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문화가 곧 농업문화 written by 임창덕
쌀과 관련된 사자성어로 일미칠근(一米七斤)이 있다. 쌀알 하나를 만드는데, 농업인의 일곱 근의 땀이 들어간다는 뜻이다. 한자 쌀 미(米)자를 풀어보면 한자 팔(八)+십(十)+팔(八)로 풀이된다며 쌀 한 톨을 기르는데 88번의 수고와 정성이 들어간다고도 한다. 농작물은 주인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라고, 주인의 발이 흙을 기름지게 한다는 말처럼 벼농사는 품이 많이 들어간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의 끈기(Grit)은 벼농사에서 왔다는 말이 있다.
한반도에서는 벼농사는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우리나라 최초 재배 볍씨는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대화동에서 신도시 조성 중에 발견된 가와지 볍씨다. 고양 가와지볍씨박물관에 가면 볼 수 있는데, 이 볍씨는 미국 베타연구소에서 조사한 결과 5천여년 전의 볍씨로 확인됐다.
한편 1998년 충북 청주시의 오창과학산업단지 조성을 위한 문화재 조사 과정에서 벼 18톨이 발견되었다. 소로리 볍씨로 알려진 이 볍씨는 중국 후난(湖南) 성 옥천암 동굴에서 출토된 볍씨보다 2천~4천 년이나 앞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최소 1만 3천여 년 전의 볍씨로 밝혀졌다.
한반도 농작물 재배의 시작은 강원도 고성군 문암리 유적을 통해 알 수 있듯이, 한반도에서는 밭농사가 먼저 시작되고 이후 어느 정도 농사의 기술이 축적된 이후 시점인 청동기시대 벼농사가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있다.
우리의 주식이자 나라의 근간이었던 쌀은 곧 우리의 삶이었고, 밥은 백성의 하늘이었다. 쌀은 인류가 가장 초기에 재배한 곡물 중 하나로, 밀과 함께 전 세계적으로 인간 식량의 중심 역할을 하는 3대 작물 중 하나다. 세계 인구의 약 절반 이상이 쌀을 주식으로 사용하며, 특히 아시아 지역에서는 인구의 90% 이상이 이 쌀을 식량 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쌀은 고유한 특성과 다양한 요리 방법으로 다양한 식문화를 형성하고, 인류 식생활의 핵심 자원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우리가 먹는 찰기 있는 단립종(Short grain rice)인 자포니카(Japonica)는 한국, 일본, 중국 동북 3성 등에서 주로 생산되고 있으며, 전 세계 쌀 생산량의 10% 정도 된다. 나머지 90%는 입으로 불면 날아간다는 장립종(Long grain rice)인 인디카(Indica)다. 따라서 자포니카 쌀의 생산량이 적기 때문에 국제적으로 가격 변동폭이 클 수밖에 없다.
쌀은 인류에게 곧 생명이자, 문화를 만드는 역동적인 핵심체라는 것은 자명하다. 음식의 역사는 인류의 농업과 문명 발전과 깊은 관련이 있다. 초기에는 사냥과 채집을 통해 얻은 식량으로 생존했지만, 약 1만 3천여 년 전에 농업이 발전하면서 인류는 정착 생활을 통해 식물을 직접 재배하고 가축을 길러 식량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스라엘의 역사학자인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는 자신의 책 '사피엔스(Sapiens)'에서 농업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제시기도 했다. 농업을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사기 중 하나로 묘사하고, 농사는 인류의 대재앙이라 하며 농업혁명을 부정적으로 보기도 했다. 노동에 대한 부담을 가중시키고, 식량 부족과 인구의 폭발적 증가와 밀접한 접촉 생활로 인한 전염병 확산 등이 그 이유였다. 그러나 지금처럼 인구의 폭발적인 증가와 예술, 과학, 철학 등 다양한 문화의 발전의 중심에는 농업이 있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한편 식량 생산의 증가와 함께 불의 발견은 또 한 번의 혁명을 불러왔고 음식을 익혀 먹기 시작하면서 영양 섭취의 향상은 물론, 음식을 익히고 가공하는 기술은 지역, 문화, 종교 등에 따라 다양한 음식 문화를 형성하게 되었다. 익힌 음식은 저항성 전분을 소화되기 쉽게 만들고, 육류도 변성 단백질로 바뀌기 때문에 흡수하기 쉬워진다. 이로써 뇌의 성장은 진화를 촉진시켰다. 육식을 통한 단백질은 뇌의 크기를 키웠을 뿐만 아니라 출산율에도 영향을 미쳐 인구를 증가시키는 기능을 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이처럼 농업은 먹거리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더 많은 인구를 지원하는 데 기여했다. 동시에 다양한 문명들은 특유의 농업 기술과 음식 문화를 개발하는 토대를 제공했다. 농업의 발전과 함께 음식의 가공과 요리 기술도 발전했다. 요리 없이는 농업 없다는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니다. 각 지역은 지역 특성에 따라 독특한 음식을 개발했고, 이는 지역 간 문화 교류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인 과정을 통해 음식은 농업과 문명의 중요한 측면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으며, 오늘날에도 각 지역의 음식은 그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반영하는 중요한 측면이다. 음식의 역사와 농업은 우리 문화와 삶의 기반이 되는 중요한 영역으로, 특히 쌀은 그중에서도 우리의 가치와 정체성을 형성하는 핵심적인 부분이다.
시카고대학 경영대학원 행동과학 토머스 탈헬룸(Thomas Talhelm) 교수는 벼농사와 밀농사에 따른 문화적 차이의 증거라는 논문에서 벼 농사와 밀 농사의 문화적 차이가 농업 방식과 그로 인한 집단 구조에서 비롯되며, 이는 공동체와 개인주의, 집단주의와 개인주의의 차이로 나타난다고 설명한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벼 농사와 밀 농사의 문화적 차이는 주로 관개 시스템과 이에 따른 집단 구조에서 비롯된다고 봤다. 탈헬룸은 논문에서 벼농사가 주로 물을 대는 논에서 이루어지며, 물이 충분히 고여 있는 논에서 자라기 때문에 관개가 필수적이라고 설명한다. 관개를 위해서는 물길을 만드는 작업이 필요하며, 이로 인해 많은 인력이 필요하게 된다. 이 작업은 농업인들이 함께 참여하며 물길 주위에 모여 살게 되는데, 이는 자연스럽게 공동체가 형성되는 계기가 된다. 탈헬룸은 이러한 관개 작업을 통해 집단주의적인 의식이 강조되고, 협력과 공동체 중심의 가치가 형성된다고 주장한다.
한편, 밀 농사는 물이 필요 없이 맨땅에서 자라기 때문에 관개가 필요하지 않다. 이로 인해 개인주의적인 생활방식이 자리 잡게 되었으며, 사람들이 함께 할 일이 없고 모여 살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이 탈헬룸의 주장이다.
한편 음식 요리는 우리 인류의 역사 속에서 가장 초기의 생존 기술 중 하나로 등장하였으며, 농업의 발전과 함께 현재의 다양하고 풍부한 식문화를 이루어냈다. 그러나 최근에는 전염병의 영향, 맞벌이 영향 등으로 가공식품 중심의 식생활이 증가하고 있다. 밀가루 위주의 가공식품과 밀키트를 통한 간편한 요리로, 전통적인 요리 과정이 소홀히 되고 있다. 이러한 추세는 농업 부문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가정에서의 요리 감소는 농업 생산물의 수요 감소로 이어질 뿐만 아니라, 농민들의 어려움을 증가시키고 있다. 농업과 음식 문화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 요리 방법이 사라지면 요리도 사라지고 전통의 맛도 사라진다. 한 분야의 위축은 다른 분야에도 연쇄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음식 문화와 농업을 보존하기 위해 '맛의 방주' 프로젝트가 전 세계적인 슬로푸드 운동으로 일환으로 확산되고 있다.
이 프로젝트는 멸종 위기에 처한 음식의 맛을 보존하고, 전통적인 요리 방법과 식재료를 재조명하여 현대적인 음식 문화에 적용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먹던 음식이 곧 치유음식(Agro-healing Food)이고, 생물 다양성과 맛의 보존이 곧 치유음식이다.
그래서 최근에는 음식을 통한 치유가 중요한 주제로 떠오르고 있다. 식사가 단순히 배를 채우는 행위가 아니라 마음을 채우는 행위로 변화하면서, 치유농업, 치유음식이라는 개념이 강조되고 있다. 직접 요리하는 과정은 건강을 증진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물론, 농업 생산을 지원하여 지속 가능한 인간의 삶을 뒷받침한다.
우리는 음식과 농업이 인류 문명의 중요한 구성 요소로서 상호 작용하며 발전해 왔다는 사실을 깊이 이해해야 한다. 전통적인 요리 방법과 지역의 특산물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음식을 통해 우리의 식문화의 뿌리와 문화를 지키고 발전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음식은 곧 문명의 역사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