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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호정 Jul 18. 2016

그는 '미래파(futurist)'였다.

영화 '싱 스트리트'에서 찾은 '미래'를 향한 길

소년은 불안한 세상 속에서 

빛나는 미래를 꿈꾸는 

'미래파(futurist)'였다.


그는 억압된 세상 속에서 자기 자신을 그리며, 현실의 장애물로 여겨질 수 있는 것들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가진 미래파였다. 그것은 그를 앞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게 하고, 우연히 만난 사랑과 음악은 그의 전진에 촉매가 되었다. 이 이야기는 바로 영화 <싱 스트리트>의 '코너(퍼 디아 월시-필로 분)'의 이야기다.


불안 가득한 세상 속에서 그는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그런데 영화 속 그의 모습은 낯설지만은 않다. 영화 밖 현실에서의 우리 또한 억압된 세상 속에서 앞날에 대한 끝없는 고민을 한다. 그 고민들의 끝이 희망의 모습이 아닌 불안과 걱정의 모습이더라도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세상은 아름답지만은 않다. 때문에 슬픈 사실이지만 우리는 끝없이 세상이 보여주는 우울함을 깨끗이 떨쳐내지는 못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조금은 슬픈 현실을 뒤로한 채 앞으로 나아가고 싶어 코너는 미래파가 되었다. 그의 세상은 어떠한지, 그리고 그가 나아가고 싶어 하는 세상은 어떤 모습인지 그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코너 : 신발이 운동화나 그런 게 아니고 갈색이지만... 아주 합리적입니다. 
벡스터 : 검은색이 아니잖아.


주인공은 단지 갈색 신발을 신었다는 것만으로 맨발로 걸어 다니게 되는 벌을 받았다. 그 규칙은 학교 내 규정에 따른 것이었고, 코너는 돈이 없어 사지 못했다고 말하며 그의 피치 못한 사정을 얘기한다. 하지만 학교의 교장선생님인 벡스터는 그러한 코너의 사정을 들어주지 않고, 단지 검은색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를 억압한다. 그리고 또한 그가 밴드 활동을 시작하며 했던 화장은 교칙에 있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벡스터는 '넌 남자고, 남자는 화장을 하지 않아.'라고 말하며 앞서 보여준 교칙이 생성되는 과정이 비논리적인 과정 속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현실에서도 누군가 만들어 놓은 규칙은 우리를 알게 모르게 압박하고 있다. 이것은 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남자는 화장을 하면 안 돼.', '여자니까 날씬해야 해.', '나이 먹었으니 직장을 가져야지.'라는 것들과 같은 문장은 틀에 박힌 구시대적 사고방식의 전형을 보여줌과 동시에, 역으로 그 사람의 한계를 정해버리고 만다. 


이처럼 빠르게 변해가는 사회 속에서 통념으로 여겨졌던 것들이 더 이상 통념이 아니며, 한 번쯤 우리 머릿속 깊이 새겨져 있는 규칙들에 대해 재점검을 해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과정에 있어서 필요한 것은 바로 '몰라도 돼'이다.


넌 '몰라도 돼'를 배워야 해.


코너의 형인 '브렌든(잭 레이너 분)'은 밴드를 시작하며 고민에 빠진 코너에게 '몰라도 돼'를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것이 '락앤롤'이며, '배워야 하는 것'이라고 그는 이어서 말한다. '모른다'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라는 다소 아이러니한 이 말은 우리가 살면서 쉽게 간과하고 있는 점일 수 있다. 


물론 불확실한 미래보다는 확실히 알고 있는 미래가 더욱 안심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미래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때문에 사람들은 '통계학'을 연구하고, 미래를 '예측'하길 원하지만 틀린 일기예보와 같이 종종 빗나가곤 한다. 때문에 영화는 우리가 '모른다'라는 새로운 길을 제시한다. 그가 말하는 '모른다'는 '무지(無知)'의 모습이 아닌 '알 수 없는 것'은 모른 채 내버려두라는 것이다. 코너는 후에 작곡을 하며,  '누군가를 잘 알지 못할 때, 더 관심이 가잖아. 네가 원하면 그들은 무엇이든지 될 수 있어. 하지만 네가 그들을 알게 된다면 그들에겐 한계가 있어.'라고 말한다. 즉, 모르는 채 둔다면 그것은 한계를 두지 않을 수 있고, 무엇이든지 될 수 있는 상태가 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2011년 엠넷에서 방영된 '슈퍼스타 K3'에서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당시 준우승을 한 '버스커버스커'의 '막걸리나'의 공연에 대한 가수 '윤종신'의 심사평이었다. 그는 이전까지 '버스커버스커'에 대해 독설을 가했다. 그것의 대부분은 다소 기본적인 요소들에 대한 코멘트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가 '막걸리나'의 노래를 같이 작업하며 느낀 것은 '버스커버스커는 '기본'과 '정석'에 있어서 모자란 친구들이 아니다. 단지 그것을 벗어난 것이었다.'라고 말하며 원작자로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찬사("제 곡을 더 좋게 바꾸어주어서 고맙습니다.")와 함께 '버스커버스커'를 극찬하였다. 장범준이 잘못 따온 코드가 '창의적인 발상'이 된 데에는 '알았기 때문'이 아닌 '몰랐기 때문'이었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막걸리나'라는 좋은 노래를 들려주게 되었다.


이처럼 '모른다'는 것은 백지의 모습으로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보이지만, 무엇이든지 그곳에 그릴 수 있게 된다는 점에서 다양한 가능성을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이다. 영화에서 빨간 슈트 복장을 입은 채 부른 삽입곡인 'Drive It Like You Stole It'에서는 '이것은 당신의 인생이죠. 뭐든 될 수 있어요. 락 앤 롤을 배워야 해요.'라고 말하며, '락앤롤'이라고 했던 '몰라도 돼'를 배운다면, 무엇이든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러한 모르는 상태의 지속은 결국 세상에 있어서 불안한 요소들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게 되고, 또한 불안이 낳은 슬픔 가득한 세상 속에 살아야 한다는 다소 잔혹한 사실만이 남게 된다. 영화는 이러한 모습 속에서 한 가지 행복을 찾는 방법을 알려준다. 그것은 바로 '행복한 슬픔'이다.


너의 문제는 슬픔이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거야. 
하지만 사랑이란 바로 슬픔이야, 코스모.


코너를 사랑에 빠지게 하고, 음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만든 장본인인 '라피나(루시 보인턴 분)'는 코너에게 '코스모'라고 하며 자신만의 애칭으로 부른다. 그녀는 자신을 위해 '행복한 노래'를 만들어 달라고 하고, 코너는 그것에 '내가 행복하지 않다면요?'라고 반문한다. 그다음 그녀의 대답은 코너를 혼란에 빠뜨렸다. 그녀는 '슬픔'또한 '행복'이 될 수 있다면서, '행복한 슬픔'에 대해 말해준다.


서로 상반된 두 감정이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을 코너와 다른 밴드 메이트들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는 '온갖 고된 현실들을 감당하는 것'이라고 대답을 내렸다. 그리고 후에 나온 그의 어머니가 저녁 무렵에 짚 압 문턱에 앉아 담배를 물고 신문을 읽는 것이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이라고 묘사하며, 슬픔이 배경이 된 현실 속에서 '소소한 행복'을 보여준다. 이런 모습들 사이에서 '행복한 슬픔'은 거대한 어떤 것이 아닌 삶에 있어서 잠깐의 여유나 작은 순간에 지나지 않는, 그것이 오히려 더 큰 행복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잭 E. 도슨'이라는 화가가 그린 그림이 하나 있다. '폭풍우 가운데 평화(Peace in the Midst of the Storm)'라는 제목을 가진 그림에는 폭풍우가 치는 바다의 절벽을 배경으로 아주 조그마한 둥지를 지키고 있는 비둘기가 그려져 있다. 그림의 거의 다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로 거센 풍파와 어두운 색의 배경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그 그림의 주제가 '평화'가 될 수 있었던 데에는 그 가운데 아주 작은 모습으로 둥지를 지키는 '한 마리의 비둘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한 마리의 비둘기가 주제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거센 폭풍우가 배경이 되어주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비둘기만이 그려져 있는 그림 보다, 이렇게 폭풍우를 배경으로 놓았을 때 그것이 더욱 빛나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이처럼 우리의 삶도 현실이라는 다소 어둡게만 느껴지는 것을 배경으로 삶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가운데 '소소한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삶 또한 '행복'을 주제로 삼을 수 있게 될 것임을 영화는 말해준다. 결국 '행복함'과 '슬픔'은 공존할 수 있을뿐더러, 배경이 되는 슬픔은 행복을 더욱 부각하여주기도 한다. 우리는 현실이 곧 우리의 삶에서 '메인'이 아니며 어디까지나 '배경'이고, 그 가운데 하나의 '작은 행복'이 삶의 '주제'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은 결국 '영국'으로 떠나가기로 한다. 그의 형은 '영국에 준비된 것이 무엇이냐?'라고 하나하나 물어보자, 그의 '데모 테이프'과 '비디오' 그리고 그녀의 '사진'을 통해, 아무것도 없는 영국에 그들이 그리는 '미래'가 놓여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대답은 그의 형을 만족시켰고 곧바로 출항할 수 있게 된다. 그들의 뱃길은 곧 험난해졌다. 풍파가 몰아치고 큰 배가 지나가기도 하며 위험천만한 순간의 연속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러한 풍파 속에서도 웃으며 자신들의 미래를 그리고 있었다. 다시 말해 불안뿐인 현실 속에서도 그들은 환한 미소와 함께 미래로 나아갈 수 있었다. 


10대의 모습으로 묘사된 그들이 갖고 있던 고민들은 현재의 우리 것과 겹쳐 보이기 마련이다. 우리 또한 한 치 앞도 모르는 앞날에 대해 불안과 걱정을 하기 마련이고, 그 사이 우울해져만 가는 우리들의 모습만이 남아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이 결코 우리들의 인생에 있는 모든 것이 '슬픔'뿐이라는 것은 아니다. '싱 스트리트'의 그들 손에 있는 것은 '엄청난 부'나 '화려한 인맥'이나 '강력한 권력'따위가 아니었다. 단지 현실이 만든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미래의 모습을 한껏 담은 작은 '꿈'하나가 그들을 미래로 이끌었고, 그들의 모습에는 '불안'이나 '걱정'보다는 '희망'이 가득했다.


우리 또한 작은 꿈 하나를 품고 삶의 소소함 속에서 현실에 굴복하지 않고 맘껏 미래를 그려본다면, 저 멀리서 희망을 가득 안은채 달려오는 미래를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환한 미소로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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