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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호정 Jul 26. 2016

쇼생크 속 희망 예찬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찾은 '희망'의 의미

탈출(脫出)


'탈출'이란 단어는 어느새 '일상'이란 단어와 합쳐져 모두가 꿈꾸는 것이 되었다. '일상'이란 것이 힘들어지면서 그것을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 또한 커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우리가 '일상'이란 것을 삶에서 완전히 배제할 수 없기 마련이고, '일상 탈출'은 단기적인 성격을 가진다. 그것이 주는 행복은 짧으며, 어쩌면 일상으로의 복귀에 아쉬움을 넘어 '두려움'을 주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언제나 '일탈'을 꿈꾸곤 한다.


더욱 의미를 확장하여보면 그러한 '탈출'은 단순히 '일상'에 한정되는 것이 아닌, 그것이 모여 쳇바퀴 같은 삶에서의 '탈출'을 꿈꾸기도 한다. 여기서의 탈출은 일상 자체를 완전히 타파해버리는 익숙한 것으로부터의 '탈출'을 뜻한다. 이것은 누구나 꿈꾸지만 감히 하지 못하는 그런 '탈출'이다. 우리는 그것에 '희망'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따르곤 한다. 하지만 멀리서 다가오는 듯하면서도, 전혀 모습을 보이지 않는 듯한 '희망 고문'이 되어 우리를 나아가게 함과 동시에 옥죄여온다. 때문에 '희망'이란 것은 때때로 고통스럽다. 우리는 이런 '희망'을 품고 살아가야 하는지 고민에 빠질 수도 있다. 이러한 '탈출'과 '희망' 두 가지 단어를 안 고있는 영화가 있다.


프랭크 다라본트 감독의 <쇼생크 탈출>에서는 누명을 쓰게 되어 교도소에서 종신형을 살게 되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그리며, 그 안에서의 생활과 사람들과 함께 삶에 있어서 '희망'이란 단어의 의미를 곱씹어보게 한다. 그의 험난한 수감 일기는 한 수감자의 시선으로 시작된다.


레드 : 처음 앤디를 보았을 때,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바람만 세 개불면 날아가버리게 생긴 친구였다.
그것이 내 첫인상이었다.


수감 생활한 지 20년이 된 '레드(모건 프리먼 분)'는 수감되어 들어오는 '앤디 듀프 레인(팀 로빈스 분)'을 처음 보며 '바람만 세게 불면 날아가버리게 생긴 친구'라고 생각했다. 그의 모습은 이런 험한 세상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말쑥한 정장 차림은 그의 사회에서의 지위를 짐작하게 하였다. 그런 그가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들어온 곳은 흑백으로 가득 찬 '교도소'였다. 그곳은 전혀 '사람다운 삶'을 보장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곳에서의 '교도관'은 확실히 '죄수'의 위에 있는 모습이었다. 그들은 가차 없이 폭력을 쓰기도 하고, 죄수 하나가 죽어도 눈 하나 꿈쩍 하지 않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타인에 의한 지배는 이렇듯 '사람다운 삶'을 잃게 만든다. 영화의 밖 현실에서도 이는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사회 구조의 어디에 속하더라도 누군가의 아래에 위치하게 될 것이다. 그 가운데 서로 신뢰와 존중이 아닌, 탄압과 지배로 관계가 이루어진다면, 올바른 구조가 형성되지 못할 것이다. 종이에 흠짓이 없다면 잘 찢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종이 끝에 난 조그만 흠짓은 그 종이를 금방 찢어지게 만들 수 있다. 서로를 생각하지 않는 상하관계는 종이의 흠짓과 같으며, 곧 구성체를 병들게 할 수도 있는 하나의 전조증상일 수도 있다. 영화에서 이런 관계는 비인간적이고, 비윤리적으로 그리며 그러한 자세를 지양한다.


주인공 앤디는 이러한 곳에서 남들과는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바람이 불면 날아갈듯한 모습은 꽉 막힌듯한 교도소에서 세차게 요동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가 우선적으로 원한 것은 바로 '친구'였다.


이름이 뭐였죠?


그는 같은 날 수감된 죄수중 하나가 교도관에 폭력에 결국 죽었다는 얘기를 듣고는, 그의 이름이 무엇이었는지를 묻는다.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던 것을 그는 궁금해했다. 그는 죽어버린 그에게서 묘한 동질감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애처롭게 자신을 꺼내 달라고 외치는 죽어버린 수감자의 모습을 다른 모두가 이해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에게 타인은 '내깃거리'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의 이름을 묻는 앤디에 대해 아무것도 소용없다는 듯이 다그치는 것으로 대답한다. 교도소는 그런 곳이었다. 선한 행동은 의심되기 마련이고, 마음을 담아내는 행동 자체가 경계되는 곳이었다.


하지만 앤디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야외작업 중에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위험한 행동을 통해서, 자신과 함께 야외 활동 중이었던 그들에게 맥주를 선물해 주었다. 그는 술을 마시지 않았지만, 행복한 미소로 그 순간을 즐기는 다른 '동료'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는 끔찍한 교도소 생활 사이에서 '마음'을 담아내는 것으로 친구를 사귀기 시작했다.


영화 밖 현실을 보면, 나이가 들수록 '친구'를 만들기가 더욱 힘들어지기 마련이다. 사회의 발을 내딛고 나서 '마음'을 보이는 것은 어떤 일인지 자신의 '약점'을 보이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 되어버렸다. 때론 이러한 '진심'이 왜곡되어 '가식'과 같이 포장되기도 하며, 결론적으로 자신의 본심을 숨긴 채 사무적으로나 관계를 맺게 된다. 하지만 영화에서 앤디는 억압된 환경 사이에서 '좋은 친구'를 찾아냈다. 그가 위험부담을 안고도 그렇게 할 수 있었던 데에는, '두려움의 부재'에 있었다.


브룩스 여기 있었다.


50을 교도소에서 보낸 '브룩스(제임스 휘트모어 분)'는 가석방되어 사회로 나왔다. 세상의 자유로움을 만끽하며 여생을 보낼 줄 알았던 그의 삶은, '사회 부적응자'가 되어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게 돼버린다. 그는 '익숙함'으로부터의 탈출은 '두려움'을 수반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가 함부로 일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돈'이나 '생계'와 같은 현실적인 문제와는 별개로 '두려움'이 작용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러한 '변화'에 대한 '두려움'은 당연한 것이다. 그것이 비난되어야 할 사항은 아니다.


혹자들은 '하면 되지 왜 안 해?'라는 단순한 논리로, 섣불리 행동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비난조로 묻곤 한다. 그것은 현실의 여건들을 떠나서, 심적인 부담감과 함께 두려움이 적용돼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것뿐이다. 그들의 '용기'없는 행동을 비난하는듯한 모습은 바람직하지 않다. '두려움'이나 '용기'와 같은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을뿐더러, 마음먹은 대로 조절되는 것들이 아니다. 때문에 그들이 갖고 있는 두려움이란 감정에 원색적인 비난을 하기보다는, 이러한 심리적 요인들에 대한 이해와 응원이 더욱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두려움'은 지워버리는 것이 아닌, 안고 가며 자신을 더욱 단단하게 만드는 도구로 사용되어다. 어디 위치에 올라서나 '두려움'이란 감정은 따라오기 마련이고, 이것을 지우기 위해 억지로 행동하는 것은 내재적 에너지를 낭비하는 꼴이 될 수도 있다.


영화는 다른 곳에서 이러한 '두려움'을 안고도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알려준다. 그것은 바로 '희망'이다.


앤디 : 세상엔 돌로 만들어지지 않은 곳들이 있어요.
거기엔… 놈들이 들어갈 수 없고, 만질 수도 게 있어요. 당신 것이죠.
희망이죠.

레드 : 희망? 하나 알려줄까, 친구. 희망이란 위험한 거야.
사람을 미치게 만들 수도 있어. 이 안에선 아무런 소용도 없다고.
그런 생각은 버리는 게 좋아.


앤디는 교도소 내에 '음악'을 들려주소동을 일으키며, 하나의 뜻을 전했다. 그것은 바로 '희망'이었다. 독방에 수감되어 머릿속으로 '음악'을 되뇌었다는 그는 절대 빼앗기지 않는 것을 '희망'으로 말했다. 하지만 '레드'는 이와는 상반된 의견이었다. '희망 고문'이라는 단어가 존재하는 만큼, '희망'은 때론 사람들을 더욱 옥죄이곤 한다. 게다가 교도소 안에서의 희망은 전혀 소용이 없는 것으로 묘사되며, 앤디의 생각을 부정하며, 영화는 '희망'이란 단어에 의문을 제기한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유태인 의사였던 '빅터 플랭클'이 쓴 책 '죽음의 수용소에서'에는 유태인 수용소에 갇혀 지내면서 그가 보았던 '희망의 힘'이 담겨있다. 그곳의 얘기 중에는 '3월 30일에 수용소가 해방될 것'이라고 말하던 한 사람이, 3월 말이 될 때까지도 아무런 소식이 없자 결국 급격히 병이 들고 말더니 3월 31일에 생을 마감했다는 얘기가 나온다. 또한 '크리스마스'나 '새해 첫날'과 같은 하나의 기준점이 되는 날에도 수용소에서의 사망률이 증가했다고 말한다. 이것은 그들이 갖고 있던 '희망'이란 무기가 꺾이면서, 심적인 고통이 병이 되어 그들이 살아갈 의지를 앗아가면서 나온 결과라는 걸 보여준다. 반대로 '빅터 플랭클'은 자신의 부인과 만날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고, 덕분에 4월에 해방될 때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렇듯 '희망'이란 것은 품고 있는 것만으로도 살아갈 힘을 주고,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때론 그것이 우리를 '고문'하듯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이러한 '희망'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보여주기 위해, 정의가 실현되고 앤디는 '탈출'하게 된다. 그리고 브룩스와 마찬가지로 '두려움'을 고있던 레드 또한 목숨을 끊으려 고민하지만, '희망'의 상징인 '앤디'와의 약속을 통해 두려움을 안고서도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온갖 억압적인 것들 뿐이었던 교도소 안에서 추구했던 것들은, 어쩌면 현실의 우리는 애써 삶에서 배제하는 것들일 수 있다. 그가 품었던 '희망'이란 단어는 그를 결국 '자유'롭게 만들었으며, 이것은 곧 우리 또한 마음속에 날갯짓하는 '희망'이라는 것을 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때론 '희망'이란 것이 벽이 되어 우리를 가로막고, 힘들게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벽은 그가 그랬던 것처럼,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무너저 내릴 것이고 우리에게 빛이 되어 내려올 것이다.

그가 이루었던 '탈출'은 빛이 되어 그에게 새로운 삶이 되어 내려왔다. 우리가 꿈꾸는 '탈출'또한 그가 그랬던 것처럼 언제나 우리를 향해 손을 뻗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만 '희망'이란 것이 너무 눈부셔서 우리에게 닿을 때까지 보이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뿐이다. 우리가 '희망'을 저버리지 않고 언제나 마음속에 품고만 있는다면, 우리는 그가 그랬던 것처럼 양팔을 뻗어 '희망'이 '현실'이 되는 순간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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