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떼'에 대한 꼰대의 항변
꼰대라도 좋다. '라떼는 말이야'...
"라떼는 말이야..."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습성은 나이 든 꼰대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전 연령에 거친 사람이라는 본성이 아닐까 한다.
쓴소리를 듣고 싶지 않은 심사야말로 모두가 공통이겠지만 귀에 단 소리만 쫓아가다 보면 자기반성이나 겸양의 도리와는 멀어진다. 조금이라도 교훈적인 것을 말하고자 하면 인상이 어두워지고 긴 문장이나 무게 있는 말에는 빨리 자르고 싶은 조급증이 앞선다.
'라떼'라는 신조어 속에는 기성세대에 대한 꼰대적인 비판이 숨어있다는 사실을 안다. 지금의 부모세대들은 고집불통의 꼰대로 인식될까 봐, ' 옛날 우리들이 살 때에는...'이라고 말하는 것을 매우 경계해 왔다. 그러나 이 말속에는 과거를 거울삼아 현재의 지혜를 찾아보고자 하는 좋은 의도도 있는데 그 듣기 쓴 말에 화부터 나는 것이 아닐까.
꼰대의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나의 옛날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무려 2십만 년 정도를 빈곤과 결핍의 시대를 살아온 인류가 최근 200년 남짓의 짧은 기간에 풍요를 넘어, 다른 생물에 비해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지구를 더럽히고 있다. 일회용 플라스틱을 첨두로 한 환경 폐기물과 온갖 화공약품들이 더 이상 생물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만들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이 결핍을 해소하고자 인류가 노력해온 그 부산물들이다. 이렇게 살면 향후 새로운 지구가 4개 더 필요하다고 과학자들은 충고한다. 그래서 아껴 쓰라고 말하면 벌써 '라테'냐고 지루해한다.
전후 베이비 부머 세대인 우리들은 정말 가난하고 '없이' 살았다. 배가 고파 캐 먹었던 칡은 찾기조차 힘들었고 겨울 논에 겨우 생명줄을 이어가던 '꼬꾸랑 캥캥 '이라는 잡초 뿌리를 파먹고 똥구멍이 막혀 꼬꾸랑 캥캥거렸다. 돌멩이로 자동차 놀이를 하였고 대나무를 깎아 칼과 칼집을 만들었다. 형의 옷을 바느질해가면 입었고 검정 고무신이 소중해 가슴에 품고 잠을 잤다.
공부를 위해 하숙은커녕 자취를 해야만 하였다. 초등학교를 갓 마친 나이에 새벽에 일어나 아궁이에 불을 넣어 밥을 짓고 냄새나는 양말을 신고 학교를 갔다. 책상이 없어 전학 간 친구의 책상을 훔쳐서 공부하였다. 고등학교 자취방에서는 겨울 독감으로 고열에 끙끙거리며 누워 있어도 병원에 갈 엄두도 못 내는 와중에 소식 없이 방문한 어머니와 부둥켜안고 울었다. 교복 위에 쌀자루를 짊어지고 여고 앞을 지나면서 부끄럽게 눈길을 피하였다. 대학시절 자취방을 옮겨 갈 때에 리어카에 실린 이불더미와 베개가 조금은 코믹하였지만 그래도 좀 부끄러웠다. 방세가 밀리기 일수이고 생활비라도 올라오지 않으면 빈털터리로 한 달 살기가 너무 힘들었다. 시내버스 차비가 없어 걸어 다녔고 책을 산다는 것은 언감생심, 복사나 빌려서 공부하였다.
지금은 어떠한가?
신발은 밑창이 벌어지기도 전에 지루한 이유로 버려지고 먹다 남은 음식이 산을 이루고 포장도 뜯지 않은 장난감들이 쓰레기 통으로 직행하는 시절이다. 79억의 인구가 뱉어내는 탄소 배출물이 지구의 허파를 막아 온갖 기상이변으로 신음하고 썩지 않는 플라스틱 폐기물이 태평양 해류에 갇혀 대형 섬으로 떠 다니고 지구의 체온은 열사병 환자처럼 뜨거워지고 있다. 과연 지구의 인류는 22세기를 맞이할 수 있을까?
2500년 전의 동양 철학자, 노자는 도덕경에서 자기의 3가지 보물을 자랑하였다. 사랑하는 마음, 즉 '자'가 그 첫째요, 검약하는 생활, '검'이 그 둘째요, 남 앞에 나서지 않는 '겸'이 그 셋째라 하였다. 이는 물건을 아껴서 부자가 되기 위해 애쓰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의 소유와 소비로 부질없는 욕심을 차단하여 보다 높은 수준의 만족과 행복을 찾기 위함이다.
아끼고 절약한다는 것은 부를 향한 첫걸음일 뿐 아니라 궁극의 행복을 위해 아껴두는 것이고 우리의 터전, 지구행성의 건강을 위해서라는 큰 목적으로 실행한다면 굳이 피하거나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