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직이고 싶은데 움직일 수 없는 시간은 온다.
오랜만에 알람 없이 그대로 눈을 떴다. 시계는 아침 8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무거운 몸을 이끌고 거실 소파에 누웠다. 가족들은 다들 잠들어 있고 나는 나머지 잠을 소파에 누워 떨쳐내고 있다. 내가 밖으로 나오면 아들은 잠시 후 따라 나온다. 언제나와 같은 주말이다.
어제, 그렇게 늦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뻑뻑한 눈을 비비며 책을 읽었다. 일이 바빠도 책을 놓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최근의 일이다. 역시 밤에 뭔가를 한다는 건 쉬운 것이 아니다. 10시가 지나가는 시간에 아들이 잠을 자자고 해서 아내 대신 아들을 데리고 방으로 갔다. 누우면 잘 것이 뻔하지만 일어날 수 있을 거야라는 희망을 가진채 방으로 들어갔다.
"금방이라도 잠들 것 같은 모습인데? 그냥 자"
"아냐, 일어날 수 있을 거야"
방으로 들어가는 나에게 아내는 말을 남겼고 나는 아무런 기척을 느끼지도 못한 채 그렇게 아침을 맞은 것이다. 거의 10시간을 잠들었다. 정말 꿈도 꾸지 않았다. 아쉬운 것이 많았지만 일은 그렇게 마무리되었고 다른 일은 아직 나에게 닿지 않았기에 편히 잠들 수 있었다. 며칠을 괴롭히던 안압도 사라졌다. 모두 피곤함이 가져온 경고 같은 것들이었다.
이번에도 거의 한 달을 출근했다. 왜 이렇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일은 늘 그렇게 몰려다니거나 재촉한다. 꾸역꾸역 이번에도 이렇게 해냈다. 해내니까 되는 줄 아는 걸까. 괜히 삐뚤어지고 싶다.
일 년 전에도 같은 일이 있었다(아니 매번 그런 일이 있었다).
일요일 저녁 7시가 훌쩍 넘은 시간. 머리에서 핑하는 느낌이 들어 화면에서 급히 눈을 떼고 아무도 없는 공장 천장을 올려다봤다. 그대로 눈을 감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 모양이 똑같다고 그냥 만들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무식함 덕분에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들은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할 거다. 무식하면 손발이 고생이라는데, 왜 다른 머리가 무식한데 내 손발이 고생인지 이해할 수 없다.
고객이 한 번 더 보고 싶다고 해서 애꿎은 시간만 흘러간다. 원래부터 되어야 하는 것들이지만 시간에 쫓기다 보니 마음만 급하다. 안 된다고 하려는 찰나 문제는 또 극적으로 해결된다. 어떻게든 굴러가니까 경각심이 없는 걸까. 해냈다는 기쁨보다 남은 일들이 더 걱정이다. 고객에게 보여줄 정도가 되어서야 짐을 싸고 집으로 향한다. 벌써 3주째 주말도 없는 출근이다.
젊었을 때는 정신력이 모자랐는데 나이가 드니 체력이 달린다. 줄넘기를 조금이라도 해뒀지만 저녁 9시를 넘기는 건 힘들다. 더욱이 새벽에 일어나는 습관 덕분에 나에게 저녁 9시는 다른 사람들에게 12시에 가까운 시간이기도 하다.
고객은 온다던 시간에 나타나지 않는다. 살짝 짜증이 올라왔지만 이내 나타나 미팅을 한다.
'나는 담당 팀이 아니야. 도와주러 온 것이지'
라는 반발감이 강하게 생긴다. 우여곡절 끝에 고객 시연을 끝냈다. 나도 고객도 처음 해보는 작업을 해냈다. 그들도 걱정이 많았을 거다. 걱정이 없는 건 회사 윗분들이겠지. 고객에게는 듣기 힘든 '고맙다'는 말을 들었다. 걱정했던 것보다 괜찮은 모양이다. 긴장이 풀리며 피곤이 몰려온다.
점심을 먹고 양치를 하자마자 의자에 앉아 잠을 청했다. 잠이 들 것 같지 않는 말짱한 정신도 잠시 눈을 떠 보니 벌써 점심시간이 지났다. 체력은 조금 회복했지만 집중력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정신력이 체력을 압도한다지만 그건 순간의 이야기뿐이다. 정신력은 그저 체력을 한계까지 쓸 수 있게 해주는 것뿐이다. 너무 많이 방전된 탓인지 충전이 오래 걸리는 건 어쩔 수 없다.
'오늘은 일찍 자야겠다'
라고 하기엔 퇴근 시간이 너무 멀다. 남아 있는 에너지가 약해지면 불안과 불만을 억누르는 힘도 자연스레 사라진다. '이렇게 일해서 어떡하려 그래?'부터 시작해서 '벗어나고 싶다'로 이어진다. '빨리 글을 써야 하는데', '책도 읽어야 하고'라며 또 다른 스트레스로 자신을 압박한다. 생각은 놔두면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하니 어떻게든 몸을 움직여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두 번째 인생 준비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아직은 전환점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다. 더 열심히 준비하자라고 생각을 정리한다.
어딜 가도 모자라지 않는 커리어다. 하지만 같은 생활을 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완전 다른 일을 생각하고 있다. 나이가 들어도 할 수 있는 일을 찾다 보니 자연스럽게 글 쓰는 일을 하고 싶었다. 글 쓰는 것을 좋아하기도 하고. 그렇지만 업무에 체력을 모두 쏟아내면 글 쓰는 건 쉽지 않다. 용돈 벌이라도 하려 시작한 블로그의 글도 빨리 늘지 않는다. 피곤해서 움직일 수 없는데도 움직이지 않는 자신을 질책하게 된다.
21일째 연속 출근. 지인은 요즘 세상에 누가 그렇게 일을 시키냐고 되묻는다. 퇴사한 다른 이는 그렇게 일하다가 죽으니 쉬어가며 일하라고 충고한다. 그래서 일이 적당할 때는 최대한 쉬는 편이다. 월급 루팡은 취미에 맞는 편이니까.
사실 지금 당장 나가더라도 먹고살 수 있다. 지금은 회사 사정도 엉망이라 바쁜 일이 더 자주 발생하지만 적절히 조율하면 또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낼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진짜 최근에는 그마저도 바랄 수 없지만). 마음 같아서는 올인해 보고 싶은 생각도 들지만 성공은 쉽게 얻어지는 게 아니니까 보수적으로 접근하게 된다.
체력이 바닥을 칠 때 찾아오는 공허감이 무서운 것 같다. 번아웃은 그렇게 찾아오는 듯하다. 의미 상실이랄까(물론 체력적으로도 회복이 잘 되지 않는 나이다). 남의 꿈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지 말라는 말이 있지만 그 꿈이 내 꿈과 어느 정도 일치하면 나쁘지 않다. 하지만 도가 지나치게 되면 느껴지는 무상함과 자괴감은 자신을 깊은 심연으로 떨어트릴지도 모를 일이다. 흔한 자기 위로보다 탈출만을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언제나 체력 마진을 유지하는 것은 중요하다.
또 언제 쉼 없이 달리게 될지 모른다. 그래서 늘 최대한 많이 회복해 두려고 한다. 그리고 지금은 '브레이크'가 필요한 시간이다. 다른 것을 잃더라도 나의 존재는 지켜내야 한다.
깊은 밤이 되기 전,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조금 더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한다. 그리고 아내와 인사하고 먼저 잠자리에 든다. 잠보다 좋은 건 없다. 내일이 되면 분명 더 좋은 기분이 될 거다. 폭풍은 시간이 지나가면 사라진다. 또 찾아올 것을 알고 있지만 그건 지금의 문제는 아니다.
'잘 견뎠네. 오늘 좀 많이 힘들었지만 내일은 분명 다시 괜찮아질 거야'
생각도 잠시 베개에 머리가 닿자마자 잠이 들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