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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Reverie

house가 아닌 home으로

루도비코 에이나우디의 'Low Mist'

by harmon

잭 케루악의 <길 위에서>가 황혼기에 놓인 이들을 다룬다면 얼마나 달라졌을까. 클로이 자오 감독이 맡은 다큐멘터리 영화이자 제시카 브루더의 <매드랜드: 21세기 미국에서 살아남기>를 각색한 작품이다. 주연 인물인 펀(프란시스 맥도먼드)은 60대 여성이며 방랑생활을 이어가는 중년이다. 1923년 석고 채굴 중심지였던 네바다주 엠파이어는 금융 위기로 2011년 유령 도시가 되었으며 직장도 남편도 도시도 잃은 펀에게 남은 것은 'Vanguard'라는 RV뿐이다. 펀은 아마존 물류센터에서 계절직, 사우스다코타에 위치한 식당에서 햄버거 조리와 배드랜드 국립공원에서의 화장실 청소 등 할 수 있는 일은 닥치는 대로 전전한다. 막대한 트레일러 수리비를 빌리기 위해 캘리포니아에 있는 여동생의 집에 방문해서는 원망과 볼멘소리도 견뎌내고, 여분의 타이어가 없어 사막 속에 고립되어 하마터면 로드 트립이 저세상길이 될 뻔했던 일들이 펼쳐진다. 펀이 이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묵을 수 있는 house가 없어서가 아니라 돌아갈 home이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노매드랜드>는 개인적으로 <맨체스터 바이 더 씨>(2016)에서 바라보는 감각과 비슷하게 와닿는 점이 있었다.


영화에 찬사가 쏟아진 것은 전문배우가 아닌 당사자들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기도 한데, 수앤 칼슨, 린다 메이부터 애리조나주 쿼츠사이트에서 밴 노매드 생활을 이어가는 실존 인물 밥 웰스가 등장한다. 그는 유튜브 채널인 CheapRVliving과 비영리 단체인 Homes on Wheels Alliance를 운영하며 Rubber Tramp Rendezvous(RTR) 행사 장면처럼 노매드 생활을 전파하고 있다. 이들은 워크 캠퍼로서 노매드 공동체를 이루고 도와가며 살아가는데, 대체로 누군가를 상실한 적이 있거나 이혼을 겪은 적이 있으며 어려운 시기를 거쳐왔다는 공통점이 있다. (특히 필름 속 Swankie라는 75세 여성은 뇌에도 암이 전이되어 시한부 인생으로 살아간다) 펀과 자주 소통한 데이브(데이비드 스트라탄) 역시 전문배우이지만 펀의 결론은 끝끝내 여행자로 남아 떠돌기로 결심한다. 클로이 감독은 "전문 배우가 아닌 배우들과 리허설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며 "광각 렌즈로 사람을 가까이서 촬영하게 되면 거짓에 민감하게 반응한다"고 하였다. (<씨앤앤스타일>) 플라스틱 양동이와 통조림 수프에 의지하는 아들의 양해를 구하며 원테이크 형식으로 촬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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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 스코어에는 피아니스트이자 뉴에어지 음악 작곡가인 루도비코 에이나우디(Ludovico Einaudi)가 참여하였다. 에이나우디는 "음악을 해석하며 느껴지는 자유가 정형화된 삶의 틀에 얽매이지 않고 방랑하는 노매드랜드의 비전에 딱 맞는다고 생각했다"며 테마를 연주하며 다른 형태와 각도로 연주하였다. (<인사이드에디션>) 그의 작품 <Seven Days Walking>은 2019년 이탈리아 알프스 산맥에서 7일 동안 같은 길을 걸으며 느낀 감정이 기반된다는 점에서 <노매드랜드>의 풍경과 비전에 일치되는 점이 있다. 수록곡 'Einaudi: Seven Days Walking / Day 1: Golden Butterflies'과 'Einaudi: Seven Days Walking / Day 3: Low Mist'는 모두 잔잔한 피아노 연주곡이지만 전자는 캐러밴 생활의 희비를 묘사한다면 후자는 맥도먼드는 바닷가를 거닐고, 나체로 폭포 속에 몸을 내던지는 노매드 생활의 고독이 스며든다. 앨범 <Divernire>와 <Elements>에 수록된 'Oltremare', 'Petricor' 역시 네브래스카, 네바다, 캘리포니아, 애리조아를 순회하며 촬영지의 풍경과 캠프 장면을 담아내며 극적인 현악 파트를 제외시켰다. 이외에도 앞전 브런치북에서 소개한 피아니스트 올라퍼 아르날즈의 'Epilogue'부터 라이브 세션 다섯 곡을 포함 총 11곡이 수록되어 있다. ('Dave's Song', 'Answer Me, My Love', 'Quarzsite Vender Blues' 등)


몇 년 전 한국사회에서 '디지털 노매드', '긱 이코노미'라는 신조어가 생겨났다. 경제나 산업 구조가 뒤바뀜에 따라 일자리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있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온라인에서 부수입을 얻는 플랫폼 노동자들의 수도 적지 않다. 모든 사람들에게 노매드 생활이 맞지는 않겠지만 자유롭고 개방적인 삶을 원하거나, 가정과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외딴곳으로 떠나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다. 영화에서 제기하는 의문은 이뿐일까. 집을 사거나 렌트할 돈도 빠듯한데 house는커녕 home은 어디에 있을지, 'just see you down the road'를 말할 수 있을 만큼의 연대와 개방적인 관계에는 어떤 힘이 있고 어떤 가치를 줄 수 있을지 생각해봐야 한다. 늙어서도 결국 인간관계, 주거, 일자리, 금전... 등 모든 건 생존의 최소조건이기 때문에 자신의 가치관을 한 번쯤은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노매드랜드>는 베니스 국제 영화제 황금사자상부터 비롯해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감독상 등 6개 부문 후보에 올랐으며, 자오 감독과 맥도먼드는 각각 오스카 감독상과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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