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오디움 음악박물관 전시 <정음의 여정>과 <비개념원리>
오디움은 서울특별시 서초구에 위치하는 오디오 박물관이다. 일본의 건축가인 구마 겐고의 설계와 정몽진의 비전, 하라 켄야의 브랜딩 디자인 협업으로 완공되었으며 서전문화재단에서 관리하고 있다. 오디움 건축물 구조가 독특한데 직선 형태의 긴 파이프가 대나무 숲처럼 구조화되어 마치 소리가 들어가면서 직선형 혼을 통해 저음을 표현하고 음의 증폭되는 과정을 가시화한 작업처럼 보인다. 지하 2층에 있는 입구로 들어가게 되면 마치 나라는 존재가 태풍의 눈 안에 있는 것처럼, 진동관 파이프 안에서 움직이는 음파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음을 시각적으로 재현한 건축물에는 르 꼬르뷔지에의 필립스 파빌리온Philips Pavilion이나 반 시게루의 센느 뮤지컬La Seine Musicale도 주로 언급될 테지만 오디움은 일단 국내에 있는 유일한 오디오 건축물일뿐더러 청음을 직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시청각적 체험 공간이라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2024년에 개관하여 온라인 사전 예약제로만 운영되고 있는데 무료 전시인 데다가 입장 시 최대 25인만 수용 가능하며 목・금・토에만 운영하기에 관람하기 제법 어려운 편이다. 흔치 않은 경험인데 특색 있는 공간이기 때문에 음악 애호가라면 마다할 이유가 전혀 없다.
상설전시 <정음正音 : 소리의 여정>에서는 좋은 소리라는 것은 과연 무엇인지 고찰하며, 하이파이(Hi-Fi)에 따른 원음에 충실한 재현이 어떻게 이루어져 왔는지를 보여준다. JBL, 매킨토시와 같은 가정용 하이파이 앰프부터 해설 초기에는 주로 1940년대 음향시스템의 양대 산맥인 미국의 웨스턴 일렉트릭과 독일의 클랑필름의 구도를 중심으로 음향 기기의 발전 과정을 전달하였다. 또한 하이파이와 동시에 전시를 꿰뚫는 핵심 단어가 있다면 미로포닉(Mirrophonic) 시스템일 것이다. 1869년 설립된 웨스턴 일렉트릭은 반독점 협정 전후로 진공관 앰프와 스피커로의 응집된 기술력을 뽐냈다. 전시에는 31년도 최초의 극장 스피커와 47년 녹음실용 스피커는 물론, 일렉트릭 혼 스피커(16-A)의 고음질 음향을 감상해 보는 방식으로 오디오 음향 기기의 발자취와 기술 및 상업적 역사를 돌아볼 수 있었다. 하이파이는 오리지널 소스에 충실한 소리 재생이라는 점에서, 빈티지와 아날로그 오디오 애호가들이라면 좋아할 만한 입체적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컬렉션이 즐비한 전시였다. 웨스턴 일렉트릭은 1996년 벨 텔레폰에 합병 이후 현재는 노키아 산하에 있지만, 요즘으로 따지면 돌비 애트모스(Dolby Atmos)와 같은 기술력을 자랑한 기업으로 기록된다.
재미있는 일화 중 하나는, 빈티지 오디오라는 개념인데 당시 오디오 메커니즘에서는 물리적 특성보다 발화자의 발음을 더 중요시 여겼다는 것이다. 사람들을 모아놓고 얼마나 발음이 정확하게 들리는지 STI(Speech Transmisson Index) 지수에 따라서 방송 설비나 공연장에서의 음질을 평가하였다. 과거로 돌아갈수록 신의 존재와 집권 세력의 입김이 클 수밖에 없었으며 이에 따라 음악 역시 그 목적과 방향에 따라서 '무엇'이 좋은 소리인지를 규정하였는지를 알 수 있는 셈이다. 이외에도 19세기 발명가인 토마스 에디슨Thomas A. Edison의 축음기와 원통형 레코드를 직접 눈으로 구경해 볼 수 있었으며 당시 유원지에 설치되었던 자동연주 피아노와 오르간의 연주를 감상할 수 있었다(전자는 특히 <웨스트월드> 사운드트랙에 수록된 'Seetwater'를 체험으로 감상하는 기분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도슨트이자 박사의 해설에 따르면 에디슨의 원통형 레코드는 소리가 들어가면 혼을 통해 축음기로 들어가 진동판을 진동시키는데, 진동판에 부착된 스타일러스는 음파를 원통형 음반의 표면으로 전달한다. 스타일러스는 작은 첨필로 홈에 새겨진 굴곡(에칭)에 따라 수직으로 진동하며 진동판이 진동하고 혼에 의해 증폭되는 원리라고 설명한다.
마지막 전시 공간에서는 벨기에에서 공수한 '춤추는 오르간: Th. Mortier - Dance Organ (1924, 벨기에)'과 금액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희귀한 재즈・클래식 LP음반이 큐레이팅되어 있다. 춤추는 오르간은 아쉽게도 고장 난 상태였고, 올해 8월 이후가 되어야 청음이 가능할 것이라고 하였다. 벨기에는 브뤼셀 음악 박물관을 갖추고 있고 댄스홀 문화의 중심지였기에 흔하지만 당최 경험해 본 적 없는 이들로써는 매우 이질감이 드는 장치였다. 105개 이상의 키를 갖추었기에 피아노 퍼커션, 금관악기, 아코디언, 실로폰 등의 소리를 아우르며 악기의 집합체이자 사물 오케스트라라는 표현이 저절로 떠오른다. 도슨트는 스피커로 두 곡을 먼저 들려주고, 나머지 두 곡을 들려주는 시간에 자유롭게 감상할 시간을 부여했다. 크리스마스 고전인 'O Holy Night'부터 주세페 베르디의 오페라 맥베스 수록곡 등을 이전에는 들어본 적 없는 방식으로 청음할 수 있었다. 큐레이션 공간에는 마이너한 작곡가와 음악가들의 음반이 잔뜩 소장되어 있었지만 비틀스나 빌 에반스 트리오와 같이 알아보기 쉬운 음반도 있었다. 대중음악도 이후에는 전시에 연계된 미니어처와 소품, 굿즈를 감상하는 것으로 약 1시간 30분가량의 전시가 종료되었다.
오디움 전시는 목적은 자신만의 좋은 소리를 찾는 것이며 정음이란 과연 무엇인지를 규정하는 데 있다. 우선 소리에서 중요한 것은 원음의 재현이라는 점을 놓고 봐서는 대다수가 동의하는 명제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건 물리적인 해답일 뿐이라는 걸 느꼈다. 추상적인 의미에서 정음이란 무엇인지, 이를 둘러싼 부가적인 질문에서는 의문이 생기기 십상이다. 전시를 구경하면서 느낀 것이지만 정음이 무엇인지를 정의한다고 하더라도 진정성이 없는 음악도 정음이라고 볼 수 있는지, 왜 그것이 정음인지, 정음에는 의미가 있는지, 빈티지 오디오 청취가 왜 스트리밍 플랫폼을 클릭하는 것보다 정음처럼 느껴지는지 등 말이다. 음악은 무형적이어서 그런지 과연 실체적인 경험인지에 관한 형이상학의 의문과 마주하게 된다. 여기서 좋은 음악은 의미와 진정성과 주로 연결된다는 점에서 대중음악비평집인 <비개념원리>에서 전대한 대중음악비평가의 이야기를 정리해 보며 요지를 짚어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고, 오디움 전시에서 촉발된 궁금증이 되었다.
음악에 진솔한 감정이나 생각이 음악적 언어로 담겨 있을 때 진정성이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진정성이 있는지 없는지 구분하기는 어렵다. 전대한 비평가는 대중음악 담론이 명확하게 규정되기 어려운 이유를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는데, 1) 진정성이 진실성, 정격성과도 동치 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전자에서 유용한 사례는 포크음악이며 싱어송라이터의 사적인 감정과 진술이 포함된 음악은 진실되기에 진정성이 있다고 볼 가능성이 있다. 후자에서는 어떤 음악이 속한 장르의 암묵적인 문법과 규범을 따르게 될 경우에 그렇다. 2) 또 하나의 이유는 진정성은 분류적 의미와 평가적 의미에서 볼 때 명확히 구분되지 못한 채로 혼용되어 사용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한 작품이 갖는 속성을 기술하는 것과 어떠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판단하는 것은 다르며 대중음악에서는 보통 타 작품과 비교하게 되니 덜 좋거나 더 좋은 평가적 의미를 얻도록 자연스럽게 연결이 된다는 것이다. 음악이 진실성을 갖는지에 관해서는 아티스트 본인의 진술이 아니고서는 완벽하게 확증할 수 있는 방법이 없고, 정격성에서는 장르적 문법과 음악의 보편적인 개념을 비교할 기준이 없다. 평가적 의미에서 진정성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결국 화자의 취향에 따라 '진정성'이 뒤바뀌는 오류가 생긴다.
그 작품의 진정성이 정격성에 의해 좌우하게 될 경우에는 어떤 분류군에 속하는지를 검토해봐야 한다. 그러나 현대음악과 대중음악 안에서는 음악의 고전적인 스타일과 양식이 허물어지고 모호해지고 있다. 계통발생학과 유전학을 비유로 들어보자면, 1) 수렴 진화convergent evolution, 전혀 다른 종인 돌고래와 상어가 바다라는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유사한 형태를 갖추게 된 점, 2) 이배수성 Allopolyploidy, 트리티쿰 우라르투(AA)라는 야생 밀과 에길롭스속 외풀(염소풀, BB) 이 결합되고 에길롭스 타우쉬(DD)와 또 결합하며 감수분열이 일어나지 않아 6배체의 빵밀이 되었다. 3) 수평적 유전자 이동Horizontal Gene Transfer, 박테리아파지의 형질전환이나 접합처럼 서로 다른 개체 간에 유전 물질이 전달되는 사례와 마찬가지로 음악도 샘플링이나 환경적 영향, 장르군의 결합과 같이 융합되는 양상이다. 따라서 하위장르를 살펴보게 되면 그 범주가 겹칠뿐더러 이로 인해 그 음악이 가지는 본질적 속성을 파헤치기는 쉽지 않기에 진정성이 있다고 주장하기에는 어렵다. 하이퍼팝이나 일렉트로니카, 모던 클래식, 사이키델릭 록 같은 음악은 하나같이 장르적 범주를 구분할 수 없으며 유동적으로 표제어가 변화되고 있다.
전대한 비평가는 대중음악에서 진정성 개념은 허구적이라고 말하지만 긍정적인 시각에서 믿는 체하기 게임의 일부라고 바라본다. 왜냐하면 음악과 연관된 담론을 풍부하게 만들고 새로운 음악적 경험으로 안내하는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믿는 체하기는 켄달 월튼Kendall Walton이 제시한 개념으로 소설이나 음악 등 재현적 예술작품을 감상할 때 특정한 심적 태도를 취한다는 뜻이며, 완전한 믿음은 아니지만 유사-믿음으로써 작동될 수 있다고 바라보는 태도이다. 이는 음악이 진정성을 가지고 있는지 없는지에 관해서는 파악할 수 없지만 음악을 듣는 청취자의 입장에서는 '진정성'을 담보로 놀이 도구로써 즐길 수 있는 유사 체험에 빠져드는 것과 같다. 송화숙은 진정성이 허구적인 개념인 것은 대중음악에서 진정성 개념이 예술론에서 다루어지는 방식과는 다르게 기술적으로 복제될 수 있고 즐기는 방식에 따라 유동적으로 변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스페드업이나 매쉬업, 다른 아티스트가 부른 버전의 같은 곡으로 연결 지을 때 과연 그 소리는 진정성이 있냐는 생각 역시 해볼 수 있다. 같은 곡이더라도 템포가 느리거나 빠르게 되면 기존의 곡이 가지고 있는 특성을 잃는 동시에 진정성이 훼손된다는 인식도 생겨날 수 있을까 하고 말이다.
음악에는 진정성과 함께 거론되는 '의미'가 있다. 우선 음악적 의미가 존재하느냐에 관한 논의를 하기는 어려운 것이, 의미를 지각하는 청자들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의미가 있음을 전제할 필요가 있다. <비개념원리>에서는 발화 이해에 대한 추론적 관점과 발화 이해에 대한 지각적 관점을 설명한다. 전자는 청자가 화자의 발화를 이해함으로써 해당 발화가 속한 구문론과 의미론, 맥락을 파악하고서 추론함을 함축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후자는 의미가 소리의 음고나 음색과 같은 특성처럼 감각기관을 통해 포착되는 지각적 속성이라는 주장이다. 전대한 평론가는 후자의 주장을 제안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전자에서는 청자가 추론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하더라도 정보에 따른 의미 추론이 불가능할 수 있는 경우를 상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후자의 관점에서는 그저 음악적 의미를 지각하는 데 실패했다는 설명이 가능하다. 후자의 관점이 훨씬 설득적으로 들리는 이유는, 청취자들은 각자의 방식과 관점대로 음악을 해석하고 의미를 포착하기 위해 애쓰며 따라서 이 음악이 좋다고 설명할 수 있는 근거의 토대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또한 음악에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쪽보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 음악이 진정성을 갖추었다는 믿음을 심어주기에도 그럴싸한 추론이다.
의미는 음악이 '듣는 것'이 아닌 '읽고, 해석되어야만 하는 무언가가 될 수 있음을 나타낸다. 이를 콘셉트로니카Conceptronica라고 하는데 사이먼 레이놀즈Simon Reynolds의 <왜 최근 10년간의 많은 음악은 클럽보다 박물관에 속하는 것처럼 느껴지는가> 칼럼에 따르면, "고해상도의 디지털 추상화부터 베이퍼웨이브Vaporwave와 혼톨로지Hauntology같은 양식들에 이르는 예술적 작동의 양태"라며 "귀로 숙고하기 위한 음악"이라고 설명한다. 콘셉트로니카 아티스트들은 시청각을 포함한 총체적인 음악으로 자기성찰적이고 높은 수준의 정치의식과 워우크-뮤직을 지향한다. IDM은 테크닉과 개인 위주였다면 콘셉트로니카는 서사적 구조를 통해 수용자들을 자신의 세계에 참여시키야 하기 때문에 장벽이 훨씬 높고 몰입성을 강조하는 반면 음악이 사색의 수단이 되면서 설교하는 듯한 피로감을 줄 수 있다. 또한 페미니즘, 퀴어, 환경, 안보와 같은 메시지와 개념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디컨스트럭티드 클럽Deconstructed Club이라는 불규칙한 리듬과 파편화된 사운드가 중심이 된다. 이는 책에서 언급된 코드워 에슌Kodwo Eshun의 '음향적 허구'와 같이 상상을 동원하여 소닉 픽션, 현실에 없는 세계를 형성할 수 있는 데 기여한다는 것에서 결이 비슷한 부분이 있다.
여태껏 음악을 들어오던 방식이 지니어스Genius에서 가사를 파악하고 아티스트의 인터뷰를 찾아보며 어떠한 요소를 집어넣었는지 파악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공감이 가는 부분이었다. 정체성 정치에서 이론적 깊이와 다름을 강조하는 것은 불가피하며, 마치 게임 설명처럼 시즌 초기에는 단순하게 설명된 텍스트였지만 업데이트를 거칠수록 조건과 수식어가 붙어서 복잡해져서 개념적으로 과잉이 된 상태가 올 수밖에 없는 시대라는 점도 한몫한다. 하지만 이를 경계하고 싶은 건 감각적 경험이 배제된 지적 유희는 존재할 수 없으니 적절히 융화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음악을 지적으로만 대하면 즐기기 부담스러울뿐더러 의미가 없다고 해서 음악이 진정성을 가지지 않는 것과는 별개이다. 어떤 메시지를 지니고 있는 음악이더라도 청각적 쾌감과 음악적 문법과 맞지 않는 것과도 전혀 다른 문제이다. 레이놀즈가 비유한 대로 설명하자면 실험적인 음악으로 포장한다고 하여도 대부분의 청취자들은 예술적인 작품이라고 생각할지언정 '머리'로만 이해하고 넘어가는 박물관의 작품 1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청취자의 관점에서 이를 정음正音이라고 과연 부를 수 있을까? 역도 생각해볼 수 있는데, 음악적 경험이 좋다고 하더라도 메시지(클리셰-비틀기 같은)가 청취자에게 매력적이지 않다면 호응도는 기존에서 어느 정도로 어긋날지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진정성과 의미는 아티스트와 청취자의 관계 속에서 생겨나는 심리적 현상이며, 시대와 기술적 발전에 따라 변한다. 위에서 언급한 진실성과 정격성 이외에도 송화숙의 논문에서는 몇 가지 층위를 더 얹는데 1) 매체적 진정성, 과거에는 라이브나 무대에서의 목소리가 진정성을 반영한다고 생각했으나 현대에는 정교하게 편집된 사운드나 보이스가 이를 대변할 수 있으며 2) 사회적/문화적 진정성, 공동체의 정체성과 얼마나 닮아 있는지에 따라서 진정성을 느낄 수 있다. 3) 마지막은 수용자 느끼는 진정성으로 의도와는 별개로 얼마나 음악이 자신의 심정을 대변해주는지가 관건으로 청취자들이 일반적으로 음악을 감상하면서 그토록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이유라고 볼 수 있다. 이외에도 아티스트가 고의적으로 진정성을 기술매체에 녹여내서 대중의 심리를이용하기도 한다. 진정성과 의미가 고정된 요소이자 객체가 아니라 특정 음악과 공명하여 발생한 시간적 사건이라고 생각한다면 청취자의 음악적 기준과 아티스트가 제공하는 정보 사이에서 일어나는 비물리적 접촉에 불과한 것이고 이때 의미는 발생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이 역시 배현지 선생님의 말대로 하나의 '진술'에 불과하지만 강제적인 메시지 설파로부터 벗어나 기준을 잡고 다른 관점에서 들음으로써 의미를 재발견할 수 있는 좋은 전략이 될 것이다.
나름 정음正音과 음악의 진정성과 의미를 다루어보고자 했다. 만약 믿는-체하기의 소도구적 놀이로써 적합한 음악이 정음이 된다면 어떨까? 전대한 음악평론가는 사례를 통해서 음악이 내외적 방식의 이야기가 된다고 설명하는데, 이때의 조건이 감상자가 음악을 소도구로 삼아 플레이에 참여하게 될 때라고 말한다. 덧붙이자면, 우리는 아무런 게임에 일방적으로 뛰어들지는 않다. 나이가 들거나 취향이 바뀌어서 게임을 플레이하는 방식 또한 달라진다면 어떠한 유사-믿음을 취사선택할지 역시 청취자가 추구하는 음악의 형태와 닮게 될 것이다. 무한히 음악이 공급되고 있다면 적절한 음악을 취사선택하여 개인의 선택과 음악적 매력성 사이의 간극을 줄이기 위해 노력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정음에 필요한 최소조건이지 않을까. 어떤 식으로 진정성과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지 클레이처럼 주무르고 해체해 보고 합쳐보고 타인의 점토와 교환해봄으로써 판별해볼 수 있을 것이다. 오디움 전시를 감상하면서 각자가 생각하는 정음이란 무엇인지 짚어볼 수 있는 시간이 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