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에서, 길거리에서 살해 당해.."대통령이 나서달라"

한국여성의전화 등 여성단체 70여 곳, 31일 기자회견

by 이영일
1.jpg ▲한국여성의전화를 비롯한 여성단체들은 31일 오전 10시, 서울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가 여성 폭력 묵묵부답이라며 신속하고 책임 있는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지난 26일 의정부 용현동 소재의 일터에서 홀로 근무하던 50대 여성이 직장 동료였던 스토킹 가해자에 의해 살해됐다. 이틀 후인 28일엔 전 연인에게 스토킹을 당하던 20대 여성이 접근 금지 등 잠정 조치가 이루어졌음에도 울산 소재 직장에서 피해를 입어 중태에 빠졌다. 이것이 끝이 아니다. 다음날인 29일에는 대전의 주택가에서 30대 여성이 폭행 등으로 이미 4차례나 신고했음에도 끝내 전 남자친구에 의해 살해 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최근 교제 폭력으로 인한 여성 피해가 다수 발생하자 여성들의 불안과 분노가 커지고 있는 가운데 여성단체들이 정부에 대책 마련을 촉구하고 나섰다.


대통령실 앞에 모인 분노한 여성들


한국여성의전화를 비롯한 여성단체들은 31일 오전 10시 서울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가 여성 폭력에 '묵묵부답'이라며 신속하고 책임 있는 대책을 마련하라고 촉구했다.


이들은 "지난해 친밀한 관계의 남성 파트너에 의해 살해되거나 살해될 뻔한 여성은 최소 374명, 주변인까지 포함하면 피해자는 650명에 이른다"며 반복되는 여성 살해는 개인의 불운이 아닌 명백한 국가와 제도의 실패라 주장했다.

61051_41587_557.jpg ▲한 여성단체 활동가가 침통한 표정으로 기자회견에 참여하고 있다. ⓒ 이영일


이들은 수사기관의 미온적 태도에 분노를 쏟아내기도 했다. 피해자가 원치 않았다는 이유로 보호 조치를 취하지 않거나 가해자를 처벌하지 않고, 검찰과 법원은 피해자와 가해자를 실질적으로 격리할 수 있는 유치 감호와 구속에 너무 미온적이라는 지적이다.


송란희 한국여성의전화 상임대표는 "여성가족부차관에게 남성들이 불만을 가진 이슈를 담당하는 부서가 있느냐고 물어보고, 자격 미달인 후보를 여성가족부 장관으로 지명하고, 국제 사회에서도 수차례 권고해 온 강간죄 개정, 차별 금지법 제정에 대한 답변은 없는 정부, 어디에 빛의 혁명이 있냐"며 분노를 쏟아냈다.


이어 송 상임대표는 "나를 보호해 달라 신고하고도 살해 당하고 스마트 워치 차고 접근금지 명령 중에 살해 당한다. 일상을 보내는 직장에서 집 앞에서 길거리에서 살해 당한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무엇을 믿고 신고를 하겠는가. 대통령이 나서라. 국정과제에 포함하고 중점 전략 과제로 삼으라"고 촉구했다.


"신당역 사건 이후 달라진 게 뭔가"


배진경 한국여성노동자회 대표는 "신당역 사건 이후 직장 관계에서의 스토킹 대책과 안전하지 못한 근무 환경에 대한 사회적 문제 제기를 해 왔지만 달라진 건 없고 계속 일터에서 살해당한 여성들의 소식이 줄을 잇고 있다"라며 "한국의 일터는 포괄적인 괴롭힘에 대한 규제 방안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 직장 내 폭행을 명시적으로 금지하고 가해자에 대한 징계 및 분리 조치를 의무화하는 법 제도 개선이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61051_41588_5530.jpg ▲배진경 한국여성노동자회 대표가 직장내 폭행을 명시적으로 금지하고 가해자에 대한 징계 및 분리 조치를 의무화하는 법 제도 개선을 촉구하고 있다. ⓒ 이영일


서울여성회 페미니스트 대학생 연합동아리 소속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정영은 활동가는 "헤어지자고 했다는 이유로, 만나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남편 말을 무시했다는 이유로, 밥을 차려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머리가 짧다는 이유로,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여성들이 위협을 당한다"라며 "새 정부는 지금 당장 여성 폭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책을 마련하고 이 문제에 적극 나서라"고 촉구했다.


시민들의 발언도 이어졌다. 24살 대학생이자 취업 준비생이라고 밝힌 박주연씨는 "여성이 친밀한 관계였던 남성에 의해 살해당하는 일이 너무 반복적으로 일어나다 보니 이것이 일주일 전에 봤던 뉴스인지 어제 본 뉴스인지, 오늘 새로 본 뉴스인지도 헷갈릴 지경이다"라며 "이재명 대통령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일이 국가의 제1 책무라고 말했다. 정부가 여성을 이 사회의 시민으로 여긴다면 지금 당장 여성 살해를 막는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서라"고 촉구했다.


"여러차례 경찰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국가는 외면했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인천 스토킹 살인사건 피해자 유족이 참여해 울분의 증언을 쏟아냈다. 이 사건은 피해자가 가해자의 지속적인 스토킹을 신고해 법원의 접근 금지 명령을 받았음에도 스마트 워치 반납 사흘 만에 발생했다.


유족은 "제 동생은 사건 전부터 위험을 감지하고 여러차례 경찰에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동생은 가족이 매일 오가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잔인하게 살해 당했다. 이 끔찍한 일이 벌어졌는데도 국가는 외면했다"고 증언했다.

61051_41589_5557.jpg ▲기자회견에 참가한 여성단체 활동가들이 여성폭력 피해자들이 목숨을 잃기 전에 국가의 개입을 촉구하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 이영일


피해자 유가족은 "죽은 뒤에도 그 목소리를 대신해 주는 시스템은 없었다. 더 이상은 이런 죽음을 반복해서는 안된다. 신고 즉시 24시간 긴급 보호 시스템을 의무화해야 한다"라며 "경찰의 긴급 조치와 법원의 잠정 조치를 연계한 이중 보호체계가 필요하다. 검찰은 피해자나 유가족의 의견서를 반드시 받아 공소장에 반영해야 한다. 재판에서 유가족에게도 의견 진술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이들 여성단체들은 가정폭력처벌법을 개정해 교제 폭력 등을 포괄해 피해자를 보호하고 가해자 처벌을 피해자의 의사에 맡기지 말라고 촉구했다. 또 가정폭력처벌법과 강간죄를 개정해 가해자 처벌에 대한 수사기관의 편견이 최소화되도록 조치하고 가정폭력과 교제 폭력, 스토킹의 위험성을 판단하지 못하는 수사 사법기관을 개혁할 것을 정부에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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