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진위 '특정 이념, 사상 배제 영화' 공고에 의견
영화진흥위원회(아래 영진위)가 청소년 대상 영화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할 경우 청소년들의 정치적 기본권을 침해하지 않아야 한다는 국가인권위원회(아래 인권위)의 의견이 나왔다.
영진위가 '2024 차세대 미래관객 육성사업 운영용역' 입찰을 공고하면서 '정치적 중립 소재와 특정 이념, 사상을 배제한 영화 및 교육 프로그램으로 구성해 진행'하도록 명시했는데, 인권위가 청소년들의 표현의 자유와 정치적 기본권을 침해할 우려가 있다고 해석한 것.
인권위는 시민단체의 진정이 제기된 이번 영진위 건을 조사한 뒤 "특정 소재나 이념·사상의 배제를 요구하는 방식보다 청소년들의 정치적 기본권을 침해하지 않으면서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의견을 표명했다. 단, 영진위가 청소년들의 기본권을 침해했다며 시민단체가 제기한 진정은 구체적 피해 사실을 특정할 수 없다며 각하했다.
인권위 "청소년들의 정치적 기본권 침해 않으면서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 확보해야"
영진위는 해당 용역이 학생에 대한 교육지원 사업이라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이 준수돼야 하고 교육부 관련 기준도 정치, 종교, 사회, 문화적으로 교육 중립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이유로 특정 이념과 사상을 배제한다는 용어를 삽입한 것이라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그보다는 1979년 12·12 군사반란을 다룬 영화 <서울의 봄>이 2023년 말 개봉하자 초중고교에서 학생 단체관람이 추진됐는데 당시 보수단체 회원들이 학교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또 실제 단체관람이 취소됐던 논란을 의식한 것 아니냐는 의견이 제기된다. 실제 영진위도 "특정 영화의 학교 단체관람과 관련한 정치적 논란이 있었던 점 등을 감안해 이 사건 문구를 넣게 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같은 영진위의 주장을 두고 국가검열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특정 이념과 사상을 배제한다면서 정권의 입맛에 맞는 것만 취하려는 것 아니냐는 게 비판의 핵심이다. 실제 영진위는 지난 이명박 정권과 박근혜 정권 때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를 실행했던 기관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청소년에 대한 표현의 자유와 정치적 권리를 침해한 대표적 사건은 2022년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이 실시한 전국학생만화공모전이다. 당시 고교생이 윤석열 대통령을 풍자한 '윤석열차'라는 제목의 만화가 경기도지사상 금상을 받자 문화체육관광부가 '후원 명칭 사용 승인 사항을 위반했다'며 엄중 경고 하고 다음해에는 후원 명칭 사용과 문체부장관상 시상을 금지했으며 지난해에는 116억의 보조금을 70억으로 줄여 버렸다.
윤석열차 논란 이후에도 청소년 정치적 기본권 침해 여전
당시에도 인권위는 공공기관의 다양한 공모전에서 정치적 의도 등을 심사기준으로 삼으면 예술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가 위축될 우려가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한편 인권위 침해구제제2위원회는 이번 영진위 건에 대해 "청소년 대상 영화 교육프로그램이라고 하여 일체의 정치적 소재나 특정 사상·이념을 배제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청소년에게 일정한 정치활동을 인정하고 있는 현행 공직선거법과 정당법의 취지에 반한다"고 명시했다.
또 "청소년이 자신의 의사를 스스로 결정함으로써 민주사회의 시민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갖추도록 할 필요성에도 부합하지 않아 청소년의 자기결정권, 양심 또는 사상의 자유 및 참정권 등을 과도하게 제한할 소지가 있다"고 밝혔다.
독일의 경우 '보이텔스바흐 합의(Beutelsbacher Konsens)'를 통해 정치적 논쟁이 있는 사안은 교육에서도 논쟁적으로 다루되 다양한 관점을 균형 있게 제시하도록 하고 있다. 호주는 학교 필수 교과목으로 민주시민교육(Civics and Citizenship Education)을 시행해 건전한 정치적 관심을 유도하고 있다.
영국, 프랑스, 일본, 대만 등도 당파적 정치활동 추구나 조장은 엄격히 금지하지만 청소년들이 정치적 문제에 관심을 가지도록 함을 교육 책무로 규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