 영광스러운 명패를 직접 달았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아무 문제가 없을수도 있는데 필자는 마음이 좀 언짢았다. 주민센터에서 받아온 명패에는 그냥 명패만 들어 있었다. 명절때면 대통령 부부 명의의 선물도 보내는 시절인데, 국가유공자 명패를 증정하면서 그 흔한 대통령의 감사장 한 장도 없다니, 초라한 기분마저 들었다.

       

주민센터에서 국가유공자 명패를 찾아가라고 연락받고 무슨 용지에 수령 싸인을 하고 덜렁 명패를 받아오고선 초라한 마음마저 들었었다. ⓒ 국가유공자를 사랑하는모임


사실 필자는 보훈가족임에도 국가가 그 유가족들에게 주는 여러 혜택을 받아본 적은 한번도 없다. 국가유공자 유가족도 등급이 있어서 필자는 어렸을 때 학비 지원이라던가 또는 그 외의 혜택을 받아본 기억이 없다. 


한달에 한번 집으로 배달되어오는 국가보훈처 발행 '나라사랑' 소식지가 전부였고 88세 노령의 어머니가 구청으로 받는 보훈명예수당도 5만원밖에 되지 않았다. 사는 곳에 따라 그 금액도 다 다르다니 국가유공자 예유는 말로 하나 싶었다.


물론 명패를 일일이 우편으로 보내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동장이 일일이 방문해서 증정하는 것도 말처럼 쉽지는 않음을 잘 안다. 하지만 국가유공자 명패가 구청에서 나눠주는 무슨 구호품도 아니고, 찾아가라고 할꺼면 적어도 주민센터에 방문해서 찾아가는 유가족들에게 그 명예스러운 명패를 주는 방식도 좀더 신경을 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크다.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킨 아버지, 막내 아들은 늘 죄송하면서도 또 자랑스러웠다 


아버지는 6.25 한국전쟁 당시 육군 수도사단 기갑연대 소속으로 참전한 무공수훈자로, 수많은 전투를 치르셨지만 대표적으로는 1953년 5월 강원도 금화군 금성면 백양리에 위치한 중부전선 샛별고지 전투에 3대대 10중대장 대위로 참전하셨었다. 


아버지는 3년동안의 전투에서 수많은 부하를 잃으셨다. 그 아픈 기억 때문에 예편하시고서도 술담배를 자주 하셨었다. 늦둥이이자 막내아들인 필자와는 45세 나이차이가 많이 나 어렸을 때 목욕탕을 같이 가면 '손자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 내게 아버지는 내심 군인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으셨겠지만 필자는 어릴때부터 그와는 별로 상관없는 시민단체 활동가로서의 길을 갔으니 아버지에게 별로 자랑스러운 아들은 아니였을 수 있다.

이버지가 남기신 한국전쟁 당시 철모와 장교모 아버지는 6.25 한국전쟁 당시 중부전선 샛별고지 전투에 3대대 10중대장으로 참전하셨었다. ⓒ 이영일

        

아버지는 노년에 백내장이 오셔서 늘 선글라스를 끼고 다니셨다. 오히려 그 모습이 마치 장군 같으셨다. 장교로 예편하셨으니 계속 군에 계셨으면 장군이 되셨을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늘 집에서 신발은 나란히 정렬을 해야 했고 청렴결백을 신조로 하셨으니 누가 봐도 부끄럽지 않은 군인이자 자랑스런 국가유공자는 분명하셨다.


하지만 국가가 아버지에게 해 준 것은 무엇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필자의 방에 아버지의 긍지와 자랑스러움을 기념하는 한국전쟁 당시의 철모와 충무무공훈장을 보존하고 기념하는 것은 오로지 가족의 몫이었다.


국가유공자에 대한 예우는 말이 아니라 실천과 행동, 국가는 이걸 못하나


그나마 국가가 명예로운 명패를 달아드린다고 하고선 직접 찾아가라는 건 분명 문제가 있다. 이 사업이 '국가유공자 명패 달아 드리기 사업'이지 '국가유공자 명패 찾아가기 사업'이 아니지 않나.

국가가 명예로운 명패를 달아드린다고 하고선 직접 찾아가라는 건 분명 문제가 있다. 이 사업이 ‘국가유공자 명패 달아 드리기 사업’이지 국가유공자 명패 찾아가기 사업이 아니지 않나


명패를 수령한지 6개월이 지난 지금 새삼스럽게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이런 생각이 '내가 좀 까칠해서 괜한 트집을 잡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어 가슴에 삭혔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우연히 인터넷을 찾아보니 이미 이 사업이 시작된 2019년에도 지자체 공무원이 명패를 찾아가라고 안내하는 것에 대해 국가유공자를 사랑하는 모임에서 당시 국가보훈처에 이의를 제기했음을 알 수 있었다. 국회에서도 직접 찾아가라는 것에 대한 문제가 지적된 적도 있었다.


구청장이나 동장이 하루에 2명씩만 명패를 달아 드려도 1년이면 600여명이 넘는 국가유공자들에게 명패를 직접 달아드릴 수 있다. 6월 보훈의 달에 지자체 공무원들이 하루 날을 잡아 관내 국가유공자 집을 방문해 명패를 달아드려도 가능한 일이다.


언제 공무원들이 국가유공자 집을 방문이나 해 봤을까. 유공자에 대한 예우는 말이 아니라 실천과 행동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명패를 찾아 가라니, 우리 국가의 보훈 예우가 어느 수준인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지 않은가.


작가의 이전글 "저를 잡아먹으실 건가요.." 개 식용  논쟁 끝내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